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67장 (168/199)

 # 167

167.

제9장 과거로의 순례

울지 말거라.

너의 모습이 자랑스럽구나.

이곳에서 늘 지켜보고 있단다.

- 하늘에서 엽지혼

***

과거 표영이 무작정 오르던 때는 이 산의 이름이 취운산인 줄도 알지 못했었다. 사실 취운산은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산이 아니었고 기억될 만한 특색을 갖춘 산도 아니었다.

하지만 보잘 것 없는 그저 그런 이 취운산은 지금 표영에게 있어서만큼은 중원의 어떤 명산보다도 가치있는 산이요, 소중한 산이었다. 이곳은 그리운 사부의 체취를 맡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작은 언덕을 몇 개 넘고 비탈을 지나게 되자 시원스런 대나무 숲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쏴아아.

바람에 대나무들이 흔들리며 보는 것만큼이나 시원한 소리를 쏟아냈다. 표영은 어느덧 그 소리를 들으며 먼 과거를 떠올렸다.

‘이곳이었지…….’

옆에 있던 혁성은 대나무 숲을 바라보는 사부 표영의 모습에 감히 말을 걸어볼 엄두도 못 내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입을 열기엔 표영의 몸에서 일어나는, 공기마저 정지시킬 것 같은 기운이 너무도 생소하고 강력했던 것이다.

천선부에서 나오면서 달려왔던 목적지가 이곳이라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게 된 혁성이었다.

대나무 숲은 표영이 처음으로 천상신개 엽지혼을 만났던 곳이었다. 당시 표영은 개를 잘 다루어야만 개방에 들어올 수 있다고 둘러댄 주동을 혼내주려고 가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들려온 비명 소리에 달려가 보니 늑대가 한 노인을 몰아세우는 것을 보고 몽둥이로 요절내 버렸는데 그 노인이 바로 정신착란에 빠져 있던 개방의 전 방주인 엽지혼이었던 것이다.

그때와 다름없이 푸르른 대나무 숲을 보자 그날의 광경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고 함께 나누었던 대화도 아른거렸다.

“와∼ 잘한다, 잘해, 우리 편 이겨라, 우리 편 무조건 이겨라!”

“와∼ 죽었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다친 데? 응, 여기 아야 해.”

과장된 표정으로 아프다며 무릎을 까 보인 사부의 모습이었다. 표영은 괜히 눈물이 나려 했다.

“하하하, 노인장도 참, 이 정도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제게 특효약이 있으니 염려 마세요, 크으윽∼ 퉤∼.”

그날 표영이 제시한 특효약은 다름 아닌 입 안에 가득한 침이었던 것이다.

“우와! 시원하다.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은 것 같은걸! 너무 대단해∼. 좀 더 발라줘∼ 응? 좀 더 많이 발라달라니까.”

“어? 네, 네.”

“너무 좋은걸.”

“하하, 노인장의 몸이 나으셨다니 매우 기쁘군요. 전 이만 볼 일이 있어 떠나야 하니 부디 몸을 잘 살피시길 바랍니다.”

“형, 나 버리고 가면 안 돼. 나 혼자 있기 싫어, 무섭단 말이야.”

“예엣∼ 형요?”

“내가 싫어서 떠나려고 그러는 거지? 형, 미워, 늑대가 나타나면 난 어떻게 해. 엉엉∼”

“울지 마세요. 저는 형이 아니에요. 전 아직 어리거든요.”

“형이 형이지, 또 뭐야. 괜히 나를 떠나려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다 알아. 정말 나빠. 흑흑.”

“음… 그럼 잠시 동안만 같이 있도록 할게요. 알겠죠? 저는 사실 다른 곳에 볼 일이 있거든요.”

“아이, 좋아라, 형. 우리 집으로 어서 가자.”

그렇게 사부와 표영은 만나게 되었다.

표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뿌옇게 흐려지자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면서 눈물을 참았다. 아마도 혼자였다면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막지 않았을 것이다. 표영은 애써 태연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용히 말했다.

