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79장 (180/199)

 # 179

179.

맹공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이해가 가질 않아. 사부와 제자 간은 부모와 자식과 같을진대 말야.”

공효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고 말을 이었다.

“광포존자의 비애는 어느 정도였을까? 아마 사랑하는 당신이 날 해하려 하는 것처럼 슬픈 것이었겠지?”

그 말에 진몽향이 짐짓 서운하여 삐친 듯 눈을 흘겼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곧 울기라도 할 듯 움찔거렸다. 맹공효는 양팔을 위로 올리고서 바로 항복했다.

“하하, 농담이오, 농담. 당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내가 아니겠소이까.”

“그래도 그런 농담은 앞으로 하지 마세요.”

끝내 또르르 소리라도 들릴 듯한 눈물방울이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하하하, 바보같이 울긴…….”

눈물에 젖은 그녀의 얼굴은 더욱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제4장 미랑이라는 이름의 여인

그녀를 사랑한다.

마지막 기억을 지워주오.

그리고 아름다운 추억만이

내게 영원히 기억되도록

그렇게만 남아 있도록 해주오.

- 맹공효

***

고문산에는 총 12개의 산봉우리가 있었는데 그중 약암봉은 약숫물이 좋기로 이름 높았다. 대개 약수터는 산 중턱이나 그보다 밑에 자리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곳 약암봉은 특이하게도 봉우리 정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약암정이라는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약수란 원래 비가 오고 난 후 땅속으로 스민 물들이 지하 수맥을 타고 맑게 정제되어 흐르는 것인지라 산 정상 부근에 있다는 것 자체가 괴이한 경우라 할 만했다.

그런 까닭으로 약암정의 약수는 콸콸거리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암벽을 타고 아주 조금씩 흘러나왔다. 어지간히 성미 급한 사람은 물병에 하나 가득 담으려다가는 울화통이 터지기 딱 좋은 양으로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맹공효와 진몽향 두 사람이 약암정 근처를 지나게 되었을 때 진몽향이 물 호리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제가 약숫물을 담아가지고 올 테니 저기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세요.”

“그럴까?”

사실 맹공효는 함께 가고 싶었지만 그냥 그녀가 혼자 가도록 했다. 그녀로서도 무언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또 해주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맹공효는 약암봉 정상에 놓인 커다란 나무 아래 몸을 기대고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사로잡혔다.

멀리 양 떼가 줄을 이어 걷고 있는 듯 펼쳐진 구름이 파란 하늘을 수놓았고 그 아래로는 푸른 산이 멀고 가까움에 따라 제각기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또한 멀리 시야가 닿는 곳에는 호수가 조그맣게 보였는데 그는 그 호수 이름이 천정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매우 크게 자리하고 있음도 잘 알고 있었다.

“멋지구나, 대자연이여…….”

저절로 호연지기가 일어나는 듯했다. 하늘 위에 두둥실 떠 있어 그 위에서 판관필을 흔들며 무공을 펼치는 모습도 상상되었다.

그의 기상은 하늘가에 닿고 의기는 구름과 어울렸다. 세상천지를 다 얻은 듯한 통쾌함과 후련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언뜻 이러다가 느닷없이 승천이라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만의 기분 좋은 환상은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에 깨어졌다. 발자국의 주인은 당연 진몽향이었다.

“무얼 그리 골똘히 보셨나요? 자, 여기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세요.”

“하하, 당신 먼저 마시지 않구?”

“전 아까 물을 받으면서 마셨는걸요. 호호호.”

“하하, 그런 것이었나?”

맹공효는 쾌활하게 웃으면서 물 호리병을 들고 쭈욱 들이켰다. 시원스런 감촉이 목을 타고 식도로 내려가 가슴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다.

“카아∼ 시원하군.”

그 순간 진몽향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맹공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옆에서 누가 지켜봤다면 아마도 물 마시는 사람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인 줄 알았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맹공효는 입가에 묻은 물을 소매로 훔쳐 내고서 껄껄거렸다.

“이제 보니 전혀 물을 마시지 않았나 보군. 자, 이제 마셔보…….”

하지만 맹공효는 자신의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눈은 너무도 놀라 부릅떠진 채 경악에 물들었다.

“어, 어떻게…….”

그건 신법이라고는 전혀 펼칠 줄 모르는 진몽향이 믿어지지 않는 동작으로 그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맹공효는 간신히 눈을 풀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약간의 여유를 찾은 듯 그의 얼굴엔 작게나마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진몽향은 달랐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까지 보여왔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점점 변해갔다. 정겨운 미소 대신 비웃음이 입가에 머물렀고 따스한 눈길은 독한 뱀의 눈처럼 표독스러워졌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그녀의 몸에서도 사악하고 요사스런 기운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서서히 진몽향의 얼굴이 변해가면서 반대로 맹공효의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져 가고 얼음처럼 굳어갔다. 그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건 아니야… 오호, 이런. 꿈인가? 그래, 난 그녀가 물을 받으러 간 사이 꿈을 꾼 거야. 양떼구름이 지나는 걸 보면서 너무 포근하게 느낀 거겠지.’

하지만 그렇게 속으로 외칠수록 그는 꿈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깨달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가 아니야! 저 사람은 내 아내가 아니란 말이다!’

맹공효는 속으로 절규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그쳐 물을 심산이었다. 그가 막 입을 열려 할 때 위가 뒤틀리는 고통과 함께 뜨거운 것이 위로 차고 올라왔다.

“우엑∼ 푸우∼!”

검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더불어 온몸이 옥죄는 기분이 들며 내공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맹공효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몽향을 바라보았다.

