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63장 (164/199)

 # 163

163.

을휴를 비롯한 모두는 비로소 깊이 후회했다. 그들은 표영의 나이가 많지 않고 단지 그 명성만 우연찮게 날린 것이라 생각해 왔지만 지금에서야 부주가 왜 그토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지, 왜 혁성 공자를 제자로 보내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을휴가 대표로 허리 숙여 사죄했다.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행동한 점 용서하십시오. 저희는 이 길로 천선부로 돌아가 부주께 우리의 행동을 솔직히 말씀드리고 책망을 기쁘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혁성 공자님께서도 이처럼 훌륭한 사부님을 모시게 된 것은 행운임을 알았습니다. 부디 큰사람이 되도록 많은 가르침을 바랍니다.”

을휴는 말을 맺고 나자 그동안 기다리며 갈등하며 심기가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오히려 홀가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표영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젠 표영이 보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하, 좋아, 역시 천선부는 마음에 들어.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내가 섭섭하지.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내기를 하는 게 어떨까?”

“내기라뇨?”

“음… 그러니까 우리가 무공을 겨루어서 지게 되면 상대방의 요구를 하나씩 들어주는 거야. 혹시 자네들이 이기면 혁성을 데리고 가게 할 뿐만 아니라 진인께도 아무 문제 없이 말씀을 전해주겠네.”

을휴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정말이십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내가 이 나이에 농담하게… 험험.”

나이 운운하다가 표영은 상대들이 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느끼고 헛기침으로 때우며 말을 이었다.

“험험, 그러니까 전혀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단 말이지. 대신 내가 이기면 내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것인데 그게 좀 어려워서 말이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을휴를 비롯한 천강대원들은 뜻밖에 일이 쉽게 성립되려는 듯하자 내색은 크게 하지 않았지만 모두 기뻐했다. 서로 의도 상하지 않고 매끄럽게 일이 마무리될 것이 분명했다.

‘비록 구주신개의 명성이 자자하긴 해도 우린 대천선부의 천강대가 아니던가.’

‘천강칠혼진이라면 충분히 맞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감을 나타내는 데는 천강칠혼진이라는 진에 통달해 있기 때문이었다. 천강칠혼진이란 건곤진인 오비원이 직접 창안한 검진으로 일곱 명이 기본 단위를 구성해 적을 맞도록 되어 있다.

그 속에는 팔괘와 태극의 변화가 연환되어 수레바퀴처럼 물려 펼쳐지는데 서로 교차하면서 일곱이 십사가 되고 다시 이십팔이 되듯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증산되는 묘력을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이것을 두 개의 검진으로 형성해 펼치게 될 시엔 순식간에 네 배의 힘을 얻게 되는데 가장 완벽하게 구사될 땐 열네 명의 천강대가 오십육 명의 합벽된 힘을 보이게 된다.

특히 천강대는 오비원이 혁성을 심히 아끼고 사랑하여 직속에 두었던 인물들로 구성된지라 각자의 무공이 결코 약하지 않았다.

“방주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부족하지만 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을휴는 겸손한 어투로 말을 맺은 후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방주님께서 원하시는 요구는 무엇입니까?”

“음… 내가 원하는 것은… 이걸세.”

표영은 말과 함께 손으로 두 번째 호리병을 두드렸다. 천강대도 구주신개의 별호와 호리병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금세 얼굴이 심각해졌다.

“어때, 내 요구가?”

을휴는 쉽게 대답하기 어려워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말했다.

“자, 잠깐만 상의할 시간을 주십시오.”

표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을휴는 대원들과 빙 둘러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기 시작했다. 의견은 분분했다.

그냥 포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이기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혁성 공자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점차 대세가 받아들이자는 쪽으로 기울었고 그와 같이 결정났다.

“좋습니다, 저희가 패할 경우 기꺼이 받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일단 적당한 장소로 옮기도록 할까? 제자 녀석을 혼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 같으니 서두르는 것이 좋겠어.”

표영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풍운보를 시전하여 바람처럼 이동하자 14인의 천강대원들도 신형을 뽑아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제법 평평한 지형을 이룬 곳에 이른 표영과 천강대는 약 5장여 정도의 간격을 두고 대치했다.

