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161.
‘절대 사부처럼 살진 않는다.’
어디서 솟아난지도 모르는 강한 용기와 의지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오면서 수도 없이 얻어터지고 가끔 뼈마디가 부러지기도 했었다.
그뿐인가? 그럴 때마다 한 알씩 내민 때구슬을 눈물을 흘리며 씹어댄 것이 벌써 열 알을 넘어서고 있었다. 열 개씩이나 그 험악한 것을 먹었다면 어지간히 그 맛에 적응할 만도 했지만 때구슬은 먹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우려냈고 신선했기에 매 때[時]마다 깊은 좌절과 고뇌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혹여 신선하다는 말이 안 어울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웬일인지 혁성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선함’이란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새록새록 새로운 맛을 안겨주는 때구슬을 먹을 때마다 혁성은 ‘내 다시는 사부에게 반항하거나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했지만 다음 날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다시금 자유에 대한 혁명의 싹을 키웠다.
지금 주먹밥을 움켜쥔 혁성에게 남은 희망은 오로지 한 가지 <천강호위대>뿐이었다. 솔직히 천강호위대라는 희망도 지금까지의 전례를 보아 괴물이자 괴짜인 사부를 떨치고 벗어나기엔 희망이라 하기도 민망한 일이었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끙∼’
이렇게 애써 중얼거려 보지만 엄밀히 따져 보건대 어찌 그 고난과 때구슬 복용이 본전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이런 식으로라도 위로해 보려는 마음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혁성의 마지막 희망인 천강호위대는 다름 아닌 천선부에 있을 때 그를 따르던 14인의 호위들을 일컬음이었다. 그들은 혁성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이들이었는데 이번 사태가 나기 전 이런 경우를 대비해 따라오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을 이 마을에서 발견한 것이다. 언제부터 따라왔는지 모르지만 생선 장수로 위장해 있던 을휴를 보며 얼마나 기뻤었는지 모른다. 이제껏 오면서 시간을 끌었던 것이 헛된 수고만은 아니게 보였다.
‘좋아, 이번이 마지막이다. 어차피 앞으로의 내 인생은 순탄치 않을 것이니 최악의 상황으로 더 떨어질 것도 없지 않은가. 조금 더 용기를 갖자.’
혁성은 이를 악물자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주먹밥이 짓이겨져 머리를 내밀고 올라왔다.
‘아차∼’
바로 먹지 않으면 땅바닥으로 떨어질 찰나였다. 혁성은 황급히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손을 올려 짓이겨진 주먹밥을 입안으로 우겨넣었다.
한마디로 그 상황을 표현해 보자면.
<혁성, 거지 다 됐다> 정도일까. 너무도 자연스런 동작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혁성 자신은 그런 사실을 크게 자각하지 못했다. 은연중에 상거지로 변해가고 있는 스스로의 놀라운 발전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광경을 아무도 못 본 것은 아니었다. 혁성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더러운 주먹밥을 먹어보겠다고 황급히 낚아챈 모습을 보며 한마디씩 뱉어냈다.
“쯧쯧쯧∼ 많이 굶었나 보네.”
“어린 녀석이 안됐군.”
개중엔 동전도 떨어뜨리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쨍그랑∼
“만두라도 사다 먹어요. 어찌 어린 나이에 거지가 되었누… 불쌍하기도 해라.”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나 보네. 하늘에서 얼마나 슬퍼하실까, 쯧쯧.”
주먹밥을 입 안에 우겨넣던 혁성은 맛있게 배를 채우던 주먹밥을 입에 문 채 씹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떼지도 못한 채 한동안 얼이 나가 동전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방금 들었던 말들이 머리에서 계속 윙윙거렸고 눈이 뿌옇게 변하며 동전이 흐려졌다. 굵은 눈물이 눈썹에 매달릴 새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몸이 흔들리면서 눈물이 주먹밥 위로도 떨어졌고 그것을 혁성은 무의식적으로 들어 올려 입에 넣고 우적거렸다.
