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0장 (181/199)

 # 180

180.

거의 누운 듯이 떨어지는 그 순간에 맹공효와 미랑의 눈이 허공 중에 얽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의 눈은 아주 끈끈하고 질긴 투명 줄로 묶어놓은 듯 잠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멈춰 섰다.

슬픔에 잠긴 맹공효의 눈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여자가 사실은 자신의 아내 진몽향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인피면구 따위를 쓰고 가짜가 나타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곳에 결박되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보갑을 쥐고 만족해하는 여인이 바로 사랑하는 아내였다.

맹공효는 눈으로 수만 마디 말들을 토해내고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제껏 질기게 연결되어진 듯이 보였던 투명 줄이 ‘툭’ 소리와 함께 끊어졌고 맹공효의 몸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미랑은 두 손으로 천보갑이 든 봇짐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잠시 맹공효가 사라져 간 곳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그가 마지막 남긴 눈빛은 너무도 강렬해 그녀의 안광을 뚫고 머리를 강타했으며 그것도 부족해 그녀의 온 신경을 낱낱이 자극해 버렸다.

한줄기 미풍이 불어와 그녀의 옷자락을 너풀거리게 했다. 그 바람에 미세한 먼지라도 들어 있음이던가. 깜박거리는 그녀의 눈에서 이슬이 맺히더니 볼을 타고 땅으로 떨어졌다. 이제껏 맹공효와 함께 지내며 흘렸던 눈물 중에서 가장 진실된 눈물이었지만 이 순간 맹공효는 그녀 가까이 없었다.

제5장 소중한 것은 잃은 후에 그 가치를 알게 된다

악어였어. 그래, 악어. 환상법사가 분명 악어라고 했었다.

그 녀석은 먹이를 잡아먹은 후 눈물을 흘린다고 했었지.

살점이 떨어지고 신경과 핏줄이 뜯기는 고통에 대한 연민?

그래, 법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내게 말했던 것이 생각나는구나.

“악어는 결코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단지 먹이를 더욱 잘 삼키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이 입 안으로 흐르게 되고 그것은 먹이를 삼키기에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연약한 바보들은 악어의 마지막 양심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악어의 또 다른 잔인함에 불과하다. 미랑, 기억해라. 너는 악어의 눈물을 흘릴지언정 악어의 눈물을 보며 죽어가는 존재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거지.

- 소혼미랑

***

산을 오를 땐 둘이었으나 산을 내려갈 땐 혼자였다. 아니, 미랑은 혼자라고 느끼진 않았다.

‘단지 동행이 바뀌었을 뿐이야.’

그렇다. 그녀는 동행이 맹공효에서 천보갑으로 바뀌었다고만 생각했다. 이번에 바뀐 동행은 참으로 진귀하고 값진 것이었다. 맹공효를 천 명 만 명 데리고 온다 해도 천보갑과 바꿀 순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경쾌하게 산을 내려왔지만 그 경쾌함에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기이하게 섞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애써’였다. 그녀는 경쾌하긴 하되 ‘애써’ 경쾌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맹공효 따윈 필요 없어.’

혹은,

‘나는 끝내 임무를 완수하고야 말았다.’

라는 속삭임으로 마음을 다잡아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그녀는 허전함을 느꼈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겨 산을 내려오는 길에 그녀의 발걸음은 끝내 경쾌함을 잃고 산 중턱쯤에 멈춰 섰다.

그녀의 수중엔 천하제일의 유품이랄 수 있는 천보갑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절대신공이랄 수 있는 금환신공이 있었다. 천선부에서 나오기 전부터 그렇게 가슴을 울렁이게 했던 천보갑이었지만 괴이하게도 희열이 차오르지 않았다.

