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172.
혈수는 영공수만 그리된 것은 아니었다. 천마산에서 나는 모든 물이란 물들은 모조리 핏물로 변한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유사 이래 기록에서조차 보지 못했던 마천의 천주 도의봉을 비롯한 지도자급 인사들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이건 필시 천하제패를 위한 하나의 포석일 겁니다. 천하를 마천이 피로 물들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으음, 하지만 천하가 피에 물들어야지, 왜 우리가 있는 곳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게요?”
“혹시라도 산 위에서 누군가가 죽어 그 핏물이 씻겨 내리는 것이 아닐까요?”
“으음, 혹시나 이것은 놀라운 공능이 있는 영수가 아닐런지요?”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도의봉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 꿈틀거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곳에 모인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수라천!”
“네, 천주님.”
“공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네가 마셔봐라.”
회의용으로 가져다 놓은 큰 동이에 들어 있는 혈수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수라천의 얼굴이 푸르르 떨렸다. 주위에 있는 이들조차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끔찍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라천은 떨리는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혈수를 펐다.
“내 말을 장난으로 들은 거냐?”
“네? 제가 어찌…….”
“공능을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양동이 전체를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네?… 네.”
수라천은 손으로 조금만 푼 물을 버리곤 머리를 바짝 대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냥 물을 마시라고 해도 그렇게 마시긴 힘들 것인데 걸쭉한 혈수를 마시니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도의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수라천이 한 번씩 호흡을 위해 고개를 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한 번에 들이켜야 영웅이랄 수 있지 않겠느냐, 내가 영웅이 되게 해주마.”
오른손을 쭉 뻗어 수라천의 목을 깊이 늘러 양동이에 처넣었다. 수라천은 감히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푸르르 소리를 내며 죽을 둥 살 둥 혈수를 마셔댔다. 아마 고수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미 익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나 빨리 마셨는지 혈수를 담은 양동이는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서야 도의봉은 손을 거두었고 수라천이 지친 기색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얼굴은 피에 절여진 탓에 얼핏 보면 얼굴 가죽이 한 꺼풀 벗겨진 것처럼 참혹해 보였다.
“흐흐, 맛이 의외로 좋습니다.”
수라천은 일어나 헛소리를 한번 하더니 그대로 뒤로 꽈당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와 함께 그의 몸에는 붉게 반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소름 끼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마천의 천주 도의봉은 그날 어두운 얼굴로 거처에 들었다. 하지만 혈수 사건으로 인해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로선 어떤 결론을 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수많은 갈등 중에 문득 잠이 든 그가 깨어난 것은 새벽녘이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광소를 터뜨렸다.
“그래, 하늘도 놀란 것이다. 우리의 계획에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란 것이야. 천하를 호령할 마천 앞에 모두가 놀란 것 이란 말이다. 크크크.”
그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아침이 되어 도의봉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이 아니라 단지 눈을 떴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난 새벽에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광소를 터뜨린 후 눈을 감고 있었어도 잠을 청하지 못했던 그였다.
아침에 계곡의 물들과 식수들이 모조리 혈수로 변했을 것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지그시 누르다가 몇 번 툭툭 치면서 스스로를 일깨웠다.
‘그래,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겠어. 이제껏 모든 일이 순조로웠음을 떠올리자. 이건 단지 수라혼마강시에 대한 세상의 두려움일 뿐이다.’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며 스스로에게 강제로 세뇌를 시켜서인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창밖으로는 천마산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려한 경관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확 트이게 했다.
‘이제 14일 남았다. 강호여, 기다려라.’
도의봉의 얼굴에 흉측한 미소가 떠올랐다. 차라리 혈수를 통해 고민하던 모습이 더 인간적으로 보일 그런 미소였다.
그가 앞으로 중원을 제패하고 천하제일로 우뚝 설 날을 상상하며 혐오스런 미소를 스스로도 모르게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천주님! 속하 뇌명입니다.”
도의봉은 의아하다는 듯 눈썹 중간 부분을 살짝 올렸다. 꽤 이른 아침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들어오라.”
안으로 들어선 뇌명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뻐하십시오 혈수가 거짓말같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의봉은 속으로 ‘휴∼ 다행이군’이라고 말했지만 겉으로는 천주의 신분으로 그렇게 나약한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무겁고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짐짓 화가 난 듯한 말투이기도 했다.
“그 일이 어찌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그리 좋아하느냐? 혈수의 조짐은 온 중원을 피로 물들일 우리의 미래를 보여준 것이니 멈추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잖느냐! 어서 냉큼 내 앞에서 사라져라!”
뇌명은 칭찬을 기대했다가 도리어 한바탕 질책을 듣자 송구스러운 모습으로 물러갔다. 뇌명이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엄숙하고도 분노한 얼굴을 하고 있던 도의봉은 문이 쿵 하고 닫히자마자 언제 분노했었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낄낄거렸다.
“후하하하, 혈수가 멈췄다 이거렷다. 좋아, 그래야지.”
아마 밖으로 나간 뇌명이 들었다면 기가 막혀 죽으려고 했을지도 모를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도의봉의 고충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다.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강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면모를 보여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의봉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마냥 좋아 죽겠다는 듯 낄낄댔는데 그때 다시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속하 우당, 급히 천주님께 전할 말씀이 있습니다.”
우당의 목소리는 다급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 들어오라.”
도의봉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슴을 활짝 펴고 매의 눈으로 현관 쪽을 노려보았다.
