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164.
“자, 그럼 일렬로 줄을 맞춰 서도록 해.”
제일 앞에 선 을휴로부터 마지막 심보까지 천강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열을 맞추었다. 모두들 죽을상을 하고 있는 모습에 표영은 위로의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너무 그렇게 풀 죽어 있을 필요 없어. 사실 자네들은 행운아들이라구. 그런 얼굴은 어울리지 않는단 말일세. 어이, 거기 줄이 삐뚤어졌잖아, 똑바로 좀 서보라구.”
표영은 줄이 확실히 맞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왜 행운아인지 말해 주지. 어떤 경우엔 말이지. 재수가 없을 땐 기간이 한 달 정도가 넘은 것을 먹어야 할 때도 있단 말이거든. 그건 솔직히 말해 거의 세 번째 호리병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할 만하거든. 그런데 이번 것은 오 일도 채 안 됐단 말씀이야. 이런 걸 보고 세상 사람들은 천운을 타고났다고 하지. 자자, 그러니 얼굴들 펴라구.”
표영 딴에는 위로의 말이라고 한 것이었지만 천강대에겐 더욱 심란함만 부채질한 꼴이었다.
“그러니까 이 국물을 담았던 곳의 그 개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아. 나비였지. 개에게 나비란 이름을 붙인 건 처음 왔다니까. 나비가 뭐야, 나비가. 고양이라면 어울려도 솔직히 이상하잖아. 그런데 문제는 나비란 녀석이 덩치는 얼마나 크던지 곰을 보는 것 같더라니까. 그 녀석 혀도 길어서 잘도 국물을 핥았지. 내가 지 것을 담았다고 그리 기분이 좋은 것 같진 않더군.”
천강대의 얼굴은 표영의 말이 더해질수록 점점 더 새까맣게 변해갔다.
‘아이 씨. 차라리 말이라도 하지 말지.’
‘죽겠구만, 아주.’
“자, 그럼 이제 한 잔씩 하도록 할까?”
제일 먼저 을휴가 잔 가득 넘치도록 받았다. 기름기가 둥둥 떠 있는 것을 보자 삶의 희망마저 무참히 짓밟히는 것 같았다. 을휴는 사약을 받는 사람처럼 느리게 잔을 받았다.
“흘리면 안 돼, 흘린 만큼 또 먹어야 한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될 거야.”
표영이 못을 박듯 이야기하자 을휴는 혹시 한 방울이라도 흘리게 될까 봐 조심스럽게 꿀꺽꿀꺽 받아 마셨다. 결국 목젖이 일렁거리며 깨끗이 받아 마셨다. 을휴는 비통에 빠져 잔을 표영에게 넘긴 후 옆으로 걸어가더니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하늘이 참 맑구나.’
어느새 그의 눈엔 뿌옇게 이슬이 맺히더니 주르르 뺨을 타고 귓가로 흘러내렸다. 모두가 그러했듯 을휴도 인생에 대해 심각히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과연 앞으로의 인생을 잘 살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천강대원들은 한 명씩 한 명씩 국물을 받아 마시고 차례로 을휴 옆으로 가 누워 눈물을 흘렸다.
표영은 또 다른 용건이 남아 있는지 그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타구봉으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고 있었다.
눈물도 어지간히 흘렸음인가. 을휴로부터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나 표영에게 다가와 작별을 고했다.
“안목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어? 벌써 가려구?”
“네, 곧장 천선부로 가볼까 합니다.”
“이대로 가면 좀 곤란한데… 하하, 한 가지 부탁을 더 들어주어야겠어.”
“이미 저희는 대가를 다 치렀다고 생각됩니다만…….”
거기라지 말하던 을휴는 다시금 눈이 튀어나오는 충격에 휩싸였다. 표영이 품에서 작은 패를 내보인 까닭이었다 거기엔 경천(驚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글자 위로 봉황이 날개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을휴를 비롯한 천강대원들은 그 자리에서 무릎 꿇었다.
