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78장 (17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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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제3장 광포존자와 신진자

사부, 난 당신을 넘어가야만 하오.

그대를 미워함이 아니라 단지 내가 가는 그 길에

당신이 있기에 난 넘어가야만 하는 것이오.

당신이 내게 베푼 정과 의는 잊지 않겠소.

하지만 당신은 쓰러져 주어야겠소.

- 신진자

***

맹공효는 아내의 손을 꼭 쥐고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좋은 걸 왜 그리 시간을 내지 못했는지 스스로가 한심하고 바보스럽기까지 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지금이라도 사랑하는 아내와 손을 맞잡고 산천을 노님이 그저 감사하고 기쁠 따름이었다.

그는 쉽게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철저히 감정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산과 들, 그리고 보잘것없는 풀조차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였다.

맑은 날은 물론이거니와 꾸물거리는 날씨 속에서도 그건 오히려 운치를 더해주는 풍경의 하나로 여겨졌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랐다. 간혹 등에 멘 봇짐 속에 담긴 천보갑에 생각이 미칠 때면 표정이 조금 굳어지며 신중해지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지금의 설레임을 억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자연이 만들어낸 장엄함과 신비로움, 그리고 눈을 정결케 하는 듯한 산천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멀고 먼 곤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흔히 곤륜산은 하늘에 닿을 만큼 높고 보옥(寶玉)이 나는 명산이라 불렸다. 전국시대 이후로는 그 절경들로 인해 신선들의 거처로 설명되어지기까지 한 그곳이 바로 천보갑이 가야 할 최종 목적지였다.

비록 진몽향의 미숙한 -미숙하다고 말하기에도 좀 과장된 기분이 들 정도로 미숙한- 무공 실력이 빠른 행보를 방해하긴 했지만 맹공효로서는 그것을 오히려 호재(好材)로 생각했다.

그녀와 좀 더 느긋하게 여러 곳을 살필 수 있음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천보갑을 전함에 있어서 빠른 시일에 전하는 것보다는 좀 더 안전하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한 터라 그다지 문제될 점은 없었다.

물론 천보갑을 전한 후에 다시 천선부로 돌아오는 길은 시간과 사명에 구애받지 않고 편히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지만, 맹공효나 진몽향으로서는 그때까지 기다리며 진지하게 지금을 보낼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함께 길을 떠나온 지 약 한 달이 지났다. 그 한 달여는 마치 하루나 이틀과 같이 여겨져 문득 날짜를 계산해 보았을 때 깜짝 놀라며 ‘어라, 벌써 한 달이 지난 건가?’라고 놀랄 만한 그런 시간들이었다.

시간은 마법과 같아서 어떨 땐 일각이 수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수년조차도 단 며칠이 지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이 그만큼 감정적이라는 뜻이리라.

지난밤을 마을 객점에서 보내고 두 사람은 대나무 숲으로 유명한 고문산(高問山)을 지나게 되었다. 고문산은 ‘높음을 묻는 산’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지난 과거의 전설이 담겨 있었다.

맹공효는 4년 전 독고세가의 일로 이곳에서 구룡회 잔당들과 일전을 벌인 적이 있었던 까닭에 이곳의 지형과 고문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고문산을 지나치려 함에는 지름길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또 하나는 아내에게 고문산의 유명한 유적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좀 쉬었다 갈까?”

맹공효가 중턱을 넘어서는 중에 두세 사람이 앉기에 적당한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야 쉬어 가면 좋지만 저 때문에 너무 늦는 것 같아 죄송스러운걸요.”

진몽향은 죄송스럽다는 말과는 달리 어느새 몸은 바위 위에 걸터앉고 있었다.

어느덧 그녀의 이마엔 구슬땀이 가득 맺혀 있어 바위에 앉게 되자 구슬땀 서너 개가 미간과 콧잔등을 타고 주르르 미끄러지며 턱에 고이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하하, 아직도 고집을 부릴 셈인가? 조금만 경신법을 배워도 좀 더 수월하게 길을 가게 될 텐데 말야.”

맹공효는 오는 동안 그녀에게 내공을 운용하여 신법을 펼치는 효율적인 방법들에 대해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부끄럽다고 말하며 그냥 이대로가 좋다고 할 뿐이었다.

