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
으르릉∼ 쿠엉… 퀑, 으르릉-
손으로 혁성을 가리키다가 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기도 하면서 입으로는 여러 소리를 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중이었다. 표영은 그 앞에서 호랑이의 하는 짓을 보며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구나, 좋아좋아.”
그 상황 중에 기쁘면서도 황당한 것은 혁성이었다.
‘뭐, 뭐냐. 이건, 지금 사부는 호랑이랑 말을 하고 계신 건가? 거참.’
호랑이도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고 표영도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이는 폼이 상당한 대화가 오고 가는 듯 보였다.
‘허허, 거참.’
호랑이한테 물리지 않아서 좋기는 했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입만 쩍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얼마 전에 개 다리 한짝을 들고 왔을 때 했던 말도 사실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한참 동안 서로 의사를 교환하더니 대충 정리가 된 것인지 호랑이가 앞발을 내렸다.
표영은 호랑이 머리를 개 머리 쓰다듬듯 하다가 두 번 톡톡 친 후 말했다.
“어서 가봐라, 고생했다.”
호랑이는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에 뛸 듯이 기뻐하며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허허, 고놈 잽싸기도 하네.”
표영은 혁성을 묶어둔 넝쿨을 끊고 마혈을 풀어주었다.
“근데 왜 바지가 젖어 있는 것이냐? 너, 울었냐?”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러세요? 괜히 엉뚱하게 사람을 묶어두고 그러실 수 있는 겁니까?”
이제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지라 혁성이 따지고 들었다.
“이 녀석아, 그러게 평상시에 행동을 똑바로 했어야지.”
“호랑이가 뭐라고 하던가요?”
“일주일을 굶었다고 하더라.”
혁성은 배를 만진 것을 떠올렸고 표영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널 보자마자 내 제자란 걸 알아봤다는 거야. 그래서 다른 짐승들이 멋모르고 접근할까 봐 지키고 있었다는구나. 그래서 나도 머리를 좀 쓰다듬어 주었지.”
혁성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환장하겠군, 환장하겠어.”
혁성은 호랑이로부터 극적으로 구출받고 나서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처음에 고마웠던 마음은 바로 사그라들었다. 물론 사부가 호랑이하고 뭐라고 뭐라고 하는 것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모습이긴 했다. 하지만 산을 오르면서 곰곰이 되짚어보니 애초에 자신을 묶어두지 않았다면 바지에 오줌을 지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두려움에 떨지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여간 원통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는 부디 천강대의 기습이 성공해 영원히 사부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바로 코앞에 노송봉 정상이 놓여 있었다.
‘어서 나타나라, 천강십사∼’
속으로 내뱉는 혁성의 외침을 들었음인가, 좌우 도합 일곱 명이 신형을 날리며 표영과 혁성 앞에 나타났다.
“멈춰라.”
혁성은 왜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정면에 위치했는지 의문스러웠지만 일단 나타난 것에 만족하고 표영이 엉거주춤한 상황을 틈타 잽싸게 천강대 쪽으로 달려갔다.
“웬 놈들이냐? 그리고 혁성, 너는 왜 그곳으로 간 거지? 정녕 사부를 버리겠다는 것이냐?”
표영은 마치 이들을 처음 본 것처럼 진지하기 이를 데 없이 말했다. 아까 히죽거리며 천강대를 조롱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말과 표정이었다. 천강대의 수장 을휴는 표영의 말 따윈 아랑곳하지도 않고 혁성을 보고 말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공자님 이제 아무런 염려 하지 마십시오.”
혁성은 왜 나머지 일곱이 보이지 않는지가 의아했지만 일단 믿음직스러운 을휴의 말을 듣고 보니 기분이 우쭐해졌다. 나타나지 않는 일곱은 상황이 불리해지거나 혹은 기습적인 공격이 필요할 때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다. 안타까운 것은 혁성이 천강칠혼진의 위력을 지나치게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는 거지 따위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방주님께선 그냥 포기하시고 개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을휴도 거들고 나섰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원치도 않은 일을 억지로 시켜서야 되겠소이까?”