“천강대는 오로지 복종뿐입니다.”
경천패는 건곤진인 오비원을 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도록 정해놓은 천선부의 신물이었다. 즉, 경천패를 지닌 자에게 오직 그 뜻을 따르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천강대가 놀랄 수밖에.
“오호∼ 이거 효과가 대단한걸. 건곤진인이 요긴하게 쓰고 돌려달라길래 뭔가 했더니 이런 것이었군.”
표영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천강대원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미 부주께선 대비책을 세워놓으셨었구나.’
‘어쩐지 오백 님께서 큰소리를 치시더라니…….’
‘제길, 경천패가 있으면서도 왜 구주신개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이제야 내민단 말인가.’
‘설마 이번엔 세 번째 호리병에 담긴 것을 마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제발 그것만은…….’
‘겉으론 허술하게 보여도 지독하기 이를 데 없구나.’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표영의 꾀에 넘어가 국물을 마시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이곳까지 이르게 된 것을 한탄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도 너무 늦은 셈이었다.
“하하, 그렇게 긴장들 하지 않아도 돼. 내가 또 뭔가를 마시라고 시키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야.”
그나마 그 말에 천강대는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들은 실로 만성지체의 변화무쌍한 대처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불쌍한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다.
“어이, 거기 짙은 눈썹 양반!”
을휴가 자신을 가리키는 줄 모르고 뒤를 바라보며 찾는 시늉을 했다.
“이봐! 정신 똑바로 못 차리네, 대머리. 자네 말이야.”
그제야 을휴는 자신인 줄 깨닫고 멋쩍게 일어섰다. 표영은 을휴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리면서 한참 동안이나 뭔가를 설명했고 을휴의 표정은 점점 더 벌겋게 변해가 결국에는 피같이 붉어져 버렸다. 말을 마친 후 표영은 을휴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는 기색으로 물었다.
“뭐, 뭐지? 얼굴이 이거 완전히 핏덩어리잖아.”
표영은 그래도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젓고 신형을 날리며 작별을 고했다.
“그럼 부탁하겠네.”
표영이 멀리 사라지고 을휴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천강대원들의 얼굴은 을휴와 마찬가지로 핏덩어리로 변했다.
‘잘못 걸렸어, 이번 일은 일생일대의 실수다.’
제7장 천강칠혼진과의 대결
옛말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
이 모두 얼마나 주옥 같은 말들인가. 나도 인정할 건 인정한다.
하지만 왜… 왜…….
하필 도끼에 내 발등이 찍힌 거냐.
그 많고 많은 발 중에서 말이다.
-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혁성이
***
혁성의 이마에서는 끊임없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땀뿐만이 아니었다.
눈동자는 크게 확대되고 입에서는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으… 젠장…….’
혁성만을 바라보노라면 필시 용변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 할 만했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전혀 뜻밖의 사태였고 실제로 땀을 흘릴 만한 중대한 문제였다.
혁성의 부릅뜬 눈이 이른 곳에는 큰 송아지만한 덩치의 호랑이가 약 5장 정도(17미터) 앞쪽에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혈이 찍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실정에 넝쿨에 친친 감긴 혁성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호랑이의 덩치로 볼 때 몸이 자유로워도 쉽게 제압하거나 피해내기가 힘들 것 같은데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으르릉-
호랑이는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소리로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쉽게 달려들진 않았다. 이 호랑이로 말할 것 같으면 산의 터줏대감 같은 존재로 영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으르르릉…….
매서운 눈매로 정면에서 노려보는 호랑이의 눈은 조심스럽게 탐색을 벌이고 있었다. 그 으르렁거림 속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멀쩡한 놈이 어찌 저기에 묶여 있는 것일까? 나를 유인하려는 것일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아마 어눌한 호랑이 같았으면 혁성은 진작에 다리부터 뜯겨나가 결국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먹이가 되고 말았을 터였다.
호랑이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주변을 배회하며 예리한 눈으로 살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함정이나 기괴한 인간들의 장치를 파악코자 함이었다.
