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168.
“왜? 감싸주지 않아도 괜찮겠어? 아이구, 왜 그러냐?”
표영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람처럼 생소하게 질문을 던졌고 그것이 혁성에게는 더욱 큰 비수로 꽂혔다. 하지만 표영의 뒷말은 아예 창자를 갈라 버리는 말이 되었다.
“어허, 이런, 갈빗대가 나갔구나. 몸을 어떻게 굴리길래. 쯧쯧.”
표영은 타구봉으로 툭툭 쳐서 뼈를 맞춰주며 말했다.
“자, 어서 반구옥 안을 둘러보자꾸나.”
조금 쉬었다 보겠다는 혁성의 말을 표영은 못 들은 척하며 깡을 부렸다.
“자, 이 사부가 부축해 주겠다. 자자, 어서 일어나라.”
“부축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조금 쉬었다가 볼게요…….”
“자자, 어서 일어나래두.”
“조금 쉬었다가…….”
혁성은 말을 다 맺지 못하고 꾸역꾸역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표영이 입을 이기죽거리며 타구봉을 손에 탁탁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하하, 부축 좀 해주시겠어요?”
“하하, 그러마.”
참으로 화기애애한 사제지간이 아닐 수 없었다.
반구옥 안을 차례로 보여주며 표영은 과거의 일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지금의 개방이 있기까지 과거의 영웅들이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혁성은 사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특별할 것 없는 빈 감옥 안을 보면서 특별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뭐랄까, 추레한 겉모습 속에 감춰진 기묘한 매력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몸을 감싸는 듯했다.
천선부에 있을 때는 학과 같이 고고한 기상이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개방은 초탈함 속에 사나이의 멋이 느껴졌다. 혁성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멋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개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비밀스런 멋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구나.’
혁성은 점점 마음 깊이 개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지막 순례지는 진모산 백일봉이었다. 강호의 뭇 영웅들을 초대한 후 노위군과 표영이 일전을 벌인 바로 그곳이었다.
그 위에서 표영은 혁성에게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혁성도 그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곳에서 직접 사부로부터 들으니 더욱 실감났다.
“당시 노위군이 익힌 무공이 우사신공이란 것은 그 후에 알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우사신공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누를 수 있겠으나 그때 난 비천신공을 온전히 완성치 못한 상태였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코 내가 약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우사신공 앞에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사신공은 그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라 완성자체가 불가능한 무공이랄 수 있다. 어깨 인간이 한 마음만을 가질 수 있겠느냐? 오로지 선할 수도 없고 오로지 악할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이다. 단지 우리는 그 중심을 한쪽에 두고 노력하고 절제하는 것이다.”
표영은 시선을 돌려 과거 노위군이 스스로 자결하던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지만 그의 눈에 당시의 상황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는 욕심이 너무 지나쳤던 것이다. 무림인들이 바라는 것은 강함이지만 강함만을 바라보고 달려가서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만다. 강함을 이루는 요체가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 너는 개방무공의 요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갑작스런 질문에 혁성이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말했다.
“부족한 제자의 견해로는 밑바닥 인생의 질긴 생명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음… 좋은 말이로구나,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구나.”
휘이잉.
혁성은 칭찬인지 욕인지 분간이 안 되는 말에 스산한 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다. 표영은 혁성의 눈이 심상치 않음을 무시하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개방의 힘은 저곳에 있다.”
가리킨 곳에는 새 한 마리가 유유히 비행 중이었다.
“자유로움이다, 한없는 자유로움이지. 어느 것에도 구속됨이 없이 살아가는 온전한 자유다. 그것이 바로 개방의 힘이다.”
혁성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을 말하려 함인지 대충 마음에 다가온 것이었다.
“걸인 생활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자유롭게 해 결과적으로 거대한 무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기반이 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내 너를 위해 특별히 한 과정을 준비했다.”
혁성은 이제껏 두들겨 맞고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무공을 전수받는다 생각하자 가슴이 뛰었다.
이제껏 한 번씩 보아온 사부의 무공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가슴에 뜨거운 것이 일며 최선을 다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저를 위해 특별한 과정을 두시다니요.”
“그래, 알면 됐다. 이제 네가 걸어야 할 길은 견왕지로다. 그것이 바로 너를 위대한 무인으로 위대한 개방인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네? 견왕지로라뇨?”
오혁성은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개왕의 길이라니.
“하하, 녀석 기대가 많이 되나 보구나. 나도 그때 꽤나 재밌었지.”
표영은 혁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혁성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말이다. 네가 좋아하는 개 국물을 한없이 먹을 수 있는 과정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는지 모르겠구나, 하하하.”
혁성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9#?!&@#?!&…….”
제10장 견왕지로
진정한 개방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너는 견왕이 되어야 한다.
이름하여 견왕지로.
어떠냐, 멋지지 않느냐.
라고 사부가 말했다.