14인의 천강대는 누구의 특별한 신호가 없었음에도 스르르 움직이며 검진을 갖추었다. 동작이 매끄럽게 이어졌으며 각 사람마다의 중간에서 진법의 묘용 탓인지 기류가 회오리쳤다.

‘음… 진법을 펼치겠다는 것이로군.’

표영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진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님을 알고 아까까지 염두에 두지 않았던 타구봉을 꺼내 들었다.

‘진을 파훼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신법의 빠름과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겠지.’

표영은 진에 대해 잘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비천신공을 배우면서 개방의 타구진에 대해 배웠던 터라 그것을 염두에 두고 진을 분석했다.

하지만 엄밀히 타구진과 지금 보고 있는 천강칠혼진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개방의 무공은 대부분이 자유로움을 추구하는지라 진법에 큰 의미가 부여되진 않았다. 타구진도 그 위력에 있어 오묘한 변화보다는 다수의 힘을 통합하는 쪽에 무게가 실려 있어 정밀한 검진과는 비교하기 힘든 것이었다.

‘먼저 외부를 돌며 건드려 보도록 하자.’

표영은 검진에 포위되면 결코 이롭지 못할 것임을 알고 풍운보를 시전하여 오른쪽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러자 천강칠혼진은 마치 한 덩어리가 된 듯이 스르르 움직이며 전방과 왼쪽 측방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검기가 매섭게 쏘아지는 것이 결코 한 사람의 힘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위력적이었다.

‘힘을 한데 실어 보내는 것이로구나.’

검진의 무서움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지금처럼 표영이 오른쪽으로 돌 때 전방과 왼쪽을 파고든 검은 단순히 두세 사람이 내지른 것이었지만 그 위력은 뒤쪽에서 받치고 있는 이들이 힘을 연합해 밀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일검이 십검이 되는가 하면, 혹은 일검이 칠검이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표영은 왼손으로 장력을 발출하여 측면 공격의 기세를 약화시켰고 그와 동시에 앞에서 다가오는 검을 타구봉으로 감아 밑으로 뿌리치고 곧바로 공중으로 치솟아 한 바퀴 회전하고서 내려섰다.

땅에 발이 닿는 순간 이미 검진은 다시 변형을 이루었다. 뒤쪽에서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담당하던 검수가 이젠 공격 선봉으로 전환하여 찔러온 것이다. 표영은 발끝이 닿자마자 그대로 튕겨내며 이번엔 수평으로 이동했다. 풍운보 중에서 가장 펼치기 까다롭다는 풍운산화(風雲散花)였다.

풍운보를 익힘에 있어서 마지막 관문인 풍운산차는 꽃이 흩날리듯 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방금 표영이 보인 것처럼 위에서 수직으로 빠르게 떨어지다가 지면에 닿자마자 원하는 방향으로 수평 이동하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신법에 천강대의 공격은 헛손질로 빗나가고 말았다. 더욱이 예상 방향에 따라 다음 공격이 움직이는 것이라 땅을 튕겨 위로 솟구칠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대비한 이들은 표영의 몸이 전혀 다른 곳으로 튕겨져 가자 일순간 당황했다.

‘개방은 예로부터 신법에 능하다고 하더니 명불허전이로구나.’

‘나이 서른도 되지 않았건만 다른 건 몰라도 신법만큼은 부주님을 능가하는 것 같지 않은가.’

고수들 간의 대결에서는 찰나가 모든 승부를 점하게 되는 법이다. 표영은 비로소 선기를 빼앗고 타구봉으로 진의 중간을 파고들었다. 세 번의 격돌이 지난후 가장 변화가 느린 곳이 사실은 중간 지점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최고의 기재이면서도 만성지체로 인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던 표영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걸인의 길을 통해 온전한 깨달음을 얻어 만성지체를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비천신공의 진수까지 터득한 표영이었다. 짧은 격돌이었지만 표영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타구봉법 중 전(纏)자결을 이용해 성급히 가로막는 검들을 얽어맨 후에 곧바로 인(引)자결을 펼쳐 검을 끌어당겼다. 현묘한 타구봉의 묘용에 중간 지점에 있던 천강대원 다섯이 혼란에 빠져 타구봉에 이끌려 흔들거렸다. 늦게나마 검진이 스르르 변화하며 좌우측에서 네 개의 검이 표영의 어깨와 허리 쪽을 겨냥하고 짓쳐들었다.