표영은 비장한 얼굴로 전의를 불태웠다.
“흥, 어리석은 녀석들 같으니라구. 너희가 감히 나를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으냐, 혁성! 너는 똑바로 보아라. 오늘 이 사부의 진정한 힘을 네게 보여주도록 하마!”
혁성은 비웃음을 띠며 천강대들에게 명령했다.
“주물러 주어라.”
표영은 그에 대응해 두 팔을 하늘 놀이 쳐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흥, 벼락으로 날려주마. 천둥과 벼락이여∼ 내려와 저들을 응징하라.”
천강대 일곱인의 신형이 표영에게 매서운 기세로 날아들었고 표영은 반격할 준비는 접어두고 여전히 주문을 외워댔다.
“우르르릉∼ 콰쾅!”
화창한 날씨 속에 간혹 구름 한 조각씩 유유히 흐르는 하늘이었다. 비가 올 기미라든지 벼락이 칠 기미는 솔직히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더 웃긴 건 표영이 천둥과 벼락을 부른다면서 천둥 소리를 입으로 소리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혁성은 기가 막히면서도 우스워서 깔깔거렸다.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보군.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짓을…….’
하지만 혁성의 생각은 끝을 맺지 못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커억, 뭐, 뭐냐?”
혁성의 눈은 거의 절반 이상 튀어나올 정도가 되어버렸다. 놀랍게도, 아니, 어이없게도 우르릉 콰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맞추어 그토록 위세당당하게 신형을 날리던 일곱 천강대원들이 급살 맞은 듯 중도에서 떨어져 내린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게거품을 물었다. 그건 믿을 수 없게도 실제 번개를 맞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커억커억.”
다른 말도 못하고 혁성은 커억만 남발했다. 지금 이 상황은 아까 표영이 천강대에게 경천패를 내보인 후에 명령한 것이었다.
이들은 크게 두 개 조로 분류되었는데 그중 1조는 천둥번개를 맞아 부들거리는 역할을 맡아 실행하고 있음이었다.
표영은 이미 쓰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우르릉 콰쾅을 외쳐 댔고 그때마다 천강대원들은 비명을 질러대며 고통스러워했다.
혁성으로서는 그러한 광경에 석상처럼 굳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일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간 우르릉 콰쾅이 지루하다고 여겨질 즈음 이번에 2조가 투입되었다. 혁성은 설마하는 생각으로 이들 일곱에게 기대를 걸었다.
일곱 중 공환이 큰 소리로 고함쳤다.
“공자님, 아무 염려 하지 마십시오. 네 이놈, 인간의 탈을 쓰고서 어깨 이토록 악랄할 수 있느냐! 구주신개, 네가 오늘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혁성은 공환의 사리가 분명한 듯(?)한 말에 그나마 위안을 갖고 정신을 차렸다.
“공환! 어서 공격해라!”
“네!”
2조로 투입된 천강대의 칠 인은 표영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앞서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기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번개같이 신형을 날려야 할 칠 인의 천강대원들이 모두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냥 천천히 움직였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꿈을 꾸듯 아주아주 느린 동작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커억∼”
혁성은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갑작스런 모습에 놀란 혁성은 이번엔 고개를 돌려 사부를 바라보았다.
“허걱!”
거기엔 표영도 느린 동작으로 맞서가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이번엔 부들부들 천둥(?)에 얻어맞았던 이들을 바라보았다.
“헉! 현실인가.”
심지어 아까부터 고통에 몸부림치던 이들조차 아주 느린 동작으로 부들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혁성은 보는 것마다 천천히 움직이자 비로소 자신이 너무 격정적인 순간을 맞이하다 보니 현실이 꿈결같이 느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혁성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자신도 느리게 느리게 목을 돌려 상황을 보기 시작했다.
