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2장 (183/199)

 # 182

182.

제7장 세상에 알려지다

이런 행운이 나에게 오다니…

꿈같은 일이다.

나의 인생에도 대박은 찾아오는구나.

기다려라, 나의 닥쳐올 미래여.

너를 풍요롭게 해 주마.

- 대망 인명 구조 요원 막포

***

고문산 밑자락.

절벽이 병풍처럼 수직으로 세워진 곳, 어디가 끝자락인지 알 수 없도록 중도에 운무가 가득 펼쳐져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곳, 전설 속에 등장하는 광포존자와 그의 제자 신진자가 대결을 벌였다는 곳. 이곳은 혼금부의 부주 철온이 십 년 전에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그래, 바로 여기가 대망 인명 구조망을 설치하기에 적합한 곳이다!’라고 말했던 장소로 대망 인명 구조로는 세 번째로 개설된 곳이었다.

절벽 밑에는 땅으로부터 약 2장(약 6.6미터)여 높이로부터 거대한 안전망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본다면 대왕거미 -그것도 흰거미 중에서- 가 촘촘하게 거미줄을 쳐놓은 것으로 보이리만치 완벽한 망이었다.

그곳으로부터 약 30여 장 떨어진 곳에 혼망서생 철온은 친구를 앞에 두고 술을 대작하고 있었다. 운무를 뚫고 산꼭대기에 이르러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신선의 풍도를 나타낸다면 절벽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시는 술은 지극히 인간적인 소탈함을 느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철온은 화려한 금포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와 마주한 사람은 외모나 의복만으로 보자면 전혀 친구라고 믿을 수 없어 보였다. 그 친구라는 작자의 모습은 말 그대로 떨거지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철온이 이 자리에 없고 그저 떨거지만 홀로 자리하고 있다면 나름의 운치가 있겠으나 철온의 모습과 대조되는 까닭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양을 띠었다.

철온이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고서 말했다.

“강호를 쩌렁쩌렁 울리던 환상살성 묘진이 이젠 환상걸물 묘진이 되다니… 참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니까. 자네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친구 묘진은 어깨를 으쓱하고 아랫입술을 살짝 내미는 것으로 전혀 대수로울 것이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거참, 나의 상식으론 이해가 안 되는군.”

철온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묘진은 돈이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이었고 일평생 절대 거지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고 거지가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는 분명 거지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철온의 생각이 그럴 만도 했다. 묘진이 거지가 되기엔 그에게 달라붙은 수식어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흑월단주 묘진(妙眞).

환상살수(幻想殺手).

살인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검귀(劍鬼).

무혈살마(無血殺魔).

청부 살수 조직상으로 서열 삼위가 흑월단이었고 그곳의 단주가 바로 묘진이었다.

그가 이런 몰골로 거지가 된 것은 대략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이었다. 표영은 이미 개방 방주가 되기 전, 그러니까 청막을 접하면서 마음으로 다짐한 바가 있었다. 방주가 되면 제일 먼저 강호상에 살인 청부 조직을 제거하겠노라고.

표영은 살수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과거 청막의 막주였던 지문환을 데리고 살수 조직들을 차례로 찾아갔다. 결과적으로 그 발걸음이 묘진의 운명을 거지로 거듭나게 한 계기가 되었다. 표영도 표영이지만 청막이라는 이름과 지문환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위력은 살수 계파에서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크고 작은 서너 차례 정도의 불상사가 있었지만 일곱 개의 청부 조직들을 해체하는 것은 성공적이었다.

표영은 살수들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하나는 개방에 들어올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함이었고 -물론 아무도 그것을 특권이라고 생각진 않았지만- 또 하나는 어디든지 마음이 원하는 대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때 살수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개방에 들어오는 것이 반씩이나 되게 된 것은 착각과 의문 때문이었다. 착각한 자들의 생각은 왠지 개방에 들어가지 않으면 뒤로 보복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의문이 든 자는 왜 청막이 개방에 귀속되었는지, 왜 지문환이 순순히 -비록 겉으로는 투덜거리지만 그것이 그저 마음뿐이라는 것을 다 알 정도로 그는 티가 났다- 개방에 들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묘진의 경우 개방에 든 것은 바로 후자 쪽이었다. 그로선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개방의 방주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구 자네 같은 인재가 거지 생활이냔 말인가?”