“호호호, 미련한 놈 같으니. 네놈이 마신 물속에는 소혼독이 들어 있다. 내공이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기를 운용하면 주화입마에 빠지게 되지.”

맹공효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나, 나의 아내는 어… 어떻게 한 것이냐?”

그는 지금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오직 그의 관심사는 아내뿐이었다. 필시 눈앞에 있는 요녀는 정교한 인피면구를 쓰고 있는 상태이며 정작 진몽향은 어디엔가 결박 지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눈앞의 요녀는 말 그대로 요녀일 뿐이었다.

“내 아내를 어떻게 했냔 말이다!”

강경하고도 위협적인 말투였다. 이 말을 할 때의 기세는 비록 소혼독에 당했다 할지라도 너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같았다.

“호호호, 아직까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것 같군. 하긴 그만큼 나의 연기력이 뛰어나다는 것이겠지.”

“……!”

맹공효는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만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해도 무조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엔 닮은 사람도 많고 역용술에 능한 사람도 많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습관까지 똑같이 따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을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내력이 산산조각나는 충격보다 더 큰 심적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부들거릴 필요 없어.”

진몽향, 아니, 지금 누군지도 모를 여자가 돼버린 그녀는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 진짜 이름을 알려줄까? 내 이름은 미랑이다. 혈곡에 있을 때는 소혼독을 잘 쓴다 하여 소혼미랑(消魂媚娘)이라 불려졌지. 순진한 녀석, 오늘 같은 날이 있을까 싶어 네놈과 이제껏 함께했을 뿐이란 걸 모르는 거냐? 호호호, 이제 오비원이 남긴 보물 천보갑은 나 미랑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는구나. 후후. 그래. 10년의 시간 동안 네놈에게 봉사한 것으로 금환신공을 얻는다면 그다지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

맹공효는 이 현실을 벗어나 보려는 것인지 아니면 내공이 파편처럼 튕겨 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인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천보갑을 지키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소혼독의 영향 탓으로 목부터 발가락 하나까지 가느다란 줄로 수겹씩 묶여진 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안 돼, 이대로 멈출 순 없어! 벗어나야만 해!’

일단 벗어나야만 천보갑도 지키고 어딘가에 숨겨진 아내도-그는 아직까지 이렇게 생각했다-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여지지 않고 설상가상 미랑은 잔악한 미소와 함께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곳은 약암봉 정상이다. 그건 그가 특별히 물러설 곳이 없음을 뜻하기도 했다.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리고 고통스러워하던 맹공효의 눈에 절벽이 보였다. 평소엔 절대 가서는 안 되는 죽음의 길이지만 지금은 그곳밖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아랫입술이 너덜거릴 정도로 깨문 후 그 고통의 힘을 이용해 절벽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에게 잡히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요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나뭇가지에라도 걸리길 희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추악한 혈곡의 무리에게 결코 천보갑을 넘길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우주를 휘젓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생각만큼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훗, 어딜!”

어느새 낌새를 눈치 챈 미랑이 신법을 전개해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천선부에 있는 동안, 그리고 천선부를 나와 20여 일이 지난 지금까지 길을 걸을 때면 구슬땀을 흘렸던 그녀였다. 간혹 돌부리나 나무뿌리가 옆으로 늘어선 곳에 걸려 위태롭게 넘어진 적도 있던 바로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모습에선 과거의 모습은 어느 하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경신술을 배우라고 채근하던 맹공효의 지난날의 말들이 무색하리만치 그녀의 신법은 신속하기만 했다.

막 맹공효 몸의 절반이 허공에 놓여지고 무게 중심이 절벽 아래로 이동할 즈음 그녀는 급격히 달려듦과 동시에 손바닥으로 기를 운용해 ‘섭(攝)’ 자 결로 맹공효의 몸을 끌어당겼다. 평상시 정상적인 입장에서 맹공효와 그녀가 겨룬다면 비교하기 힘들겠지만 소혼독에 중독된 맹공효는 사실 보통 사람보다 연약하다 할 수 있었다.

“헉……!”

맹공효는 자신의 몸이 다시 당겨지는 것을 느끼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대로 잡히면 끝장이다. 그는 아직 땅에 닿아 있던 발을 거세게 밀어 그 힘에 대항하며 절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고수에게는 잠시의 순간이라도 그건 매우 귀중하게 사용되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미랑도 잠시 멈칫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어딜!”

그녀는 어느새 손을 쭉 뻗어 맹공효의 등짝을 할퀴듯이 그어갔다. 멀리서 누군가가 이 광경을 바라본다면 어떠할까.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절벽에서 떨어지려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고 뛰어들다니… 아, 세상은 아직까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구나.

어쩌면 그 말과 함께 고개까지 끄덕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문을 모르고 멀리서 봤을 때의 상황이다. 현실은 그보다 수천 배 잔악하고 수만 배 비정했다.

스슥.

스치듯이 맹공효의 머리가 간신히 그녀의 손을 비껴 나갔다. 하지만 그가 손길을 다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머리를 지난 손은 어깻죽지를 잡았고 거기서부터 훑듯이 잡아끈 것이다.

“으아악∼!”

맹공효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어찌나 강력히 붙들고 훑어 나갔는지 어깨가 탈골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더욱 괴로운 것은 등에 멘 봇짐, 그러니까 천보갑이 담겨 있는 그 봇짐이 그녀의 손에 쥐어뜯겨 나간 것이었다. 절벽으로 몸을 날린 것은 어떻게든 천보갑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몸은 절벽 아래로 기울어져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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