칠 인의 천강대와 표영은 어느새 뒤엉켜 있었다. 천강대 중 심운학의 손이 느리게 표영의 머리를 향해 뻗어갔다. 표영은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이로 비껴내면서 주먹을 심운학의 배에 작렬시켰다.
타아타아타아∼
“으아아악∼”
격타음과 비명 소리조차 늘어진 소리로 퍼져 나왔고 쓰러지는 것도 아주 느리게 넘어졌다. 표영은 다시 느리게 몸을 기묘한 각도로 틀어 옆에서 짓쳐드는 공격을 흘리고 손을 뻗어 등 뒤 마혈을 점혈해 버렸다.
“으으으읍!”
그렇게 하나둘 제압하고 결국 한 명만이 남게 되자 혁성은 절망에 사로잡혔다. 믿었던 천강대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사부에게 당할 고초를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다. 혁성은 절망에 사로잡혀 서서히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저건 뭐지?’
혁성의 눈에 도무지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잡혔다. 그건 두 마리의 새었다. 새가 산 위를 날아다니는 것이야 이상한 게 없지만 문제는 빠른 속도로, 즉 느린 모습으로 날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믿기지 않게도 너무 유유히 하늘을 비상하고 있었다.
‘왜 저것들은 느리게 움직이지 않지?’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서 느끼는 바가 있어 혁성은 손을 빠르게 들어올려 보았다. 획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이 정상으로 움직였다. 목도 움직여 보니 마찬가지였고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나뭇잎을 바라보니 바람결에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이었다.
혁성은 다시 눈을 돌려 표영과 마지막 한명 남은 천강대를 바라보았다.
둘은 여전히 공방을 겨루며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으아악∼ 아아악∼ 으아악∼”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혁성은 비로소 사태를 짐작한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아픔이 이러할까. 어찌나 급작스럽고 크게 외쳤는지 주먹을 내뻗던 표영과 피하려 하던 천강대의 구풍이 자세를 일단 정지시키고 혁성을 바라보았다. 혁성은 그 광경에 더욱더 광적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으아악∼ 으아악∼ 까아악∼”
이젠 심지어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쥐어잡고 뜯어내고 있었다. 잠시 동안 자세를 멈추었던 표영과 구풍은 다시금 마무리를 하기 위해 느리게 움직였다.
“이…입… 받… 아… 라…….”
“으… 으… 윽…….”
끝내 구풍도 느리게 느리게 허물어졌다.
“까아악∼ 으아악∼”
절규가 계속되는 가운데 표영은 최후의 한 명까지 쓰러뜨리고 난 후 늠름한 자세로 아주 천천히 느린 화면처럼 혁성에게로 걸어갔다. 원래부터 느리게 보여지는 것처럼 표영은 느리게 걸어오면서 비명을 질러대는 혁성에게 말했다.
“제… 자… 야… 어… 떠… 냐… 이… 사… 부… 가… 대…단… 하… 지… 않… 느… 냐……?”
역시나 말도 느리게 전해졌다. 혁성은 그런 표영을 보고서 눈에 핏줄을 세우곤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으아악… 아아악… 아아아아아악∼.”
혁성은 결국 지나친 심적 충격을 견디다 못해 끝내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열네 명의 천강대는 모두 옷을 탈탈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좋았어. 다들 대단한걸. 이젠 가봐. 그리고 이 경천패는 건곤진인께 갖다 드리게. 다 쓰고 나면 자네들 편으로 보내라고 하시더군. 고맙다는 말 잊지 말게.”
을휴는 흙이 입 안에 들어간 듯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경천패를 받아 들었다.
“난 이만 가네.”
표영은 혁성을 들쳐 업고서 빠르게 사라졌고 천강대는 멍한 눈동자로 허탈함에 젖어 표영이 사라진 곳만 바라보았다.
‘정말 기이하군… 기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