“이곳이 나의 사부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곳이란다. 지형을 기억해 두어라. 자, 위로 올라가도록 하자꾸나.”

표영의 목소리는 이제까지 혁성이 들어보지 못했던 진지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 네, 그러시죠.”

귀를 가까이 대고서 소리를 꽥∼ 하고 지른 것보다 더 놀라 버린 혁성이었다. 성큼 앞서 가는 표영의 뒤를 따르며 혁성은 스스로에게 경고를 발했다.

‘혁성아, 넌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사부가 정상이 아닌 것 같거든. 이러다 밤새 맞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제길, 사부는 왜 난데없이 무게를 잡고 난리람. 괜히 사람 주눅들게 말야.’

표영이 아직까지 취운산에 온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은 까닭에 혁성은 괜히 마음만 졸였다.

한참을 올라가자 과거 표영이 엽지혼과 함께 지낸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앞쪽에는 외롭게 봉분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엽지혼의 무덤이었다.

표영은 감회에 사로잡혀 무덤 앞에 가만히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사부님! 제자 표영입니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 제자와 함께 왔습니다. 사실 사부님께 제일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서 얼마나 길을 재촉했는지 모릅니다. 개방은 이제 예전 사부님이 이룩해 놓으셨던 때로 돌아가 강호의 도의를 지키며 의를 숭상하라는 가르침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지금의 개방을 보면서 사부님을 떠올리고 있고 또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받아들인 제자는 근본이 선하고 자질이 누구보다 뛰어나 다음 대를 이을 만한 재목인 듯합니다. 제가 사부님께 사랑받으며 배움을 얻었듯이 저 또한 마음을 다해 제자에게 가르침을 베풀도록 하겠습니다. 돌아오실 수 없겠지만 부디 저 먼 곳에서라도 지켜봐주십시오…….”

가만히 지켜보는 혁성은 미묘한 심정에 사로잡혀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제까지 생각해 왔던 사부의 모습과 지금 다가오는 사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까닭이었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그 두 모습이 확연히 다른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매우 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표영이 초탈함과 진실함을 가득 품고 있기 때문인데 지금 이 순간도 어색한 듯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그런 특별한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깨달아야 할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혁성은 지금의 느낌을 그렇게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따름이었다. 어느덧 천천히 몸을 일으킨 표영은 지난날 사부와 함께 지낸 동굴로 혁성을 데리고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아 표영은 비로소 하나하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의 조사 되시는 분은 천상신개라는 별호를 사용하셨는데…….”

이 말을 시작으로 표영은 처음에 어떻게 엽지혼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곳 동굴에 머물면서 있었던 일들을 편안하게 들려주었다. 간혹 이야기를 하다가 옛 생각이 나 마음을 울리는 격정이 일면 잠시 심호흡을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혁성은 만남부터 지내온 과정이 너무도 황당해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낮에는 정신착란으로 오히려 제자에게 형이라고 불렀다든지 밤 시간 잠깐 동안 정신이 돌아올 때는 사부로서 무공을 전수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웃겨보려고 꾸며낸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혁성은 이야기를 계속 들어가면서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껏 혁성이 바라본 사부 표영은 거짓말을 하거나 농담을 할 때는 헛기침을 한다든지 약간의 과장됨이 몸짓이나 말투에서 나타기 때문이다.

잔잔히 이어지는 이야기는 막힘이 없었고 부드러운 음성에는 일체의 과장됨이 없었다.

시종일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던 표영이 작게나마 얼굴에 미소를 띠운 것은 마교의 교주가 작은 언덕배기에 매달려 있다가 죽었던 이야기를 할 때였다. 그 이야기엔 혁성도 실실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표영은 목에 걸린 패를 꺼내 보였다.

“이걸 보려무나. 이것이 바로 마교의 지존을 상징하는 건곤패란다.”

혁성은 실실거리다가 진짜 패가 눈앞에 대롱대롱거리자 웃음기를 싹 없애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사부님이 너무 진지해서 반드시 진실일 것이라고 믿기는 했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사실이었군. 허허, 참.’

