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
“공기 맑고 경치 좋고∼ 제자야, 너는 어떠냐?”
“네? 네, 좋은데요…….”
혁성은 천강대에 집중하다가 갑작스런 질문을 받자 작게나마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이런, 대수롭지 않은 질문에 놀란 듯한 반응을 보이다니… 이렇게 긴장하면 될 일도 안되는 법이다. 용기를 가져라. 혁성!’
혁성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곳이 노송봉이라 불리는 이유를 이렇게 가까이 이르고 보니 더욱 실감하겠습니다. 봉우리 끝의 모양이 멋들어진 소나무가 세워져 있는 것 같은걸요. 마치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 듯합니다.”
“하하, 그렇지? 정말 멋지구나, 아참∼”
말을 하다가 표영은 잊고 있었던 것이 막 생각났는지 손으로 이마를 쳤다.
“이런이런, 내 정신머리 좀 보게나. 하마터면 깜빡 잊을 뻔했구나.”
표영은 혁성에게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내 급히 다녀올 데가 있으니 너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 아니, 아니지, 내가 늦게 오면 넌 당황하면서 날 찾아다닐 텐데 이곳에는 험한 짐승들이 많으니 대책을 세워놓고 가야겠구나.”
느닷없는 변고에 혁성이 어깨를 으쓱이며 황당해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사부님?”
“응, 사실 아까 산에 오르기 전에 여우들의 냄새를 맡았거든 조금만 기다리거라, 내 여우를 잡아오도록 하마.”
그렇게 말하며 표영은 손을 뻗어 혁성의 마혈을 찍어버렸다. 혁성으로서는 너무 급작스럽고 어이없는 행동인지라 여태껏 가끔씩 보여주었던 장난질을 하는 것이라 여겼다. 아혈이 찍힌 것은 아닌지라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 사부님. 여우를 잡으러 가시면 함께 가도 되는 걸 가지고 왜 그러세요? 장난은 그만 하세요.”
“하하하, 장난 아닌데, 진짜야. 하하하… 너, 장난하는 걸로 생각했나 보구나?”
표영은 약을 올리듯 배시시 웃었다.
휘이잉∼
찬바람이 혁성의 온몸을 휘감았다. 가슴 가득 허망함도 밀려들었다. 사부가 과연 맞는지, 이런 황당한 짓을 하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저 미소는 과연 무엇인지 삶의 희망이 무참히 짓밟히는 듯했다.
“사부님.”
묵직한 목소리로 진중하게 혁성이 입을 열었다. 그 어떤 때보다도 진지했다.
“사부님, 그만 하십시오. 저 화났습니다.”
표영은 혁성을 보며 한쪽 눈을 찡그려 주며 무마시켜 버렸다.
“하하하, 재밌잖아.”
퀭∼
대체 무엇이 재밌단 말인가. 혁성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표영은 주변을 싸돌며 칡넝쿨을 뽑아 올렸다. 혁성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표영은 칡넝쿨로 혁성을 뒤쪽에 있는 굵은 나무에 친친 묶어버렸다. 혁성의 얼굴색은 이젠 하얗게 질려버렸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할아버지께서 부탁하셨을 때 제게 이렇게 하라고 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오비원을 들먹이며 이 사태를 모면해 보려는 혁성이었지만 애초 표영에게 그런 말이 통할 리 만무했다.
“하하, 솔직히 말해 너무하긴 하지. 하지만 어쩌겠느냐? 난 너의 사부고 넌 내 제자인데 말이다. 아니꼬우면 기억해 두었다가 너도 나중에 네 제자에게 그렇게 하려무나.”
단단히 매듭을 진 후에 다시금 넝쿨의 탄력을 확인한 후 이 정도면 됐다 싶었는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라. 내 금방 다녀오마. 이 사부가 보고 싶다고 울지 말고, 알겠지?”
“정말 이러실 겁니까? 대체 여우가 어디에 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이제 장난은 그만 하시고 풀어주세요.”
하지만 표영은 아무 대꾸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혁성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혁성으로서는 황당함 그 자체였다.
“사부님∼ 잠깐만요. 사부님∼ 야이, 이봐, 사부∼ 사부야∼”
혁성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나왔다. 천강대의 기습이 예상되는 노송봉은 아직 이르고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한 사부는 자신을 묶어두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흑흑…….”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해서 또 눈물이 났다.
