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
제8장 몰매에 장사 없다
솔직히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처음 태어날 때부터 거지가 되고 싶었다.
나의 꿈은 처음에도 거지, 나중에도 거지였다.
환경은 여러모로 날 가로막았지만 난 비로소 소망을 이루고 말았다.
기쁘다.
모든 세상이 다 추잡스럽게 보인다.
꿈을 이룬 것이다.
- 모든 것을 체념한 후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기로 한 혁성
***
비명을 지르며 혼절했던 혁성이 깨어난 건 꼬박 이틀이 지나서였다.
노송봉에서의 천둥과 느린 동작 사건은 믿었던 천강대에 대한 배신감에 가슴이 저며오는 통증으로 다가왔다.
또한 혼절한 까닭에 표영의 어깨에 걸쳐져 취운산으로 향하는 중에도 충격의 여파로 연신 헛소리를 질러대거나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아악∼ 아악∼.”
비명은 실로 처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혹여 철저히 농락당해 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까. 어지간한 보통 사람이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명이리라.
“까아악∼ 안 돼∼.”
표영은 낙엽부영을 시전하며 들쳐 멘 혁성이 한 번씩 비명을 지를 때마다 씨익 웃곤 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난밤 중에 혁성은 정신을 차렸고 어느덧 바닥에 뉘어져 있음도 알았다.
‘여기는 어디일까? 아∼ 세상이 싫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시 사부와 천강대가 느린 모습으로 주먹을 날리고 피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제길.’
그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정말 제길이었다. 맑은 밤하늘엔 반달이 떠 있었고 그 주위로 별들이 각기 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제 난 평생 거지로 살 수밖에 없겠지?’
뭐든지 정도(한계)가 있는 법인데 혁성이 생각할 때 사부 표영은 언제나 평범을 거부해 왔다. 정말 인정하긴 싫었지만 제아무리 날고 뛰어도 어찌해 볼 수 없다는 것을 혁성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혁성의 시야에서 밤하늘의 별들이 몇 개가 사라지며 낄낄거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후후, 이제 정신이 든 게냐?”
표영이 다가와 대자로 뻗어 누운 혁성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한 것이었다.
‘사부로군, 근데 이 목소리는 왠지 심상치 않은데.’
혁성은 이제 표영의 음성 속에 깃든 다음 행동 습관을 어느 정도 예상하는 경지까지 이르게 된 터였다.
‘좋지 않아.’
혁성의 예감은 안타깝게도 거의 일치했다.
“뭐라고 했더라? 으음 그러니까…….”
‘커억∼’
혁성은 천강대가 나타났을 때 취한 행동과 말을 따지려 한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은 혼절하여 -도대체 며칠간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지는 모르지만 꽤 오래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깨어났기에 설마 후려패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사부는 사부가 아니겠어?’
“음, 맞아, 생각나는구나. ‘거지 따위는 되고 싶지 않다. 이 악당아! 군자를 괴롭히지 말고 혼자 거지 소굴로 꺼져 버려라’였었지? 또 뭐였지? 그렇지, 비웃음을 띠며 이렇게 말했지. ‘주물러 죽여 버려라’라고 말이야.”
“컥∼ 사부님, 제가 언제 그런 말을…….”
아무리 봐도 심상치가 않았다. 사실 원래 혁성이 했던 말은 이랬다.
“저는 거지 따위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방주님께선 그냥 포기하시고 개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주물러 주어라.”
비록 위의 말도 결코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표영이 과장한 말에 비하자면 순수한 표현 그 자체였다.
“내 오늘 사부에게 대드는 버르장머리없는 놈의 정신을 똑바로 들게 해주겠다.”
표영은 타구봉을 꺼내더니 두 팔을 하늘로 쳐들고 발악하듯 외쳤다.
“강호여∼ 보아라∼ 그리고 들으라. 내 오늘 하나밖에 없는 귀한 제자를 후려패 세상의 위계 질서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노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표영은 타구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정한 초식이고 뭐고가 없었다.
파팍! 파팍! 팍팍팍!
“이 나쁜 놈 같으니라구, 씩씩. 네놈이 감히 하늘 같은 사부를 죽이려 들었겟다? 그래, 죽어봐라, 이놈아! 죽어∼!”
파파팍! 파팍파팍!
“으아악∼ 살려주세… 윽∼ 살려주… 어억… 세요…….”
파팍! 팍팍팍!
“지금 살려달라는 말이… 씩씩… 나온다 이거지… 오냐. 맛을 더 보여주마.”
“용서하십… 커억… 시오… 사부님… 다시는 으악∼ 그런 일이 없도록… 크헉!”
한밤중에 시작된 난데없는 거친 매질과 비명에 산중에 있던 부엉이며 노루, 사슴, 심지어 늑대들까지 -노루나 사슴을 공격할 생각도 잊은 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 소란을 지켜보았다.
“크아악∼ 살려… 으어억∼ 주세요…….”