“흑흑…….”
서러움에 겨워 흐느끼자 이젠 지나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우르르 몰려와 혁성을 빙 둘러쌌다.
“에구, 이런 어쩌다 이렇게 거리로 나앉게 된 거여∼”
“어디 몸이라도 아픈 것은 아닌가?”
“쯧쯧, 불쌍도 하지…….
사람들은 제 각기 한마디씩 하며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혁성은 그 말을 들으며 더욱 서러워져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저 만치서 사부 표영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을 보며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닦았다.
한편 표영은 혁성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 가운데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이런 바보 같은 녀석, 이렇게 약골이라니.’
표영은 혁성에게 이르러 손바닥으로 머리를 마구 갈겼다.
파팍! 파팍! 파파팍!
“이놈아, 어디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울고 있는 게냐! 어서 그치지 못해!”
사람들은 갑작스레 더 큰 거지가 나타나 불쌍한 어린 거지를 패는 것을 보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아올랐다. 마치 자기 자식이 얻어맞는 것같이 느꼈다.
“어디서 사람을 함부로 때리는 거냐!”
“이 나쁜 거지 같으니! 내게 혼이 나고 싶은 것이냐!”
“가만두면 안 되겠군!”
표영은 때리던 손을 멈추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서 말했다.
“제 말을 먼저 들어보시고 저를 패든지 하십시오. 사실 이 녀석은 부잣집 아들이랍니다. 하지만 집안에서 하도 공부하라고 이야기하니까 집을 나온 것이지요. 저는 매일 돌아가라고 얼마나 열심히 다그치는지 모른답니다. 하지만 고집이 얼마나 센지 도무지 말을 듣지 않더란 말입니다. 게다가 고질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꾸만 울어서 동정심을 자극해 밥을 얻어먹고 놀고 먹으려는 수작을 피우는 녀석이랍니다. 저도 제발 제 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단 말입니다.”
단 한차례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은 표영의 말에 혁성은 돌덩이에 머리를 맞은 듯 멍해져 버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 흐르던 눈물도 뚝 그칠 정도였다. 그와 함께 사람들은 그제야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혁성을 보고 다그쳤다.
“이 사람 말이 맞느냐?”
“빨리 말해 보아라.”
혁성은 개방의 방주이자 자신의 사부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지라 너무도 어이가 없어 일순 대답을 못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손바닥으로 머리를 내려쳤다.
“어린놈이 이렇게 싸가지가 없다니!”
“이놈아! 죽어라, 죽어∼.”
“기가 막히는구나!”
“하마터면 속을 뻔했잖아?!”
“부모님 속 좀 그만 썩이고 어서 들어가라. 이놈아.”
파파파파파파팍……!
손바닥으로 머리를 연타로 맞은 혁성은 정말이지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죽고 싶었다. 아마도 표영이 말리지 않았다면 머리가 성하지 않았으리라.
“제가 잘 타일러 볼 테니 너무 뭐라고들 그러지 마십시오. 저놈도 사람인데 제가 성심성의껏 대하면 바른 생각을 품겠죠.”
마치 자신이 죄를 진 듯 겸손해하는 표영에게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정말 고생이 많으시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뭘요, 다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아직 세상엔 좋은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그럼 살펴 돌아가십시오.”
사람들이 돌아간 후 표영이 혁성 옆에 앉았다.
“이놈아, 그새를 못 참고 청승맞게 울고 있었더란 말이냐.”
혁성은 정말 이 인간이 사부가 맞단 말인가라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기가 막혔다. 하지만 여기서 따져 봐야 결국 자기만 손해라는 것을 혁성은 잘 알고 있었다. 기분은 더럽지만 빨리 잊는 게 정신 건강에 여러모로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제길.’
이 말은 속으로 중얼거린 후 말했다.
“그나저나 어디 다녀오신 건가요?”
표영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삶은 개 다리였다.