혁성으로서는 일각이 천 년같이 여겨지는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미운 사부가 이젠 저주스럽기까지 했다.
‘제길, 사부는 왜 혈까지 짚어놓고 가서 사람의 피를 말리는 거냐구. 아, 내 젊은 인생,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니겠지? 호랑이의 밥이라니. 이게 말이 되냔 말이다.’
혁성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사부가 달려와 주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그러면 그냥 다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제발 어서 와주세요, 사부님. 앞으로 거지 생활 착실히 하겠습니다. 부디 빨리만 와주세요.’
끔찍이 싫어하던 거지 생활까지 들먹이며 기원하는 것을 보건대 혁성이 얼마나 다급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어느새 호랑이는 점점 간격을 좁혀오고 있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흔히들 호랑이를 만나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말하지만 혁성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정신을 차리더라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을 때라야 무슨 수작을 부려보든지 할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또한 호랑이를 만났을 때 눈싸움에서 지지 않으면 살 수 있다는 말도 도무지 적용할 수가 없었다.
괜히 노려봤다가 괘씸죄가 추가되어 느닷없이 달려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제발… 물러가다오, 네 갈 길을 가란 말이야.’
하지만 혁성의 바램과는 달리 호랑이는 점차 거리를 좁혀와 이젠 거의 이 장여(6.6미터) 정도까지 이를 지경이 되었다. 말이 이 장여지, 큰 덩치의 호랑이임을 감안할 때 바로 코앞에 이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호랑이의 살기 어린 눈동자와 사나운 이빨은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다시금 호랑이가 한 발을 더 디뎌 접근했다. 이제 혁성의 두려움은 극에 달했다. 정신이 멀쩡한 채로 다리가 이빨에 뜯겨 나간다는 생각이 들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이 혁성, 이렇게 갑니다… 흑흑…….’
그런 눈물에 호랑이가 함께 안타까워해 줄 리는 만무했다. 다시금 성큼 한 발을 내딛자 혁성은 공포에 질린 채 다리가 풀려 그만 오줌을 지렸다. 천선부주의 손자여서 그렇지 아직은 어리다 할 수 있는 15살이었다. 바지가 젖어가는 것도 모른 채 혁성은 떨어댔다.
으르르릉-
중저음으로 쫙 깔리는 소리가 위압적이었다. 거의 마지막 경계를 나타내는 소리인 듯싶었다.
‘이젠 정말 죽었구나.’
혁성은 눈을 꼭 감았고 호랑이는 도약하여 앞발로 상대를 기절시킬 요량으로 뒷다리를 구부리는 순간이었다.
“어이∼ 이봐, 거기 호랑이 친구∼”
멀리서 큰 소리를 지르며 표영이 부랴부랴 달려왔다. 혁성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사부다, 이제 살았구나.’
사부를 만나고 이렇게 목소리가 반가워 보긴 처음이었다. 호랑이도 산을 울릴 만한 외침이었던지라 일순 동작을 멈추고 소리난 쪽으로 시선을 돌려 새로운 적에 대비했다.
“뭐 하는 거야∼ 설마 내 제자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표영이 마지막에 아니겠지라는 말을 할 때는 이미 호랑이 앞에 이르러 있을 정도였다. 그 신법의 빠름에 혁성도 놀라고 호랑이도 놀랐다. 특히 호랑이는 표영을 대하자마자 온몸에서 품어져 나오는 살기에 그만 질려 버리고 말았다. 이미 표영은 견왕지로의 7단계를 모두 완수한 상태였기에 숲 속의 제왕이라고 불리우는 호랑이라도 솔직히 개, 고양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왜 여기에서 어슬렁거리는 거냐? 내 제자가 그렇게 맛있게 보이든?”
호랑이는 이미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간파한 상태라 꼬리를 내린 터였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하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임도 본능적으로 자각했다. 호랑이는 앞발을 들더니 뭐라고 뭐라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