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171.
모두가 돌아간 후 정문으로 나온 오비원은 몇 마디 표영에게 정파연합대에 대한 당부를 했다. 그로선 혹시나 젊다는 이유로 나이 많은 장문인들이 험하게 나오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한 것이었다.
“자네는 앞으로 정파를 이끌어갈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 이번 일을 좋은 경험으로 삼게나.”
오비원은 표영과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하대를 했고 그것을 표영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러 말을 전한 후 오비원은 혁성에게 생각이 미쳐 얼른 물었다.
“표 방주, 혁아는 잘 지내고 있는가?”
혁성은 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던 할아버지가 주루에서 나오자 혼비백산하고 있었는데 돌아가지 않고 자신에 대해 묻자 부디 사부가 자신을 알리지 않았으면 하고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혁성은 절대 사부가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혁성의 짐작은 정확했다.
“하하하하, 그럼요. 저기 진백하고 다정하게 있잖습니까?”
오비원은 깜짝 놀라며 찾았다.
“으응?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일순간 오비원은 그저 옛날의 모습만을 생각한 까닭에 혁성을 못 알아보고 있었다.
“혁성아, 어서 나와서 할아버지께 인사 올려야지.”
다정한 어투의 사부의 목소리에 치를 떨면서 혁성은 꾸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잘 지내고 계셨죠, 할아버지.”
오비원은 뜨악한 표정으로 두 걸음 물러섰고 눈을 찡그리고 과연 손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했다. 때가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며 입가에 붙은 밥 티, 꼬질꼬질한 옷차림은 과거에 깔끔을 떨던 그 혁성인지 혼돈스럽게 만들었다.
‘네, 네가 진정 혁아더냐?”
‘네…….”
혁성의 목소리엔 자신이 없었다.
“아이구, 내 손자.”
오비원은 혁성을 꼭 끌어안고 등을 두들겨 주었다.
“고생이 많구나. 조금만 참으렴, 알겠지?”
혁성은 괜히 눈물이 나려 했다.
오비원이 돌아서며 표영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잘 부탁하네.”
“아하하, 그럼요. 매일매일 개밥을 먹는데 제가 얼마나 잘 챙겨주는데요, 하하하!”
뭐가 그리 좋은지 표영은 진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유쾌하게 웃어 젖혔고 오비원과 오혁성은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확신치는 않지만 그 시선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저렇게 좋을까, 거참.
제12장 천계의 분노
너희가 한계를 넘으면
나도 한계를 넘어주겠다.
- 분노한 대천신
***
우우웅-
삼라만상의 주관자인 천계의 대천신의 몸에선 거센 옥빛이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거대하고 또 둥그런 형상이었는데 빛나는 큰 옥빛 구슬같이 보였다. 빛 중앙에서는 여전히 우우웅 하는 낮고 진한 저음이 대전을 울렸고 붉은 빛살이 옥빛 사이를 꿰뚫고 한 번씩 치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아래 좌우로 기립해 있는 십이대신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함을 유지한 채 자리해 있었다.
“도저히 이대로 좌시할 수는 없다.”
대천신의 음성이 한마디씩 끊어져 전해질 때마다 붉은 화염이 솟구쳐 올랐고 말을 매듭 지을 때는 벼락이 꽂히듯 화염이 퍼졌다가 안개처럼 사그라졌다. 그것은 분노였다. 십이대신들은 그가 이런 분노를 터뜨릴 때는 섣불리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지상계의 시간으로) 450년 전 혈마가 재난을 준비하려 할 때 백운신이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가 냉벽하에서 시린 고통을 감내했어야 함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대천신이 분노하고 있음은 지상계 마천의 흉악무도함 때문이었다. 죽은 자의 육신을 취해 강시로 제련함도 모자라 산 생명을 취해 그 피를 뿌림은 이미 인간계의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게다가 수라강시로 인해 앞으로 죽어갈 생령들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날마다 지상계로부터 올라오는 그 애절한 음성과 육신을 훼손당한 혼들이 천계에서도 부르짖고 있었다.
“모든 세계에는 그 정한 도리와 한계가 있는 법이거늘 어찌하여 그 경계를 허무는 자들이 버젓이 횡행함을 지켜볼 수 있겠느냐.”
대천신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온 천계가 진동했다. 그건 천계만이 아니었다. 지상계의 사람들은 갑작스런 벼락과 폭우가 쏟아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박수무당이나 점술가들이나 점성술사들조차 짐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지상계에도 비가 내렸다.
“흑운신은 어디에 있느냐?”
포효하듯 외치는 음성에 왼쪽 중간 지점에 시립해 있던 흑운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신 흑운신, 대천신님의 분부를 기다리옵니다.”
흑운신의 빛은 분명 검은 기운을 나타내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투명하고 맑은 검음이었다. 워낙 검다 보니 도리어 맑은 기운과 밝게 느껴지는 그런 어둠이었다. 다른 십이신들은 대천신이 흑운신을 불렀을 때 이미 내려질 재앙에 대해 예측할 수 있었다. 흑운신은 그런 일에 자주 맡았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을 수행해 왔다.
옥색 빛깔이 거세게 치솟았다.
“가라, 그리고 징벌하라. 언제나처럼 오직 한 번의 기회를 주어 재앙을 면하게 할 뿐 그 뒤의 자비는 없음을 알라.”
“흑운신, 오직 대천신님의 뜻을 따를 따름이옵나이다.”