아무리 내가 거지가 좋다고 말했기로서니
이건 너무하잖아.
- 황당함에 젖은 혁성
***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중원 최강의 개 비법 견왕지로의 전수자인 백통으로서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일에 대해서 도무지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고 머리를 아무리 굴려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부 원구협 밑에서 5년여 동안 피땀 흘리며 익혀온 개 비법이었다. 그리고 19세가 된 지금에 이르러선 사부를 제외하고 아무도 개를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 자신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자부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믿기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저, 저 개새끼들이 미치기라고 한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사부를 대적할 만한 막강한 상대가 나타난 것인가. 심상치가 않아. 심상치가 않단 말이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살기등등한 기세로 노려봐도 시원찮을 용맹무쌍한 개들이 두 명의 거지, 아니, 좀 더 정확히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거지 앞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뿐인가, 혀는 빠르게 입 안과 밖을 왕래하며 헥헥 소리까지 동반한 상태였고 가끔씩 낑낑대며 머리를 조아리고 아양을 떠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건 개 전문가가 아닌 일반 사람이 보더라도 절대 복종에 해당하는 모습이었다. 백통은 이제껏 개들이 저렇게 황당한 몰골을 보였던 것을 사부님 면전에서를 제외하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견왕지로의 7단계 중 4단계를 넘어선 자신 앞에서도 저 정도까지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개들이었다. 긴장감 때문인지 가만히 이마로 땀이 흘러내렸다.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에 개들에게 무슨 약이라도 탄 것은 아닐까?’
뭐 택도 없는 소리겠으나 백통으로서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까 개들을 호위로 세워놓고 기분 좋게 잠을 청했던 것은 다시 기분 좋게(?) 날아간 상태였다.
그렇게 개들을 중심으로 둔 채 백통은 개들의 엉덩짝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개들의 그 비굴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바라보며 거지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두 거지를 자세히 들여다볼 때 한 거지의 낯빛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 까닭은 어린 거지가 바로 오혁성이기 때문이었다.
오혁성은 솔직히 사부가 개 비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과 과거에 그러한 수련을 했다는 말을 그저 해보는 소리려니 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 광경은 장난이 아니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볼 때 덩치가 호랑이만 한 개들이 사부 앞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그 모습은 진짜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호랑이나 표범 등이 혀를 내밀고 엉덩이를 흔들며 꼬리를 살랑거리는 모습을 말이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그렇게 개들은 끊임없이 온몸으로 아양을 떨어댔다.
‘아, 이거 진짠가 보네. 환장하겠네, 으이그.’
그동안 오면서 들려주었던 지난날개 수련 과정은 그렇다면 모두 사실인 것이다. 그 나날들을 보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혁성은 비로소 정신이 돌아버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이렇게 해서 미치는구나. 그래, 역시 미칠 만하니까 미치는 거겠지.’
그때 표영이 껄껄거리며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백통을 향해 말했다.
“너는 견왕지로를 어디까지 연마한 것이냐?”
백통은 땀을 삐질 거리다가 느닷없이 상대로부터 견왕지로에 대한 말을 듣게 되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과거 사부 원구협이 들려주었던 말을 떠올리는 것을 잊어버렸다.
바로 그것은 사형에 대한 것이었다.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나 단 2년 만에 견왕지로를 완성했다는 바로 그 사형, 언제나 견왕지로를 연마할 때면 사형을 예로 들며 성취가 늦다고 야단을 맞아야만 했었다.
하지만 설마 하니 지금 눈앞의 거지가 사형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질 못하고 있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닥친 상황인 데다가 괜한 적개심으로 적이라고 스스로 판단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닥쳐라. 이 녀석들아, 어서 공격해라, 공격해.”
손에 쥔 막대기를 공중으로 돌리며 공격을 명령했지만 개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일부는 뒤돌아보며 무슨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고 있느냐는 듯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직 견왕지로의 4단계도 고작 통과한 사람과 견왕지로를 온전히 깨우친 견왕과 견줄 순 없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해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배신자들… 내 너희들을 반드시 후회하도록 만들어주마.”
백통은 훗날을 기약하며 사부님께서 반드시 복수해 주시리라 믿고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달아났다. 표영은 우습기도 하고 옛날 생각도 나서 덩치 큰 두 놈을 불러다 하나씩 올라탔다.
“자, 가자∼.”
백통은 부지런하게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게 되었고 뒤돌아보고 나선 더욱 놀랐다. 개를 타고 그 주위로는 개들의 호위까지 받으며 여유롭게 쫓아오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당황스러웠지만 오직 타개책은 지금으로선 사부님밖에 없는지라 달리고 또 달릴 뿐이었다.
“어이, 이봐. 같이 가자고∼.”
표영이 다정하게 불렀지만 백통은 달리다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 또 뛰었고 그저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달릴 뿐이었다.
“야, 같이 가자고 해도 그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