# 183
183.
제8장 후회는 그저 후회로
만약 다시 그를 보게 된다면
그는 날 용서해 줄까?
그래, 어쩌면 그는 날 받아줄지도 몰라.
그에게 가고 싶다, 그에게로…….
- 소혼미랑
***
언제나 시장은 활기로 넘쳐 난다.
“우울하고 의욕이 없는 사람이라면 시장을 둘러보라. 열정을 얻고 싶은 자도 마찬가지. 그들은 그곳에서 활력과 열정을 흡수하게 될 것이다.”
중원의 학사인 만통서생 학운위가 위와 같이 말한 것처럼 삶의 열기가 지글거리는 곳이 바로 시장이다.
지금 이곳 청운 지역 남서쪽에 자리한 화결(華結)이라는 이름의 시장통에도 물건을 선전하는 장사치들의 고음으로 쭉 뻗어 올라간 목소리와 물건의 효용을 묻고 값을 묻는 손님들의 목소리로 바글거렸다. 시장의 열정의 핵심은 아무래도 흥정이라고 봐야 했다.
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돈이 오고 가는 곳인지라 단 몇 전이라도 깎아보려는 손님들과 배수진을 치고 물건의 값어치를 주장하는 장사꾼들 사이엔 이루 형용하기 힘든 심리전이 펼쳐지며 뜨거운 열기를 토해내는 것이다. 또 한쪽에서는 엄마를 따라나선 아이들이 신기한 듯 기웃거리며 알록달록한 과자들을 사달라고 투정 부리며 요란을 떠는 모습도 이곳의 열기를 더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으아앙∼ 엄마, 저기 저거 사달란 말이야∼!”
“안 돼! 집에 가서 엄마가 더 맛있는 거 만들어줄 테니 투정 부리지 마렴.”
“아이∼ 지금 당장 먹고 싶대두∼!”
이런 실랑이도 다른 곳에서는 시끄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화결시장 안에서는 그다지 소란스런 축에 끼지도 못했다. 그보다 두세 배는 요란한 소리들로 주위가 술렁이고 있으니 말이다.
“자자, 50년 동안 만두를 빚어온 할머니의 손맛이 가득 담긴 전통 만두입니다. 맛은 확실히 보장해 드립니다. 어서들 오세요, 어서요. 맛없으면 돈 받지 않습니다.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만두입니다.”
“이 옷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서역에서 멀리 이곳까지 운반되어진 것으로 곱기가 마치 구름을 만지는 듯하며…….”
“개 사세요, 개. 더운 날에 잡아먹으면 더위를 이길 수 있고 추운 날에 잡아먹으면 추위도 이기게 해주는 만병통치약입니다. 끌고 다니다가 여차하면 비상 식량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튼튼한 놈을 보십시오. 어서들 구경하세요. 꼭 약이나 식량이 아니더라도 도둑을 방지해 주기도 하니 절대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나물입니다, 나물. 어서들 사가세요. 싱싱한 나물입니다.”
이렇게 화결시장은 시끌벅적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시장이라고 해서 모든 곳이 다 요란스러운 것은 아니다. 개인 상점을 가지고 있는 장사꾼이나 또 터줏대감들은 중심 터에 좌판을 벌여놓고 물건을 팔았고 뜨내기들이나 집에서 직접 만든 떡이나 혹은 기른 나물을 팔러 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시장 중앙으로는 진출하지 못하고 그저 시장의 한쪽 어귀를 차지하고 있다가 어쩌다 지나는 사람의 발걸음을 붙잡을 따름이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어둠이 짙어지면서 시장에는 하나둘 상인의 모습과 손님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시장 어귀 쪽에서 과일을 팔던 한 노파도 구부정한 몸을 힘겹게 움직이며 막 과일들을 정리해 돌아갈 채비를 갖추려 했다.
그때 노파를 멈추게 한 것은 30대 후반 정도 돼 보이는 청의를 걸친 사내였다. 청의중년인은 가까이 다가와 친근한 어조로 물었다.
“할머니, 많이 파셨습니까? 집에 들어가는 길인데 어느 것이 맛있는지 모르겠네요?”
할머니는 정이 가득 담긴 웃음을 짓고 중년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들은 다 맛이 기가 막히다우. 내 좋은 걸로 골라 드릴까?”
“하하, 그렇게 자신하시는 것을 보니 굉장한가 보군요.”
“그럼, 두말하면 잔소리지. 내 싸게 줄 테니 골라보시구려.”