흑운신은 충성스럽게 답한 후 검은 기류를 흩날림과 동시에 대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천마산.
마천(魔天)이 근거를 두고 있는 곳이 바로 천마산(天魔山)이었다. 사실 지도상으로 볼 때 천마산이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이름은 과거 마천의 천주 도인황이 마천에 맞는 이름으로 개명한 이후 계속 그와 같이 불리게 되었다.
마천은 혈곡과 함께 사파의 거대한 양대산맥으로 불렸는데 실제 강호에서의 활동과 영향력을 볼 때 거의 60여 년간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활동했다고 봐야 옳았다.
사파인들은 그런 마천을 혈곡과 비교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정파가 그리 무섭더란 말이냐! 이제부터 마천은 마천(魔天)이 아니라 마천(痲喘)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마천(痲喘)이란 호흡이 마비되었다는 뜻으로 제 기능을 못하는 병신 같은 곳이라는 조롱이었다).
-천선부의 발을 핥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길 기다리니 마천은 개다.
-혈곡과 나란히 거론하는 자는 내가 용서치 않겠다.
이런 비난 속에서도 마천은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개구리가 더 멀리 뛰기 위해 뒷다리를 잔뜩 웅크린 것처럼 대반전을 노렸다. 그것은 바로 수라혼마강시의 제조였다.
강시만 완성된다면 중원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고 생각했다.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욕됨은 기꺼이 감수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어떤 비난이 쏟아져도 오히려 그것을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기회로 삼았다.
이제 보름이 남았을 뿐이다. 그날 세상은 깜짝 놀랄 것이라고 마천은 자부했다.
제13장 징조들
바람과 구름이 일어남을 보고
혹은 제비가 낮게 나는 것을 보고
또한 밤에 달무리가 지는 것을 보고
다음 날 비가 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징조다.
모든 것에는 그와 같은 징조가 있는 것이니
예비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다.
- 재앙의 시작에서 흑운신
***
천마산은 크게 천마봉과 비응봉, 그리고 귀부봉 세 곳에 세력을 갖추었는데 그중 천마봉이 중심에 있고 비응봉과 귀부봉이 왼쪽과 오른쪽에서 호응하는 산세를 가졌다.
중앙쪽에 위치한 천마봉에는 서쪽 절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약수터가 자리했다.
이곳의 물은 영공수(靈空水)라 불렸는데 그 맛과 성분이 매우 특별해 입맛을 돋우고 몸의 기능을 보호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또한 이 물로 세안을 하면 입자가 세밀한지 개운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기에 이 약수는 아무나 마실 수 없었고 오로지 마천의 천주인 도의봉만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영공수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포만당의 부당주로 있는 주창이었다.
포만당은 마천의 천주 도의봉의 식단을 책임지는 전담부로 그곳에서 주창이 맡은 일은 아침마다 정성스럽게 영공수를 받아오는 일이었다. 어차피 약수라는 것이 흘러나오는 것인지라 쏟아지는 것 중에 일부를 마신다고 해서 티가 나는 것은 결코 아니었기에 그로선 멋진 보직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정갈한 큰 물통 두 개를 짊어지고 험한 산길을 지나 약수터로 향했다. 해가 뜨기 전에 출발했는데 약수터에 거의 이르렀을 땐 어슴푸레한 햇살이 막 새벽을 깨우려 하고 있었다.
“오늘도 내가 받아온 이 영공수를 천주님께서 드시겠지.”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그는 아침 공기의 상쾌함을 크게 호흡하고 졸졸거리는 소리를 따라 자석처럼 가까이 다가갔다.
졸졸졸졸.
왠지 오늘따라 물소리가 시원스럽지 않고 탁한 듯싶었다.
“에이∼ 내가 영공수를 무시해서야 되나.”
주청은 자신의 마음이 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두 개의 물통에 차례로 가득 물을 받았다.
아직까지도 어둠은 걷히지 않아 사물을 분간하긴 힘들었지만 주청은 사실 눈을 감고도 이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숙달된지라 아무런 문제될 건 없었다.
그는 받아놓은 물통을 한쪽으로 젖혀두고 귀한 영공수를 양손에 받아 얼굴을 씻었다.
“아, 시원하다. 개운하군.”
그는 평상시처럼 세안을 하고 어깨를 활짝 편 후 물통을 들고 이동했다. 그의 피부가 유난히 뽀얀 것은 영공수 때문이었는데 그는 다른 이들에게 말할 때마다 ‘내 어찌 귀한 영공수를 손댈 수 있겠나. 내 목이 서너 개라면 모를까 그럴 일은 없네’라고 말했기 때문에 피부가 고와도 원래 태생이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들도 영공수 때문에 목숨을 버리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주청이 물통을 들고 중간 정도 지나게 되었을 때였다. 해가 어느새 힘차게 차고 올라와 대지를 비추게 되자 문득 물통을 내려다본 주청은 기겁을 하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그가 영공수라고 생각했던 것은 영공수가 아닌 진한 핏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양손이 피로 빨갛게 물든 것을 보았고 얼굴도 악귀처럼 피 칠이 되었음도 알았다.
주청은 물통의 핏물을 비우고 미친 듯이 약수터로 향했다.
‘그래, 분명 나는 물을 잘못 길어 온 것이다. 엉뚱한 곳에서 물을 길어 온 거라구.’
하지만 약수터에 이르렀을 때 주청은 맥없이 물통을 양손에서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렸고 모래성이 무너지듯 쓰러져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