표영은 인자결로 끌어당기던 힘을 일순간 크게 증폭시키며 뒤로 물러났다가 갑자기 힘을 빼버렸다. 그 움직임은 순간적으로 움직인 터라 좌우에 밀려들던 검은 타구봉에 이끌려 온 중간 지점에 있던 다섯 명의 천강대원의 좌우측을 공격하는 꼴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런 변화는 너무나 촉망 중에 일어났고 짓쳐드는 검의 기세는 너무나 거세 중도에 멈출 수 없게 돼버리고 말아 다섯 명은 꼬치처럼 꿰뚫릴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이때 표영이 순간적으로 끌던 힘을 빼버렸기에 그들은 반대로 뒤로 급격히 넘어졌고

그로 인해 중도에 검과 검이 부딪쳤을 뿐 사상자는 나오지 않게 되었다. 만일 표영이 힘을 유지했다면 다섯 명 중 최소한 두 명 정도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고 나머지 세 명도 큰 부상을 입었을 터였다.

‘대단하구나.’

선처는 고마웠지만 이대로 승복하기엔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이미 다섯은 엉덩방아를 찧은 데다가 자신들은 죽는 것이라 생각했던 터라 검진은 그 형태가 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표영은 풍운보 중 회풍낙일(廻風落日)로 땅을 스쳐 가며 회오리를 일으키는 가운데 검진의 외곽을 돌았다. 회풍낙일은 거센 바람이 회오리쳐 태양을 떨어뜨린다는 뜻을 지녔는데 실제 태양을 떨어뜨린다는 의미보다는 뿌연 연기를 일으켜 태양이 보이지 않도록 한다는 말이 옳다 할 수 있었다.

주로 다수의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인데 표영은 일거에 마무리를 지을 요량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뿌연 흙먼지가 삽시간에 피어오르며 눈앞의 시야를 가렸다. 검진이 아무리 견고해도 상대방의 위치를 알지 못하면 허사인 법인데 지금은 검진마저 불완전한 상태인지라 천강대는 일순 혼란에 빠져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윽!”

“컥!”

“읍……!”

이곳저곳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표영이 타구봉으로 스쳐 가며 혈을 짚은 까닭이었다.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비명이 이른 곳 근처에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아도 쉽게 검을 내뻗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동료를 찌르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간헐적으로 들리던 비명 소리가 열네 번이 채워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천강대는 그대로 몸이 굳은 채 서 있었는데 어떤 이는 허리를 숙인 자세로, 어떤 이는 검을 뻗은 자세로, 또 다른 이는 몸을 뒤로 젖히다가 혈이 찍혀 그대로 자세를 유지하고 있기도 했다.

서로는 서로를 확인하며 확연히 패배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생각했던 것보다 적어도 다섯 배 정도는 강한 것이다.

표영은 타구봉으로 허벅지를 두드려 가며 히죽거리면서 그들 사이사이를 걸었다.

“어떤가? 이 정도면 혁성의 사부 노릇을 하기에 부족하지 않을까?”

“방주님의 뛰어난 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군요. 저희들의 깨끗한 패배입니다. 아까 범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을휴의 말을 듣고 표영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허리를 숙여 바닥에서 열네 개의 작은 돌을 집어 들었다.

“좋아, 그럼 혈을 풀어볼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표영이 살짝 움직이며 손에 든 돌을 뿌리자 각기 흩어져 천강대원들의 몸에 닿았고 마혈을 제압했던 것이 해제되었다. 혈을 푸는 실력만으로도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자, 이제 약속한 것을 실천에 옮겨보도록 해야겠지? 하하하.”

혈이 해제된 것에 놀라워하는 것도 잠시, 천강대의 얼굴은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남아일언 어쩌고저쩌고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건 벗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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