빨리 달리는 모습이 그리 곱게 보이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은근히 보호받는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것인지 공효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전 그냥 이렇게 한번씩 쉬면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것이 더 좋은걸요.”

“하하, 거참.”

한줄기 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뒤쪽에 병풍처럼 서 있는 대나무 숲을 지났다.

쏴아아-

가만히 눈을 감고 뒤쪽에 대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언뜻 작은 폭포가 내리치는 소리로 들릴 만큼 시원한 음향이 났다.

약차 한 잔 마실 동안 바람결에 땀을 식힌 후 두 사람은 다시 발을 뗐다. 한참을 가자 고문산의 유적에 대한 팻말이 보였다. 그 팻말은 커다란 소나무 아래 단단히 박혀 있었는데 오른쪽 방향으로 화살촉처럼 깎아놓아 갈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문벽화(高問壁畵).

이곳은 강호인들에게 있어서는 꽤나 이름이 알려진 터라 벽화가 있는 쪽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따로, 혹은 무리를 지어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조금만 가면 벽화가 나올 거야. 아마 당신은 보게 되면 입을 쩍 벌리고 말걸.”

“그 정도예요?”

“아무렴.”

공효가 고문산에 오르기도 전에 수차례 벽화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았던지라 그녀의 ‘기대되는걸요’ 혹은 ‘정말요?’라는 답변도 수차례 이루어졌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정말 기대되는 것처럼 진지하고 생동감 있게 말했다.

아마 그런 이유 탓인지 맹공효는 자꾸만 같은 말을 하면서 빨리 보여주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말이 누군가에게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호응을 받는다는 것을 -매우 작아 보여도- 실은 중요하고도 기쁘게 느끼니 말이다.

중간 중간 팻말이 그 방향을 지시하며 거리가 얼만큼 남았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앞쪽으로 대략 2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시선을 멀리 두고 살피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이곳이 최종 목적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진몽향으로서는 벽화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다.

“설마 이곳은 아니겠죠?”

그녀가 약간 의아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물었다.

“아니긴, 바로 이곳이야.”

“음? 이곳은 기암절벽만이 늘어서 있을 뿐이어서 어디에도 벽화라곤 보이지 않는걸요?”

실제로 팻말은 이곳이 종점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팻말이 아니라 벽화가 아니던가 말이다. 팻말이야 실수로 잘못 옮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벼랑 끝자락에 난간을 설치해 놓았고 그 밑은 보나마나 끝을 알 수 없는 절벽일 것임이 확실했다.

땅이나 혹은 하늘에도 벽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던 길 어느 곳에도 벽화 따윈 없었다. 게다가 지금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은 다른 봉우리의 절벽일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고 입술을 실룩거리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맹공효를 바라보았다. 그건 맹공효가 제일 재밌어하는 표정이었다.

“하하하… 자, 이쪽으로 올라가서 살펴보도록 할까. 사람들 뒤쪽에선 벽화를 감상하기에 적합하지 않거든.”

그는 진몽향을 붙들고 관망하기 좋은 곳으로 암벽을 타고 살짝 올라갔다. 발을 디딜 만한 공간이 충분한 지점에 이르렀고 그곳은 눈앞이 탁 트여 있어 여러 봉우리들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맹공효가 손으로 절벽 너머를 가리켰다.

“저곳을 봐!”

진몽향이 주의 깊게 보기 위해 두 눈에 힘을 주고 손가락을 따라 살폈다.

하지만 허사였다.

그녀의 눈에는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에이, 이곳은 벽화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유명한 거 아니에요?”

그럴 만도 한 것이 진실로 그녀의 눈에는 그저 산 위에서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절벽의 절경만이 보일 뿐이었던 것이다.

“하하, 모두들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지.”

맹공효는 유쾌한 듯 웃어 젖힌 후 그때부터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내 손끝을 따라 저기 위쪽을 봐. 저기 둥그스레 파인 곳이 머리야. 그리고 그 부분부터 쭉 따라 내려오면 사람의 몸통이 보일 거야.”