혈곡의 비밀 연락처인 화원 석춘원에 들렀을 때만 해도 솔직히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던가. 혈곡의 비밀 요원으로서의 사명을 이제야 제대로 하는가라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녀였다. 물론 함께했던 맹공효는 그녀가 뒤척이는 것이 여행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이런 속뜻이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탁 트이는 듯한 전율이 일어야 정상이겠건만 오히려 마음은 무겁기만 하고 침잠되어만 갔다. 그녀는 수목들이 우거진 안쪽으로 들어가 나무 밑둥만 남은 곳을 의자 삼아 걸터앉았다.

어떤 경우의 인생은 자신은 원한 적이 없어도 어쩔 수 없이 괴이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한다. 혹은 아예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니, 출생에 대한 부분은 전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느 이름 모를 사막에 버려지듯 태어난 경우라면, 식인 습관이 있는 원주민의 자녀로 태어났다면…….

그와 같이 진몽향, 아니, 이제 더 이상 진몽향이 될 수 없는 미랑이 -그녀의 원래 이름은 백혜였으나 오래전부터 그녀는 백혜라는 이름을 잊을 것을 강요당했다- 혈곡의 비밀 요원이 된 것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열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던 날 붐비는 시장을 거닐게 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가던 중 예쁜 인형을 발견하고 구경하겠다 했던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예쁜 인형을 보고 있었던 것까진 확실한데 어느 순간엔가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그곳은 낯선 곳이었다. 처음엔 친척 집이나 알고 지내는 이웃집인가도 생각해 보았지만 오래지 않아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혈곡에서의 그녀의 삶은 시작되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마다 울음의 양만큼 돌아오는 것은 심한 매질과 배고픔이었다. 함께 잡혀온 또래의 아이들이 얼마는 적응하고 또 얼마는 사라졌다. 보이지 않게 된 아이들이 단순히 보이지 않았다, 또는 집으로 보내졌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선 환경에 적응해야만 한다는 것을 6개월이 지나면서 확실히 안 후 모든 것을 다 받아들였다. 정신 교육부터 갖가지 무공, 첩보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17살 때까지 그녀는 어떤 이름도 없이 단순히 49호로 불려졌다. 거의 대부분이 그처럼 이름 없이 번호로 불려졌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번호 대신 이름으로 불려지길 원하진 않았다. 새로운 이름이 붙는 것은 곧 첫 번째 살인을 행한 후에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녀가 49호라는 이름 대신 미랑이라는 이름을 달게 된 것은 하북성에서 혈곡의 자금줄이 되어주었던 60대 후반의 조황을 죽인 후였다.

조황은 말년에 혈곡에 대한 염증을 측근들에게 간간이 토로하였는데 그 말이 새어 나가 척살 대상에 오르게 되었던 터였다.

살인을 할 만한 요건과 환경은 충분히 갖춰졌다. 이미 죽인 후 어떤 식으로 그 죽음을 몰고 갈 것인지 수습책도 완벽했다. 그녀로서는 당일 적절히 인연을 맺어 조황에게 접근, 죽이는 일이 주어졌다.

첫 번째 살인!

조황이 찻잔을 입가에 대고 마시려 할 때 49호는 예리한 단도로 그의 심장을 찔렀다. 쑤욱∼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살을 비집고 들어가며 손에 묵직하게 저며드는 그 감촉과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 흐릿해져 가는 눈동자… 그녀로서는 훗날에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로서 그녀는 49호가 아닌 미랑으로 다시 태어났다.

첫 번째 살인 후 그녀는 삼 일간을 시름시름 앓아야만 했다. 엄청난 정신 소모가 되며 몸의 면역 기능이 떨어진 탓이었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힘든 법. 그녀는 그 후 살인에 익숙해졌고 첩보를 위한 변장, 역용, 음성 변조와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을 익혔다. 그리고 그녀는 천선부 내부로 침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새롭게 진몽향이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조작된 집안이 형성되었으며 적당한 상대가 물색되었다. 당시 그 대상이 바로 떠오르는 기대주 맹공효였다. 여러 차례의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녀는 맹공효와 혼인하게 되어 천선부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급기야 천보갑이라는 희대의 보물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해내고야 말았다.”