철온으로서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철온뿐이겠는가.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것이 분명했다.

돈을 위해 사람을 죽여왔던 묘진이 아니던가!

돈에 환장하기로는 철온은 묘진에게 한참 떨어지는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철온이 기발한 발상으로 혼금부의 부주로서 큰 수입을 얻고 있지만 적어도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철온의 말에 묘진이 눈을 연거푸 빠르게 깜박거렸다.

“말이 뭔가 부족한 듯한데…….”

철온은 묘진이 눈을 연거푸 깜박이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기분이 언짢았을 때 이런 행동을 보였다. 그는 얼른 말을 바꿨다.

“좋아. 그래, 개방의 방주님이 뭐가 그리 대단하시냔 말이네?”

빠진 존댓말이 제자리를 차고 들어와 다시 귓가에 들려오자 그제야 묘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생각하는 듯했다.

“글쎄, 뭘까? 으음… 나도 잘 모르겠어.”

존댓말을 쓸 것을 요구하길래 뭔가 대단한 말이 나올 줄 알았던 철온은 맥이 탁 풀렸다.

“거참, 싱겁긴…….”

“진짜야. 방주님께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는 건 아닌데… 거참, 나도 생각해 보니 괴이하군.”

묘진의 말은 답답해 보였지만 얼핏 그 속에는 무언가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아 철온은 간당간당 그 뜻이 전해오는 듯하다가 멀어지자 더욱 답답해졌다. 그것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의 하나 같았다. 예를 들자면 사나이의 의리라든지 어머니의 따스한 눈빛,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 같은 것들을 쑥스러워서 표현해 내지 못하는 그런 감성이었다.

묘진이 말을 이었다.

“자네도 이렇게 힘들게 돈 벌 것이 아니라 마음 편하게 나와 같이 거지 노릇을 하는 게 어때?”

철온의 눈이 부릅떠졌다.

“무슨 헛소린가?”

당장에라도 때려죽일 기세였다. 하지만 묘진은 남은 술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다시금 너스레를 떨었다.

“허허, 진짜야. 의외로 할 만하다구.”

“관두게.”

“진짜 화난 건 아니지? 하긴 안 해보면 모르는 법이지.”

묘진은 손으로 귀를 후벼 누런 덩어리와 부서진 가루를 확인하고 후∼ 하고 분 후에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자네 사업은 잘되나? 어째 아무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말야.”

사업 이야기에 대해 묻자 철온의 얼굴이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이 화사해졌다.

“벌써 넉 달째 아무도 떨어지는 놈이 없지만 말야, 대박은 어느 한순간에 찾아오는 것이라네.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이거든. 마치 지금 우리가 이렇게 절벽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 슈우욱 하고 떨어지는 것처럼 말이… 엇!”

철온의 눈이 놀람으로 가득 찼다. 그건 묘진도 다를 바가 없었다. 철온이 손가락으로 절벽을 가리키며 신나서 말을 하고 있는데 슈우욱이라고 말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실제로 사람이 추락하는 것이 눈에 잡혔기 때문이다. 말을 했던 것과 거의 시간 차가 없었던 터라 두 사람은 기가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멍청해져 버렸다.

하지만 언제까지 멍하니 보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철온이었다. 그는 껑충 뛰어오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대박이다! 대박이라구∼!”

철온이 벌떡 몸을 일으켜 신법을 전개해 안전망 쪽으로 향했고 그 뒤를 묘진이 조금은 느긋하게 뒤따랐다.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은 수차례 그물에 튕겨졌다 내려섰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내려선 상태였는데 안전망 주변에서 근무하고 있던 혼금부 요원 둘이 추락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대박은 한순간에 찾아오는 것이다! 으하하하!’

달려가는 철온의 마음은 가득 들뜬 채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대박을 예감했다. 그리고 이제껏 그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느낌이 좋아. 아무렴.’

안전망에 가까이 이른 철온은 절벽 바위를 두세 차례 발로 디디며 탄력적으로 안전망 위로 올라갔다.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신법이었다. 조금은 느긋하게 뒤따르던 묘진은 철온이 오르는 것을 보고 달려오는 걸음 그대로에서 오른발을 땅에 디딜 쯤에 살짝 힘을 주어 공중으로 솟구쳐 곧바로 안전망 위로 올라섰다. 고매하기 그지없는 신법이었다.