노송봉!
구부러진 소나무를 연상케 하는 형상이 인상적인 이곳 뒤쪽으로 천강대는 자리했다. 특히 그들이 자리한 곳은 지형적으로 움푹 들어간 곳일 뿐만 아니라 그 앞쪽으로 수풀이 우거져 몸을 숨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대주인 을휴를 비롯한 12인은 신호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에 없는 2명의 천강대원은 지세를 한눈에 파악하기 쉬운 위치에 숨어 연결하여 신호를 전달하기로 약속된 상태였다.
만일 표영과 혁성이 포착되면 반사경으로 빛을 비추어 현재의 거리와 상황을 그들만의 암호로 표시하도록 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감한 일이야.’
반사경의 신호를 기다리며 을휴는 갈등했다. 그는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온 얼굴에 두터운 눈썹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런 외모의 특성으로 강직한 인상을 풍겨내고 있었다. 그 강직함은 단순히 외모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성품에 따라 얼굴이 변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의 성품은 강철 같은 굳은 의지를 지닌 터였다.
‘휴우∼’
그런 그가 지금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갈등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 일이 내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대상이 오혁성이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이 따위 행동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상대해이 할 자는 지존 건곤진인의 가장 절친한 친구(엽지혼)의 제자이자 현 개방의 방주이다. 그러나 마음은 꺼림칙해도 지금에 와서 돌이킬 생각은 없었다. 혁성은 천강대 모두에게 너무도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혁성의 곁에 서게 된 것은 혁성이 5살이 되어서부터였다. 부주 오비원은 혁성을 끔찍이 아껴 천강대를 혁성의 개인 호위대로 삼았고 그때부터 그들에겐 혁성은 직계 상관이면서도 아들과 다름없는 친밀감 속에 지내온 터였다.
‘오백님께 이미 허락을 맡은 터이니 스스로 너무 자책하지 말자.’
을휴는 천선부에서 나오기 전 이 문제를 혁성의 아버지인 오백에게 물었었고 오백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면서 허락해 주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을휴와 천강대가 간덩이가 붓고 혁성을 아낀다 해도 이렇게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을휴는 자신의 마음이 그러하니 마땅히 천강대원들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라 여겼다. 그는 대원들을 독려할 위치에 있음을 알고 있기에 갈등하거나 염려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흐트러진 마음을 붙잡기 위해 작고 굵은 목소리로 일깨웠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잊지 말도록! 괜히 연약한 마음을 품는 자가 있다면 내가 용서치 않겠다.”
강인한 얼굴에 어울리는 굳센 음성이었다. 모두가 마음을 새롭게 하고 긴장 속에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한 일 다경 정도가 지났을까? 한줄기 바람인 듯 뿌연 것이 흩날리는가 싶더니 세 개의 호리병을 달랑거리며 초라한 거지가 모습을 나타냈다.
“오호∼ 여우 양반들, 여기서 다들 뭣들 하시나?”
당연 등장한 거지는 표영이었다. 표영이 시선을 두고 있는 곳은 천강대를 내려다보는 곳인지라 모두는 이 갑작스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굳어버렸다. 관측지로부터 어떤 신호도 받지 못한 데다가 정확히 위치가 파악되어 기습은커녕 우스운 꼴을 당해 버린 것이다.
을휴를 비롯한 모두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더욱이 바로 코앞에 이르러서야 감지를 했다는 것이 더욱 부끄러웠다. 무기를 뽑아 들고 느닷없이 달려들기에도 뭔가 어울리지 않는 듯한 우스운 상황이었다.
‘제길.’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그제야 마음을 추스른 을휴가 애써 어색한 기운을 지우고 포권을 했다.
“천선부의 천강대 을휴가 개방 방주님을 뵙습니다.”
표영은 대답 대신 큰 소리로 웃어주었다.
“하하하! 재밌군, 아주 재밌어.”
표영의 웃음은 크게 울리진 않았지만 미묘하게 마음을 파고들어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천음조화를 시전하여 고의로 심정을 흔들어놓은 까닭이었다.
“하하, 당황하는 것을 보니 그래도 아직 순수하단 말씀이야. 설마 이곳까지 혁성을 호위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나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인데 그럼 섭섭하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저희는…….”