거기까지 들은 후 진몽향의 눈은 점점 커지더니 끝내는 등잔만큼이나 커져 버렸다.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여겼던 거대한 절벽은 그 자체가 통째로 위로부터 아래까지 한 폭의 그림으로 나타났다. 그건 마치 먹구름에 가려 있던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서 찬란한 햇살이 드문드문 새어 나오다가 끝내는 온 하늘이 햇살로 가득 차고 푸르름을 나타낸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절벽은 한 폭의 그림으로 변했다.

“오오……!”

그녀는 스스로 감탄사를 발하고 있는 줄도 인식하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맹공효는 옆에서 그 모습을 기쁜 듯 바라보았다. 이제껏 그토록 기대하라고 했던 말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같이 보였다.

워낙 장대하였기에 보이지 않았던 대벽화는 이제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벽화의 그림은 두 사람을 보여주고 있었다. 왼쪽 편에 한 사람이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오른편에는 신선의 풍채가 느껴지는 노인이 선 채로 한쪽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위로 구름이 점점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장엄한 광경은 실로 마음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맹공효가 조용조용히 말을 꺼냈다. 감탄의 여흥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저 벽화는 광포존자와 그의 제자인 신진자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라오.”

진몽향은 이때 저 두 사람의 사연을 듣고 싶었던지라 공효를 바라보고 귀를 쫑긋 세웠다.

“……?”

맹공효가 입가에 미소를 짓고 말을 이었다.

“제자인 신진자가 이렇게 물었다오. 사부님, 진정한 강함은 무엇입니까?”

이 말을 시작으로 공효는 광포존자와 신진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1,500년 전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래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대충 누구라도 이 말을 할 때는 누구나 약 1,500여 년 전쯤이라고 설명했다. 바로 그 까마득한 과거에 무공의 높음이 가히 신선의 경지에 닿을 정도가 된 광포존자가 있었다.

그의 무공은 일거(一擧)에 산을 두 조각내고 일지(一指)에 바다를 가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에겐 유일한 후계자로 신진자라는 제자가 있었다.

호랑이가 강아지를 기르는 법이 없듯 신진자의 자질은 그의 사부 광포존자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신진자가 사부 광포존자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은 지 삼십 년이 되었을 때 신진자가 무릎을 꿇고 사부에게 물었다.

“사부님, 온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누구입니까?”

광포존자가 잔잔히 제자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이 사부다. 하지만 온 세상을 좌지우지한다 할지라도 결국 하늘 아래 놓여 있을 뿐이니 그게 대수로울 것이 있겠느냐?”

“하늘을 뛰어넘을 순 없습니까?”

“내가 아무리 높이 오른다 해도 언제나 저 하늘은 날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어찌 하늘과 비견할 수 있겠느냐? 너는 강한 자가 되려는 노력보다 하늘 아래 있음을 아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라. 강함은 거기에서부터 나올 것이다.”

광포존자는 제자의 질문이 강함에 대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미 이때 신진자의 마음은 사부를 넘어서려 했다. 최고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당연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사부는 하늘에 도전하기 위해 꼭 쓰러뜨려야 할 장애물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신진자는 사부인 광포존자에게 도전하게 되고 이틀 동안 이어진 대결 끝에 광포존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신진자도 무사하진 못했다. 그의 오른팔이 날아갔고 한쪽 눈은 실명하고 말았다. 또한 기운이 쇠해 그는 더 이상 최강의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그 뒤로 그의 행적은 묘연해졌는데, 언제부터인가 산 절벽가에 한 노인의 형상과 중년 사내의 모습이 새겨지게 되었다.

전해져 오길 이건 필시 하늘이 벼락과 번개로 광포존자와 신진자의 모습을 그려놓았다고 말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신진자가 그날을 회상하며 남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절벽에 남겨놓았다고 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이곳을 가리켜 고문산(高問山), 즉 높음을 물었던 산이라 칭하게 되었던 게지.”

이야기를 다 들은 진몽향의 얼굴엔 슬픔이 가득 묻어났다.

아까까지 그저 장엄한 광경으로 받아들여졌던 절벽 전체에 새겨진 벽화는 이제 위로부터 아래까지 애잔함이란 먹물로 잠겨져 보였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는 가만히 있어도 사부가 떠난 뒤엔 최고가 될 수 있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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