철온은 상태를 살피고 있는 수하들을 제치고 대박을 확인했다.

“허걱!”

철온이 그만 놀라 경악성을 터뜨렸다.

‘이런 제길! 이건 대박이 아니라 쪽박이잖아!’

안전망에 걸린 사내는 30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그는 입가에 선혈을 뿜고 있었으며 절벽에서 떨어질 때 불쑥 튀어나온 바위에 머리를 다쳤는지 뒷머리에서도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척 봐도 도저히 살아날 가망성은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뛰어내릴 때는 조금 더 멀리 도약해서 뛰었어야지, 바보 같은 녀석아! 이렇게 죽으면 어떡하냐구!”

철온은 기대감이 무너져 곧 울 것만 같았다.

“어, 조용히 해봐.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내가 한 말을 기억… 부, 부디 내 부탁을 잊지 마시오. 천… 선부주의 마지막 유물을 꼬… 옥…….”

“응? 천선부주? 마지막 유물?”

지금 죽어가며 천선부주의 유물에 대해 말하는 이는 맹공효였다. 그는 고문산에서 일장을 얻어맞고 떨어져 내리며 중도에 암벽에 부딪쳐 큰 상처를 입어 결국 숨을 거두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히 대망 인명 구조에 걸려 즉사를 면했고 천보갑에 대한 말을 한 후 숨을 거두게 된 것이었다.

철온과 묘진은 천선부주의 유물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철온은 묘진에게 등을 보이고 수하에게 전음을 날려 물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비밀은 있는 법이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느냐?”

요원 중 막포가 전음으로 답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천선부주가 보물을 천보갑에 넣었는데, 그것을 전하러 가는 중에 탈취당했다고 했습니다.”

“이건 누구에게도 비밀이다. 알겠느냐?”

“네.”

하지만 전직 흑월단의 단주인 묘진이 그리 어수룩한 인물이 결코 아니잖는가. 그는 이미 추락자가 천선부의 경천일필 맹공효라는 것도 간파한 상태였고 두 사람이 먼저 중요한 정보를 들었다는 것도 그의 마지막 말을 통해 알고 있었다.

출렁이는 그물 위에서 묘진이 조용히 뇌까렸다.

“철온, 내게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걸세.”

철온이 얼른 뒤돌아서며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내 무엇을 숨긴단 말인가?

그리곤 수하들을 재촉했다.

“자자, 너희는 아까 있었던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말해 보거라.”

하지만 묘진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난 진실을 원해.”

말을 맺은 그의 손에는 어느새 연검이 들려 있었다. 그가 평상시에 허리춤에 감고 다니는 그의 독문병기인 환연검이었다. 그가 살짝 힘을 주자 연검이 꿈틀 하며 춤을 추었다.

차차창.

그 움직임은 곧바로 살아 움직이며 달려들 것처럼 보였다. 철온은 묘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용을 쓴다 해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아이, 씨파. 알았어, 알았다구. 친구란 놈이 걸핏하면 죽이려고 칼을 뽑아 드니 술이 확 깨는구만. 말해 주면 되잖아, 자식아!”

투덜거리던 철온은 수하들에게 들었던 말을 고스란히 알려주었다.

“천보갑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나?”

“보물이라잖아. 다른 것이 있겠어? 금환신공 비급이겠지. 에라, 퉤∼!”

철온은 바닥에 침을 내뱉고 씩씩대고선 원통한지 말을 보탰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막지 마. 알겠어? 나는 금환신공 따윈 몰라. 돈만 벌면 되니까 말야.”

거기까지 묘진이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아무렇게나 떠벌리게 할 순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함세. 하지만 나중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니 어디에 정보를 제공했는지는 알려줘야 할 거야. 괴상한 곳에 정보를 흘리거나 할 경우엔 말야, 내가 찾아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방주님이 직접 오시게 되면 자넨 좀 괴로울 거니까 말일세. 그럼 시체는 잘 처리할 거라 믿고 난 이만 가네.”

묘진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극한의 신법을 펼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건 대단한 일이었다. 자칫 피바람을 부를 수도 있는 것이었고 천보갑에 대해 얼만큼 강호에 소문이 난 것인지 몰랐다.

‘일단은 방주님께 알려야 한다.’

이것이 묘진으로서는 최선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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