을휴는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솔직하게 털어놓고 맞서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방주님께 어려운 부탁을 드릴까 해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을휴가 거기까지 이야기할 때 어느덧 관측을 위해 나가 있던 두 명의 천강대원이 무리 중으로 합류했다. 뒤쪽에 있던 이들 중 누군가가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하하, 어려운 부탁이라… 난 원래 어려운 부탁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무례인 줄은 압니다. 하지만 혁성 공자님은 개인적으로 개방에 머물길 원치 않으심을 알기에 다시 모셔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어험, 내 제자는 거지 생활을 타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적응을 잘하고 있는데 헛소리를 내뱉으면 곤란하지. 음… 혹시 자네들이 개방에 들어오고 싶어서 말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하하, 그런 문제라면 어렵게 말할 필요 없어. 우리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해보자구.”
을휴는 무림의 지도급 인사 중 이렇게 자유롭게 말하는 이는 처음 대하는지라 일순 말문이 막혔다.
“험험, 그러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은 공자님을 저희에게 인도해 주셨으면 하는…….”
“아하∼ 그런 말이었군. 난 또 단체로 개방에 들어오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지. 그래서 속으로 건곤진인에게 미안해하던 참이었는데 그게 아니라니 섭섭하면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군. 근데 지금 그대들의 그런 발언은 건곤진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닐 텐데…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딴 식으로 싸가지 없이 말하는 것이지?”
점점 말의 강도가 높아져 가는 가운데 을휴가 답했다.
“공자님이 저희를 따라 부에 다시 들어가게 되면 방주님께서 적절히 부주님께 말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뭣이 어쩌고 저째! 이것들이 아주 보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네그려. 차라리 날 죽여라. 이놈들아.”
표영은 냅다 바닥에 눕고서 윗옷을 걷어올리고는 연신 외쳤다.
“차라리 내 배를 째라, 째∼ 째란 말이다.”
을휴와 천강대는 좌충우돌하는 돌발 행동들에 당황하며 몸 둘 바를 몰랐다. 하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뭔가 아귀가 자꾸 어긋나는 것이다.
을휴가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저희는 정당하게 요구를 드리고 싶… 윽…….”
을휴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표영이 을휴의 손을 잡고 누운 채로 회전하여 손을 꺾은 후 등 뒤로 돌아 다른 한 손을 목 근처 사혈에 가만히 놓은 것이다. 설마하니 이렇게 급작스럽게 개방의 방주씩이나 되는 자가 손을 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지라 놀라면서도 분분히 무기를 뽑아 들며 외쳤다.
“무슨 짓이오? 정파인으로서 암습을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단 말이오!”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작자 같으니, 어서 손을 놓으시오.”
“개방의 방주란 이름이 고작 이 정도였단 말이오?”
“개방의 명성에 방주가 먹칠을 하다니…….”
그들은 각기 온갖 말로 표영의 행위를 질타했다.
“껄껄껄, 재밌는 친구들이로군.”
표영은 화를 내기는커녕 소리 내어 웃어 보인 후 을휴를 잡았던 손을 풀고 앞쪽으로 밀어 보내주었다.
“그렇지. 아무렴 내가 한 행동은 옳지 못했지, 맞아. 정확히 말했어. 내가 정파인으로 암습을 했다는 것은 사실 매우 부끄러운 짓이거든 하지만 그대들이 이곳에 모여모여 암습하려고 한 것은 매우 정당하단 말씀이야. 더욱이 내가 드러누워 있다가 손을 쓴 것은 비열한 짓이지만 그대들이 천선부주의 눈을 가리고 내게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위대하고 정의롭냐 이거야. 정말 감동의 눈물이 흐르려 하는군. 하하하, 분명 내 행동은 개방 방주로는 어울리지 않고 개방의 명성에 먹칠을 한 것이지만 그대들의 암습은 천선부를 더욱 빛내는 것이니 역시 천선부의 천강대는 훌륭하고 건곤진인은 복받은 분이란 말씀이야, 하하하.”
그 말을 들으며 을휴를 비롯한 모두는 표영이 왜 느닷없이 그런 돌출 행동을 했는지 깨닫고 수치심에 얼굴이 귀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비열하다는 말은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되는 말이지. 그 정도 말을 하려면 분명 자신을 돌아보고 나서 해야 하는 것이 순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