“하하, 그럼 열 개만 골라주시겠습니까?”
“내 최고 중의 최고로 골라 드리리다.”
할머니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사과를 하나둘 뒤집어보며 고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막 세 번째 사과를 고르며 바구니에 집어넣을 때였다.
슈욱∼
슈욱이라는 소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과를 바구니에 넣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의 진원지는 놀랍게도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할머니의 손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
노파는 사과를 놓자마자 손을 매의 발톱처럼 구부린 채로 앞쪽에 있던 사내의 목을 향해 쭉 내뻗었다. 절대 장난으로, 그저 상대를 놀래켜 주려는 그런 식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노파의 손이 진행하는 속도나 위세가 너무도 위협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동작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급작스런 상황은 곧 중년 남자의 목에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찔러 들어가고 거기에서 피분수가 사방으로 튈 것이 확실해 보였다. 도대체 사과 열 개를 산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아니, 원래 15개를 사야 목숨을 부지하고 10개만 사면 곤란하단 말인가? 더욱이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웃음까지 나누었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목이 꿰뚫려 처참한 지경에 처할 것 같던 사내의 몸이 -도무지 믿을 수 없게도- 활처럼 허리가 꺾이며 손을 피해낸 것이다. 전혀 예비 동작 따윈 없는 깔끔한 모습이었기에 감탄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파가 갑작스레 살수를 전개한 건 말 그대로 갑작스러운 것이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지라 초절정고수라 할지라도 피하기 어려운 정황이었지만 중년 사내는 피한 것이다. 그건 중년 사내의 무공이 고명하다는 뜻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미 마음에서 어느 정도 상대방의 행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중년 사내가 허리를 뒤로 꺾을 때 노파의 손길은 속절없이 허공을 찍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날 리는 만무했다. 노파는 어느새 손을 아래로 찍어 눌렀고 중년인은 오른발로 땅을 밀어 그 힘을 따라 허리가 꺾인 상태에서 뒤로 주르륵 물러났다. 결국 다시 한 번 노파의 손은 허공을 갈랐고 두 사람은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 2장여의 간격을 두고 마주 섰다.
이제 더 이상 화기애애한 장사꾼과 손님이 아니었다. 저녁 찬거리를 사려던 사람들이 이 갑작스런 광경에 놀라 허둥대며 물러섰고 일순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변을 둘러쌌다. 고수들의 격전은 평생에 걸쳐 한 번 볼까 말까 한 경우가 많은지라 이들로서는 가슴이 뛰는 흥분 속에서 지켜보았다. 제대로만 본다면 후일 술을 마시면서 거창하게 친구들에게 떠벌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구경하는 이들의 시선은 노파에게로 쏠렸다. 분명 과일 행상을 하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 거기에 소탈함이 가득 담겨 있던 할머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 지금 한 명의 늙은 여전사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변신은 너무도 극적이었고 절정에 이른 당황스럼까지 내포되어 있는지라 구경꾼들로부터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중년 사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놀리듯이 입을 열었다.
“소혼미랑, 눈치 하나는 빠른걸. 너의 변장은 매우 훌륭했다.”
거기까지 말한 후 그 뒤부터는 전음으로 말했다.
“하지만 넌 혈곡에 우리 귀영대가 있다는 것을 간과했어. 우리가 널 찾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라면 솔직히 실망스럽구나. 흐흐.”
과일 행상을 하는 노파는 중년인의 말처럼 소혼미랑이 역용(易溶)한 것이었다. 그녀는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 후 혈곡의 인물들과 접선할 지점으로 가지 않고 중원 남단에 위치한 밀림 지대 운남으로 이동해 은밀히 금환신공을 익히려 했다.
그녀로서는 마땅히 혈곡의 추적이 있을 것을 감안하여 시시때때로 모습을 바꾸면서 사람들 속에 묻혀 이동하였는데 결국 한 달이 조금 넘는 시점에서 발각되고 만 것이다.
“용케도 찾아왔구나.”
미랑은 할머니 음성을 포기한 채 낭랑하게 말했다.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살기 어린 대치 속에서 할머니가 -그들 눈에는 영락없이 할머니로 보이고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를 내자 여기저기서 기이한 탄성을 터뜨렸다.
그녀는 귀영대가 참여한 이상 오늘 이 자리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귀영대는 혈곡 내에서도 최고의 추적 능력을 갖춘 이십 인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단연 무서운 자는 귀영대를 이끄는 악풍이었다.