“개 다리다. 널 위해 이 사부가 특별식으로 준비했단다. 고맙지 않냐?”
“고, 고맙네요.”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내뱉으며 혁성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용케도 구하셨네요? 훔치는 데 힘은 들지 않으셨나요?”
표영의 손바닥이 여지없이 혁성의 머리를 갈겼다.
팍!
“떼끼놈! 아주 사부 알기를 길가에 떨어진 돌덩이같이 여기는구나. 버르장머리가 없어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 사부가 그렇게 무식하게 보이더란 말이냐!”
혁성은 ‘당연하죠’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건 말이다. 뭐 좋은 거 없나 하고 길을 가는데 누렁이 한 마리가 있지 않겠니? 그래서 이 사부가 이렇게 말했단다. ‘네 이놈, 어서 다리 한 짝을 내놔라’ 그랬더니 이놈이 황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 자리에서 다리를 뜯어내지 않겠냐. 난 솔직히 그냥 해본 말이었거든. 설마 하니 그렇게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단다. 그저 군기나 잡자고 생각했을 뿐이야. 근데 누렁이 녀석은 장난이 아니더란 말이다. 절룩거리면서 기어코 다리 한 짝을 삶아서 가지고 오는 것이지 뭐냐. 그러면서 이러는 거야. ‘이 한 몸 다 드려도 부족한데 너무 송구스럽습니다요’라고 하면서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것이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이 정도도 사실 감동했다. 너도 힘들 텐데 앞으로는 몸 간수 잘해라, 애썼다’라고 말하고 온 거다.”
혁성은 앞날이 암담하기만 했다.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야, 정상이 아니란 말이다.’
그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사부 표영을 바라보았다.
‘사부, 제발 정신 차리시오.’
사실 표영이 가지고 온 개다리는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먹으라고 준 것일 뿐이기에 의기양양해질 것까진 없었지만 표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기고만장하게 말했다.
“하하하, 이 녀석. 감명받은 게로구나. 하긴 이렇게까지 사부가 챙겨주는데 감명받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 자, 우리 다정하게 나눠 먹자꾸나.”
표영은 혁성 옆에 앉아 살을 한 움큼 뜯어 건네주었다.
“차라리 뼈를 이 등분해서 주세요.”
“떼끼놈! 살은 뼈를 잡고 먹어야 제 맛인 게야. 이놈이 사부하고 같이 맞먹으려고 하는 것이냐?”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그냥 살만 먹을게요.”
혁성은 입에 고기를 넣으며 마음으로 더욱 각오를 다졌다.
‘꼭 벗어나야만 한다. 끙…….”
제6장 천강대의 등장
내가 믿는 건 오직 천강대뿐.
그들은 강하다.
그들은 무적이다.
그들은 산도 가르고 바다도 뒤엎는다.
그들은 나를 구해낼 것이다.
그들은 나의 꿈이요, 소망이다.
부탁한다, 천강대여.
- 소망을 간직한 혁성이
***
‘이때쯤이면 나타날 법도 한데.’
산 고개를 넘어가던 중 혁성은 조바심을 내며 천강대를 기다렸다. 얼굴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함으로 가장했지만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보아 이때쯤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 긴장되었다. 혁성에겐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랄 수 있었다.
‘나는 반드시 벗어나야만 한다.’
물론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뒤에 따를 사부 표영의 보복이 얼마나 처절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일일 터였다.
그렇기에 마지막이라는 결의를 다지며 대응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시야 가득 노송봉이 들어왔다. 혁성은 마을을 지날 때 상인으로 위장하고 있던 천강대의 주장이자 1호인 을휴가 손바닥에 ‘노송봉’이라고 적어 보여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노송봉 정상에 거의 이르게 되면 분명 기습이 실행될 것이었다. 거리상 조금 남았지만 마음의 준비는 지금부터 해두어야 했다.
표영은 혁성의 이런 암중모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유롭게 휘파람까지 불며 경쾌하게 앞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