우당은 바로 무릎을 꿇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순간 도의봉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혹시… 방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우당은 아들인 도방의 호위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짐작이 가능했다. 특히 우당이 무릎 꿇은 것을 볼 때 혹시나 분노로 인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아래 행해진 행동일 것이라 짐작하니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용서하십시오. 소주의 몸에 온갖 종기가 일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인 상태입니다. 저희들도 무슨 까닭인지…….”
“뭐라고?!”
도의봉은 깜짝 놀라 앞에 있는 우당을 그대로 밟고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달음으로 도방의 처소에 이르러 문을 왈칵 열자 내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뭐, 뭐냐…….”
도의봉은 눈이 휘둥그레 변하고 당장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도방의 병세는 생각보다 더욱 엄중한 것이었다. 도방의 곁에 마의 독선이 손을 쓰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고 시중을 드는 시녀들과 수하들 심지어 부인 유서진도 아들의 모습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도방은 아래 속옷만 입은 채 양손에는 기와 조각을 쥐고서 온몸을 긁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고, 왜 이리 가려운 거야. 에구, 가려워.”
불쑥불쑥 튀어나온 종기들이 기와 조각으로 긁어대자 여기저기 터진 까닭에 도방의 몸은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방 군데 피가 튀고 흐르는 중에도 도방은 계속해서 기와 조각으로 긁기를 멈추지 않았다.
“흐흐. 아이고, 시원해. 아고, 역시 가려울 때는 기와 조각이 최고야. 아고, 가려워. 아버지 오셨어요? 왜 이렇게 가려운 거죠?”
도방의 손놀림은 특별한 규칙이 없었다. 어떨 땐 머리를 박박 긁다가 가슴으로 옮기는가 하면 손을 기묘하게 꺾어 등 뒤를 긁기도 했다. 이미 온몸에 고름과 핏물이 섞인 것들이 휘감았지만 도방은 그런 모습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러기엔 가려움증이 너무도 거센 탓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도의봉은 처음에 들어왔을 때 왜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는지 찰나적으로 의문을 가졌지만 이젠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굳은 채 동일시되어 갔다. 그건 누가 안으로 들어가서 보더라도 똑같은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어허허, 시원하다. 시원해. 기와 조각이 최고여.”
이렇듯 하루 동안 도방의 종기는 사그라질 줄 몰랐고 그에 따른 기와 조각도 멈추질 않았다. 이날 긁어 부스러진 기와 조각이 장장 150여 장이었으니 그 참혹한 광경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괴상한 일들은 하루가 끝나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하루의 시작을 알리듯 새로운 괴이함이 뒤를 이었다.
도방의 종기가 다음 날 아침이 되어 거짓말같이 사라졌을 때 마천인들은 기뻐할 겨를도 없이 주먹만 한 우박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겻을 보아야만 했다.
그런 우박은 그 어느 누구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고 그 가공할 파괴력은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로 인해 6개의 전각이 파괴되고 10여 개의 전각이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약 30여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매복 수비를 서던 중이라 피할 수 있는 여건에 있지 못해서였다.
우박이 그치자 마천인들은 서서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그 재앙이 자신에게 임하진 않을는지 각자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재앙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한 것으로 다가왔기에 더욱 그러했다.
담종은 지금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현실인 것은 부인할 수 없음인데 그래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왼쪽 어깨로부터 전해져 오는 고통은 자꾸만 커져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그 앞에는 시뻘건 혈안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팔 한쪽을 들고 있는 이 사람이 설비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담종이 마천에 들어온 지는 벌써 15년이다. 그의 나이 35세로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야말로 마천의 염원인 중원제패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수라혼마강시의 제조.
그렇기에 그가 제일 존경하는 이는 마천의 천주 도의봉이 아닌 혼마당의 당주 설비였다. 물론 마천 내에서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당연히 말로는 ‘천주님 외에 누가 존경받을 만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는 다시금 속으로는 ‘그래도 내가 존경하는 인물은 오로지 한 사람 불수귀요(不愁鬼妖) 설비님이시다’라고 중얼거릴 것이었다.
설비는 마천에서 의술이 가장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환술과 주술에 관련된 분야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지닌 터였다. 사실 수라강시의 제련에 대해 도의봉이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달려가게 된 것도 순전히 불수귀요 설비 때문이었다.
담종이 상관인 불수귀요 설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매우 단편적인 것들이었다. 단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설비의 마음속에 정파에 대한 도저히 표현하기 힘든 처절한 한이 맺혀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어떤 종류의 한인지는 모르지만 설비는 그 모든 한의 덩어리를 강시 제조에 몰두했다. 담종이 설비를 마음으로 따르게 된 것은 바로 그 한을 풀어내는 열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끔씩 밀실 속에서 강시를 바라보며 무시무시한 광소를 터뜨릴 때는 무섭기도 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
비록 무섭긴 해도 조금 후에는 그 모습조차도 신비한 매력을 지닌 듯 보이기까지 했다.
바로 그 설비. 가장 존경하는 설비가 지금 담종의 왼쪽 어깨를 통째로 뜯어내 버린 것이다. 담종은 자신의 한쪽 팔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으으윽, 내가 존경했던 사람이 정녕 이 사람이었단 말인가.’
설비는 광기 어린 미소와 함께 뽑아낸 팔을 부러뜨려 버렸다.
우지끈.
이미 뽑혀진 팔이었지만 그래도 다시 부러질 때 담종은 말로 못할 고통과 공포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