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58장 (159/199)

 # 158

158.

“자네에게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네. 솔직히 그 녀석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거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그 녀석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거든 아무 부담 없이 거절해도 좋네. 괜히 내 체면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네, 알겠나?”

“그럼요, 개방에 맞지 않는다면 전 그냥 두말 않고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나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해 주니 내 마음도 편하군.”

“아참, 그런데 혁성을 만날 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시종일관 진지함을 유지하던 표영이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그건 표영이 모종의 계획을 수립함을 의미했다.

“뭔가?”

“제가 혁성에게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진인이나 그 아이의 부모라 할지라도 저의 편이 되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기가 힘드시다면 전 이 자리에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워낙에 단호하게 매듭짓는지라 오비원은 약간 흠칫했지만 크게 대수로울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흔쾌히 답해주었다.

“좋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네.”

“하하, 고맙습니다.”

“고맙긴, 자, 그럼 함께 가세나.”

천응각.

이곳은 천선부 내에서는 외부에서 온 귀빈을 접대하는 곳으로 쓰이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 혁성은 차분히 뒷짐을 지고 30도 각도로 고개를 들고서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중앙에 마련된 여섯 사람 정도가 넉넉히 앉을 수 있는 둥그런 탁자, 옆 벽면 전체에 그려진 벽화, 그리고 잘 짜인 담백한 멋을 풍기는 장식장들이 자리한 그곳에서 혁성의 모습은 또 하나의 장식품처럼 멋들어지게 어울리고 있었다.

혼기를 맞은 여인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한눈에 반해 버릴 만한 모습이라 할 수 있었고 강호 명사들이 본다면 한 마리의 고고한 학을 대하는 듯하다고 말할 만한 모습이었다.

창을 바라보던 혁성이 몸을 돌려 현관문 쪽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음… 조금 늦으시는구나.”

잔잔하면서도 또렷한 음성이었다. 평상시 혁성이라면 절대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고 목소리였다.

원래대로 하자면.

-확, 그냥 이걸!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누군 시간이 남아돌아서 이렇게 기다리는 줄 아나! 기가 막히군. 대혁성 공자를 기다리게 하다니… 나타나기만 해봐라!

뭐, 대충 이 정도라야 ‘음… 지극히 정상이로군’이라고 판정내릴 텐데 지금은 어딜 봐도 혁성의 본모습이 아니었다.

천선부 내에 누구라도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필시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큰일입니다! 공자님께서… 헉헉… 공자님의 머리가 어떻게 되신 것이 분명합니다!

또 다른 경우라면,

-네놈은 대체 누구냐? 네놈이 인피면구를 쓰고 혁성 공자님의 흉내를 낸다고 우리가 속을 줄 알았더냐! 어리석은 놈, 혁성 공자는 네놈처럼 그렇게 예의 바르지도 않고 학식 있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어서 인피면구를 벗고 내 검을 받아라!”

혹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병은 불치병입니다. 그리 오래 살 것 같진 않습니다.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두십시오.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처럼 혁성은 진짜 혁성이 분명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혁성은 다시금 초조한 기색도 없이 다시 창가를 향하고 고즈넉하게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기네, 들어가세.”

오비원의 음성이 현관문을 뚫고 혁성의 귀로 파고들었다.

‘때가 되었군.’

혁성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겨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다.

오비원이 먼저 들어서고 그 뒤를 표영이 따랐으며 마지막으로 오백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 미리 와 있었구나.”

오비원의 감탄의 목소리엔 ‘안 하던 짓을 하고 네 녀석이 웬일이냐’란 식의 뜻이 섞여 있었다.

“이 녀석이 바로 내 손자라네.”

그 말에 혁성이 포권을 취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오혁성이라고 합니다. 강호의 대영웅이신 개방의 방주님을 직접 뵙게 되다니 삼생의 영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표영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일순 멈칫했지만 그 찰나적인 순간에 실이 여러 개로 나열되어진 바늘을 관통하듯 상황을 이해해 버렸다. 만성지체의 천재적인 능력의 빛난 순간이었다.

정인군자 같으면서도 느끼하기 한량없는 말투에 오비원과 오백은 ‘이 녀석이 미쳤나’라는 식으로 눈을 부릅뜨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표영은 껄껄거리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오호, 예의가 몸에 바싹 붙어 있군. 역시 천선부는 대단한 곳이라니까. 강호의 미래는 자네 같은 소영웅들로 인해 밝아질 수밖에 없겠군.”

“하하, 과찬이십니다. 방주님이야말로 그 마음은 새하얀 마음을 품고 계시지 않습니까? 겉은 아무리 멋지게 꾸민들 소용없는 것이랍니다.”

혁성의 응수도 아주 훌륭했다.

“하하, 얼굴만 잘생긴 것이 아니라 말도 여간 멋지게 하는 것이 아니군.”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싸악∼ 달라진 혁성의 언행에 놀라고 있던 오비원과 오백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씩 내던졌다. 좌우지간 무슨 말이라도 해야 마음이 안정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부족한 아들을 좋게 봐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탁자 쪽으로 걸어가며 표영이 화사하게 답했다.

“하하, 부족하다니요? 제가 보기엔 매우 훌륭하게 자라나서 제가 솔직히 받아들이기 난처할 지경입니다.”

“하하… 하… 감사합니다.”