나무 밑동에 앉은 채 내뱉은 그녀의 음성은 그 단어에서 느껴져야 할 환희나 강한 성취감 따위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음성이 하나의 형상이라면 바람 구멍이 수없이 송송 뚫려 있고 그 사이로 비 오기 전 바람이 불어오는 것같이 허전하기만 했다.

짹짹거리는 새소리에 고개를 들어보았다. 기다란 나뭇잎들이 지붕처럼 둘러쳐졌고 그 사이사이로 햇살이 조각난 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살랑살랑 미풍이 불어오자 햇살은 보다 잘게 부서져 보석의 파편처럼 눈을 부시게 했다. 이 광경은 그녀에게 잊고 있었던 아주 먼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언제였더라… 그래, 맞아.’

어릴 적이었던 것 같았다. 정확히는 열 살 이전.

혈곡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행복했던 시간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집 뒤쪽에 자리한 작은 산에 올라 숲을 지나며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도 꼭 오늘과 같이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렸었다.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고 아버지의 품에 힘차게 안기던 모습도 떠올랐다.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기억을 떠올리는 그녀의 얼굴이 두려움인지 참혹스러움인지 일그러졌다.

얼굴이 없었다!

가슴과 목 언저리를 지나 살펴본 얼굴엔 당연히 있어야 할 입과 코와 눈이 없었다. 그저 밋밋하고 매끄럽게 하나의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놀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살색의 정밀한 보자기를 뒤집어씌워 놓은 듯 어떤 형상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부모님의 얼굴을 잊어버렸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나뭇가지나 혹은 손가락으로 얼굴을 그려가며 잊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느 한순간 날아가 버린 것이다.

눈물이 이렁거리다 방울로 떨어졌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어릴 적 백혜라는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아까 맹공효를 죽이려 하고 천보갑을 뺏으려 하던 그 잔혹스런 모습이나 교활한 미소 따윈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전히 다른 두 여인과도 같았다. 그녀의 마음은 네 가닥에서 다시 여덟 가닥으로 분해되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수없이 쪼개져 갔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난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일까?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한 거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며 지난 시간들이 무질서하게 불쑥불쑥 튀어나왔다가 급격히 사라지고 또 나타나곤 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마지막 눈빛에서 비롯되었다.

벼랑에서 떨어져 내리며 보내온 맹공효의 눈빛.

그 눈빛은 살기와 분노가 들어 있어야 마땅했지만 그 순간에도 아쉬움과 연민, 그리고 사랑이 담겨 있었다. 왜 그래야만 했느냐는 연민과 그래도 아직 당신을 사랑한다는 외침이 들어 있었다. 깨달음이란 어느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다가온다. 그 흐릿해져 가던 눈빛은 미랑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잊어버렸기에 다시는 떠올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부모님의 얼굴도 다시 찾으려 기억 속을 헤맸던 것이다.

지난 시간 남편과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맹공효를 진정 남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지낸 순간이 꿈결같이 아름답게 여겨졌고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혈곡은 토할 것 같은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햇살의 강렬함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이 꼭 붙들고 있는 천보갑을 들어 보이고 새로운 다짐을 했다.

‘그래, 내게 천보갑이 있지 않은가. 바로 금환신공이 들어 있는 천보갑이 내게 있는 것이다. 혈곡으로 돌아가지 않겠어. 내 지난날을 송두리째 앗아간, 내 기억마저 지워 버린 너희에게 금환신공을 줄 순 없단 말이다! 그리고…….’

그리고 사랑했던, 아니, 이제 비로소 온전히 사랑하게 된 남편을 죽이고 얻은 이 천보갑을 온전히 마음에 담고 싶었다.

또한 혈곡에 돌아가 영혼을 유린당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 금환신공에 도전해 보겠다. 천하제일에 도전해 보겠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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