사실 그녀는 귀영대의 존재만 대충 알 뿐 실질적으로 그들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 하나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은 귀영대가 움직이는 한 결코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역시 염려했던 대로 그놈의 호접향(蝴蝶香) 때문이야.’
그녀는 천선부로 파견되면서 호접향을 시술받았었다. 호접향은 만리향과 비슷한 효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미랑이 시술받은 나비는 붉은 나비라는 적접이었다. 오른쪽 어깨에 이틀간을 앉아 있게 되면 영원토록 그 향이 남게 되는데 훗날 문제가 발생하여 배신을 하거나 실종되었을 때 적접을 날려 찾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미랑은 두려움이 몰려들었지만 그냥 주저앉아 죽음을 맞이하는 건 더욱 두렵게 느꼈다. 그녀는 씨익 웃음 짓고 입을 열려고 하다가 그대로 쌍장을 날렸다. 누가 보더라도 분명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할 그 시점에서 공격은 이루어졌다.
슈욱-
중년인은 귀영대의 1호였다. 귀영대는 각자의 이름 대신 번호로 호칭되었는데, 번호의 빠름과 늦음에 따라 그 능력의 차이가 미세하게 나는 편이었다. 1호는 뜻밖의 기습이라 마주쳐 나가기 어려웠는지 보법을 펼쳐 뒤로 물러서며 장력을 해소하고자 했다.
대결에서는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극히 중요한 요소인지라 연거푸 공격을 쏟아 부어 혼을 쏙 빼놓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미랑은 간격이 벌어진 틈을 이용해 그완 반대로 신법을 날려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느긋했다.
‘귀영대는 나 혼자만이 아니란 말이다. 흐흐흐, 쥐덫이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거든.’
그는 그녀가 뻔히 덫에 걸릴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명확한 건 그녀가 가고 있는 방향으로는 절대 가선 안 된다는 점이었다.
‘다 운명이라 할 수 있지.’
그는 순간 신형을 뽑아 올려 미랑이 사라진 곳으로 쏘아갔다. 그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이 황당한 광경에 한동안 넋을 잃고 그들이 사라져 간 방향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지만 땅바닥을 뒹구는 세 개의 사과가 덩그러니 남아 처량한 모습을 내비치며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미랑의 몸은 쏘아진 화살처럼 내달렸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빨리 달려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그녀는 달렸다. 하지만 그녀에게 어떤 뚜렷한 목적지가 있을 리 만무했다. 오로지 떠오르는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절대 잡혀선 안 된다!’
그 강박 관념이 그녀의 두 다리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만일 그들에게 붙잡힌다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혈곡이 배신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천선부에 침투된 유일무이한 첩자였기에 더욱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였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매우 큰 슬픔이지.”
“누구더라? 맞아, 혈랑이다, 혈랑! 아직도 죽지 못하고 있다지?”
“흔히 우리가 듣고 알고 있는 그런 고문은 사실 장난 같은 거라 할 만해.”
파견되기 전 정신 교육을 받으며 미랑은 끔찍한 배신자들의 말로에 대해 들었고 직접 그 험악한 광경을 관찰한 적이 있었다. 어떤 협박보다 무서운 협박이었다. 당시 그녀는 배신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또 눈곱만큼도 그런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흉악한 몰골이 되어버렸던 배신자들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어느새 숲길을 불규칙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슈슈슉-
달려가는 중 몸에 나뭇잎사귀들이 스치는 소리가 예리한 검이 검집에서 나오는 듯한 소리처럼 들렸다.
스스스- 스츠츠츠-
이번에는 다른 소리가 들렸다. 그건 미랑의 몸에 닿아 나오는 소리가 결코 아니었다. 조금 더 거리를 둔 상태에서 전달되어진 소리였다. 좌우 양 옆에서,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옆쪽 약간 뒤로 처진 곳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짐승이나 새, 혹은 바람 소리일 것이다라고 간단히 넘기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무엇보다도 절대 그런 소리 따윈 아니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현실이 되어 나타나는 그런 마술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분명 사람이다. 대략 십여 명은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살인자들인 것이다.
얼마쯤 갔을까?
미랑이 숲길을 뚫고 불쑥 도달한 곳은 숲 안의 작은 공터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문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이라도 달리고 또 달리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공터 중앙에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뒷짐을 진 채 마치 이곳에서 한참이나 기다렸다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