어정쩡한 웃음이 뭐가 뭔지 뒤죽박죽된 좌중을 휩쓸었다. 아마 그때 시중을 드는 시녀 둘이 차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아니면 땀을 흘려야 할지 도대체 분간하지 못했을 터였다.

“자, 표 방주, 드시게나.”

“네, 향이 구수하니 좋군요.”

그때 혁성이 인격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듯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 차는 파청난이라는 식물에서 그 진액을 추출한 것으로 오래도록 가까이 두고 마시면 오랜 수양을 쌓은 것처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차를 홀짝거리던 표영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감탄사를 발했다.

“오호! 이야기를 듣고서 보니 더욱 마음에 드는군요.”

휘이잉∼

오비원과 오백은 서늘한 한기를 느껴 두리번거리며 창문이 열렸나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바람이 들어오는 곳은 없었다. 그제야 둘은 서늘한 바람이 혁성과 표영의 중간 지점에서 생성되어 자신들에게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체 이 녀석이 무슨 속셈이란 말인가.’

‘설마 개방으로 가려고 마음을 잡은 건가? 그럴 리가… 어제만 해도 난리를 치지 않았느냔 말이다.’

오비원과 오백은 꿔다 논 보릿자루마냥 퀭하니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너무나 혼란스러워 도대체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대충 들어보니 다 옳은 말이고 좋은 소리뿐이었다. 오비원과 오백으로서는 세상천지에 좋은 이야기가 이렇게나 많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쑥덕쑥덕… 하하하… 쑥덕쑥덕… 껄껄껄…….

이것은 오혁성과 표영이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였고,

휘이양∼ 스스스… 휘이잉…….

이것은 오비원과 오백이 느끼는 스산한 분위기였다.

뭔가 이처럼 화기애애하면 ‘오호라, 일이 잘 되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만도 했지만 어찌 된 일이지 도무지 한줄기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듯해 그것이 더 이상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변화가 생긴 것은 한순간이었다. 흔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다고도 표현할 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오비원과 오백이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쩐지 황당함에도 불구하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짜악!

도무지 현재의 화기애애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일순 좌중은 우주 한가운데로 순간 이동돼 버린 듯한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그건 절대적 침묵이라고 할 만했다.

오비원과 오백이 그대로 굳어버린 채 동작을 멈춘 채 표영을 바라보고 있었고 혁성은 한 손으로 벌겋게 변한 뺨을 어루만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커져 있었다. 제일 한가한 사람은 표영이었다. 그저 씨익 웃고 있었으니 제일 한가해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느닷없이 뺨을 갈긴 이는 표영이었다.

워낙에 느닷없는 일이라 오비원과 오백은 ‘갑자기 무슨 일이냐?’ 또는 ‘무슨 안 좋은 기분이라도 든 것이냐?’ 따위의 말을 물을 생각도 못했다. 그저 서둘러 아까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을 때, 그러니까 따귀 사건이 일어나기 전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를 기억하려고 애써 보았다.

‘??*???%???’

‘??*&@?!&*???’

하지만 그게 기억날 리 만무했다. 그저 차가운 바람의 정체가 뭔지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두 사람이 아니던가.

오비원은 순간 표영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혁성에게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진인이나 그 아이의 부모라 할지라도 저의 편이 되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기 힘드시다면 전 이 자리에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었나?’

아직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그는 혁성이 어찌 반응할지 그쪽을 바라봤다.

혁성은 이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솔직히 얻어맞았을 때만 해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도무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 뒤에는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올라 다 뒤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마음을 억눌렀다. 한순간의 선택이 영영 거지가 되느냐, 아니면 행복한 나날을 보내느냐로 갈려질 판국인 것이다.

‘그래, 이것은 마지막 시험일 것이다!’

위선을 떠는 모습에 혐오감을 느낀 방주가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로선 더욱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야겠지. 그럼 제아무리 구주신개라 하더라도 날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다.’

나름의 결론을 짓자 혁성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방주님께서 저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으셨나 보군요. 제가 부족한 점이 많아 고매한 수법을 예측조차 못했습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 대답은 오비원과 오백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헉… 이럴 수가…….’

‘귀밑에 작은 점이 있는 것이 분명 내 아들이 맞건만 저 녀석이 뭘 잘못 먹었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그때 표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말했다.

“무공 시험이라니, 무슨 말인가? 아, 아까 내가 자네 뺨을 때린 것 말인가? 에이, 농담도 잘하는군. 난 그저 자네의 뺨 쪽에 날파리가 지나가기에 그것을 잡으려고 한 것이라네. 그런데 그만 도망가 버리고 말았으니 나의 무공도 아직 부족하기 그지없군.”

혁성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고 표영은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에구, 그런데 우리 개방은 자네같이 말 잘하고 인격이 사방 군데 묻어난 사람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데… 게다가 지극히 깨끗하기까지 하니 솔직히 부담스럽군. 난 자네가 말도 가끔은 더듬고 성질도 낼 줄 알고 욕도 가끔은 할 수 있길 바랐거든. 그러면 개방엔 딱 들어맞는데 말씀이야. 아쉬∼ 앗?”

아쉬… 라는 말로 미루어 분명 아쉬워… 아쉽단 말이네. 정도의 말이 될 것 같았는데 표영은 그 말을 끝내지 않고 벌떡 일어나더니 주먹을 내질렀다.

“이런 날파리 놈을 봤나!”

퍼억!

주먹은 정확히 혁성의 얼굴에 작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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