표영의 매질은 아침 해가 솟아나 대지를 찬란하게 비출 때까지 계속되었고 구경하던 짐승들은 지켜보는 것도 지루했는지 어느새 아무도 없었다. 혁성은 표영이 기술적으로 아프지만 기절하지는 않을 정도로 계속 후려패는 까닭에 매를 맞으며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몸을 웅크리기도 하고 이리저리 틀기도 했던 혁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편한 자세로 누워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채 몸을 후려오는 타구봉에 맞을 때마다 움찔거릴 뿐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오늘도 태양은 어김없이 뜨는구나.’
어느새 혁성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땅을 적셨다.
그런 중에도 표영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이놈아, 사부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그 모양이란 말이냐! 죽어라∼”
파팍! 팍팍!
꿈틀. 꿈틀.
혁성은 간헐적으로 몸을 떨며 연신 눈물만 주르르 흘릴 뿐이었다.
주르르르…….
마음이 차분해지며 머리에서 저절로 생각이 정리되었다.
사방은 강철 같은 벅으로 막혀 있다.
어디를 봐도 빠져나갈 수가 없구나.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인다.
구원의 빛!
무얼까?
이런, 신선인가? 아니면 하늘의 선녀인가?
내 손에 밥그릇을 꼭 쥐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제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거지다.
이왕 거지가 되는 것, 그래. 최고가 되자.
***
이제 이틀 정도만 가면 취운산에 도착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혁성은 지독히 얻어맞은 후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너무나 변해 심지어 표영조차도 이맛살을 찡그리고 째려볼 지경이었다.
‘이게 미쳤나?’
미쳤다면 미쳤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혁성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최고의 거지가 되자고 뼈마디에 새겨 넣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하루 이틀만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녀석! 드디어 마음을 정한 것이로구나, 장하다. 넌 기본을 해낸 거야.”
표영은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단지 아직까지 매질의 효과가 이어지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녀석이 무슨 속셈이지? 계획을 바꿨나?’
“감사합니다, 사부님! 이 모든 것이 사부님의 은혜입니다.”
화사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혁성은 진정으로 감사해하는 것 같았다. 표영은 과연 그러한지 마지막 시험을 해보고 믿기로 마음먹었다.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으흐흐.’
“자, 너의 깨달음을 위해 한잔 기울이지 않을 수 없구나.”
표영은 첫 번째 호리병에 든 청향주를 마시고선 모질게 뚜껑을 닫아버렸다. 그리곤 두 번째 호리병을 열더니 개 국물을 잔에 가득 따라 혁성에게 내밀었다.
“쭈욱 시원하게 들이키도록 해라, 구수할 것이다.”
‘히히, 녀석.’
표영은 남은 손으로 타구봉을 어루만지며 제자가 매를 벌기만을 기다렸다. 분명 자신도 청향주를 마셔야 한다고 고함을 치거나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라는 말이 나올 것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요 며칠 사이 타구봉이 할 일이 없어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타구봉아, 조금만 참아라.’
표영은 의기양양하기만 했다. 하지만 혁성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아, 이 귀한 것을 이 제자에게 주시다니, 역시 사부님께서 제자를 아끼시는 마음은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
예측하지 못했던 곳에서 공격이라도 당한 듯 표영은 약간 입을 벌리고 손을 내민 자세 그대로 석상이 되어버렸다. 정지해 버린 것이다.
혁성은 표영의 손에 된 국물 잔을 냅다 받아 들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후르륵 마셔 버렸다. 심지어 국물 한 방울도 남김이 없었다. 그리고 마무리 후렴도 잊지 않았다.
“국물이 끝내주네요, 아직 목이 칼칼한데 한 잔 더 마실까요?”
“……?!”
여전히 일시 정지해 버린 표영을 두고 혁성은 호리병 마개를 열어 한 잔 가득 따른 다음 여지없이 마셔 버렸다.
“캬약∼ 시원하다∼”
표영의 눈동자가 떼구르르 움직여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다른 곳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설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사부님, 괜찮으신 겁니까? 어디 불편하세요?”
혁성은 손을 활짝 펴 표영의 눈 주위에 어른거렸다. 표영의 시선은 먼 여행을 떠나 있어 전혀 깜빡거림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표영이 두 팔을 벌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하하하하… 이제야 제자를 찾았구나!”
표영은 혁성이 그동안 천선부에서 곱게 자란 틀을 한 꺼풀 벗겨내고 마음을 연 것에 기뻐함이었다. 천선부에서 나오는 동안에도 제자로 받아들였으나 아직 사부와 제자를 맺는 구배지례를 행하지 않고 있던 표영은 비로소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잘해주었다.”
표영은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고 구배지례를 허락했다. 취운산이 가까이 오는지라 기쁨은 더욱 컸다. 떠난 사부에게 보여주어도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구배지례를 행하는 혁성도 왠지 신중해짐을 느꼈다. 보잘것없이 여겼던 거지 생활과 개방 방주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쩌면 강호의 그 어떤 누구도 받아보지 못한 축복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까지 오는 동안 끝을 알 수 없는 갈굼 속에 혁성은 새롭게 거듭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