혁성은 건곤패와 사부 표영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교의 재건을 위해 남겨진 거마들도 개방에 있단다. 나중에 소개시켜 주마. 하지만 이 일은 네가 유일한 제자이기 때문에 전해준 것이니 아무렇게나 입을 얼어선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혁성은 입을 쩍 벌린 채로 고개만 까닥거렸고 표영은 그 뒤 당문의 문주와 장로들을 만나게 된 것과 오극전갈을 만난 것 등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모든 것이 흥미진진한 내용이었지만 조사의 마지막을 들을 땐 혁성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부…….’

표영과 혁성이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망창산의 반구옥이었다.

이곳은 노위군 당시에는 반대 세력을 가두고 고문하는 따위의 역할로 쓰였지만 표영이 방주로 등극한 후에는 특별한 기념처로 만들어 개방의 영웅들이 어떠한 고난 속에서 꿋꿋이 사악함에 대항했는지를 배우도록 지정한 터였다.

개방에 입방하게 되고 정식 제자가 되면 반드시 이곳을 찾도록 했기에 혁성도 살펴보아야 했다.

산꼭대기에 이르자 혁성은 허망하게 표영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인즉, 어디에 반구옥이 있냐는 질문이었다.

“하하, 녀석. 자, 그럼 들어가 볼까?”

아직 영문을 알 수 없는 혁성은 괴상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갑작스레 공간이 열리며 투명한 빛이 뿜어지면서 점점 거대한 감옥의 형상이 나타나는… 뭐 그런 상상이었다.

‘정말일까?’

그런 혁성을 표영은 옆구리에 끼고서 그대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혁성이 경악에 찬 것은 두말할 것 없었다.

“캬아아악∼.”

미처 ‘사람 살려, 왜 그러세요’ 등의 말을 꺼낼 겨를도 없었다. 비명도 간신히 질러댄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표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허공 중에 몸을 구십 도 각도로 틀어 절벽에 난 동굴로 빨려 들듯 들어갔다.

옆구리에서 내려놓았지만 이미 혁성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워낙 느닷없이 절벽으로 달려든 데다가 머리가 약간 아래로 숙여진 상태에서 쾌속하게 떨어지며 절벽 아래를 바라보게 되었던지라 이젠 죽었구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야, 정신 차려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혁성에게 표영이 조용히 뇌까렸지만 혁성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것을 오랫동안 참아주기엔 표영의 성질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표영은 이미 반구옥으로 오는 도중에 무거운 마음이 차차 본래대로 돌아온 상태였고 지금은 완연히 표영 그 자체였다.

파악∼

표영이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갈겼다.

“정신 차리란 말이다, 이놈아.”

어찌나 손이 매운지 혁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매만지며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아이, 좀 다정하게 감싸주시면 안 되나요?”

“오호라, 다정하게 감싸준다라… 좋은 말이지, 오냐. 알았다.”

혁성은 따뜻한 마음을 의미했는데 표영은 진짜 감싸주려고 다가왔다.

“아이고, 왜 이러세요?”

“감싸주라며… 이리 와.”

표영은 혁성을 두 손으로 끌어안고서 엄청난 힘으로 조여 버렸다. 혁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이 막히는지 입을 벌리고 곧 죽을 것처럼 꺼억꺼억거렸다.

“사, 사, 사부님, 살…….”

“왜? 살살하지 말라구? 이 녀석도 참∼ 오냐. 꽉 끌어안아주마.”

뜨득.

어디선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확실한 건 혁성의 뼈가 어긋난 것이 분명했다.

“으윽, 끄으윽.”

뚜드득.

두 번째 괴음이 들린 후 표영은 이 정도면 됐다 싶은지 팔을 풀었다.

“하하, 감싸주니까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 같구나.”

털썩 주저앉은 혁성으로서는 막혔던 숨을 몰아쉬면서 사부 표영을 바라보았다.

“사부님, 헥헥, 앞으로 감싸주지 마십시오. 으으윽, 가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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