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157.
혁성에게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건 날벼락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왜 개방방주의 제자가 되어야 하죠? 다른 사람들은 천선부에 들어오지 못해 안달인데 천하제일고수의 손자가 왜 거지 소굴로 가야 하냐구요∼”
아버지 오백은 의자에 앉아 벌써 일식경(30분)이나 똑같은 하소연을 듣고 있음이었다. 혁성이 노망이라도 난 사람처럼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듣다가는 속이 터질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네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것이라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으니 넌 그리 알아라.”
“아버지, 어디 가시는 거예요? 할아버지께 말씀드려 주세요. 아니면 제가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시라고요.”
오백이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리자 혁성은 이번엔 그의 어머니 소부용에게 매달렸다.
“어머니, 어떻게 방법을 강구해 주시라니까요. 이 아들이 거지 꼴 하는 것을 이대로 보고만 계실 건가요? 정말 제 친어머니 맞으세요? 왜들 갑자기 그러시는 거예요. 내일 모레면 개방 방주가 온다면서요.”
소부용은 아들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 어미가 어찌 할아버지의 뜻을 꺾을 수 있겠느냐? 할아버지는 너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해 주셨으니 개방에 보내심도 반드시 큰 뜻이 있을 것이다.”
“큰 뜻은 무슨 뜻이겠어요. 어머닌 정녕 구주신개의 소문을 듣지 못하셨나요? 세 개의 호리병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시냐고요!”
소부용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얘야, 개방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결코 아니란다. 개방의 방주님은 비록 젊은 나이지만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분이시다. 그런 분을 사부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지 않겠니?”
“존경은 할아버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정말 아버지도 그렇구 어머니도 이러실 건가요? 어머니… 제발 절 도와주세요.”
그 말에 마음이 약해졌음인가, 소부용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 어미가 할아버지를 설득할 수는 없지만 네게 한 가지 정보를 알려주마.”
혁성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니지만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개방의 방주님은 성격이 매우 특이해서 너희 할아버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만약에 방주님이 널 제자로 받지 않으시겠다면 할아버지도 결코 다그치지는 않겠다고 하셨다더구나.”
어릴 적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듣고 자란 혁성이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니까 거절하도록 만들면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건 네게 달렸지만 부디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면 좋겠구나.”
“하하. 그럼 어머니, 전 나가보겠습니다.”
아까까지 죽을 상을 하던 혁성의 얼굴은 어느새 활짝 피어있었다. 길이 보인 것이다.
14인으로 구성된 천강대가 혁성과 함께한 지는 벌써 10년이 되어갔다. 천강대는 혁성이 5살이 되었을 때 부주 오비원이 천강대를 혁성의 개인 호위대로 명했고 그때부터 그들에겐 혁성은 직계 상관이면서도 마치 혈육 같아 마음으로는 동생 혹은 조카 정도로 여겨졌다.
지금 그 천강대의 수장인 을휴가 혁성과 마주 앉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제가 생각할 땐 그건 잘못 짚으신 것 같습니다.”
을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왜지?”
“그건 구주신개는 보통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주신개처럼 괴이한 사람들은 공자님께서 예의 없이 굴거나 하면 얼씨구나 하면서 제자로 받아들이려 할 것입니다.”
“음… 일리 있는 말이야.”
“대신 구주신개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무리는 바로 위선자들입니다. 특히 개방은 꾸밈을 배제한 곳이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것도 자꾸 가식과 위선의 테두리에 있는 자들을 혐오하는 것이지요.”
“오호라∼ 위선자라 이거렷다! 으하하하! 을휴, 너는 역시 내 심복이다. 하하하하!”
혁성은 대머리인 을휴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좋아했다. 을휴의 표정을 보건대 그리 기분 나빠하지 않는 것이 흔히 있었던 손짓임이 분명했다.
한참을 웃던 혁성이 다시 무슨 생각이 난 건지 동작을 멈추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만일 정말 재수가 없어 구주신개와 함께 나서게 되더라도 너희는 꼭 나를 구하러 와야 한다. 알겠지?”
아무리 을휴였지만 그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을휴는 속으로 몇 마디를 중얼거린 후 답했다.
‘만일 오백님이나 부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때는…….’
“물론 구하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혁성은 약간 망설인 것이 그리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오겠다는 말이 마음에 들어 다시금 을휴의 머리통을 치며 좋아했다.
제3장 위선자의 말로(末路)
괴짜란 이 정도는 되어야 괴짜라고 할 수 있는 거야. 괴짜란 말이야. 한마디로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거든. 하지만 무조건 정상이 아닌 것을 괴짜라고 하진 않아. 뭐랄까, 나름의 규칙을 가진 불규칙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은 워낙 불규칙하게 규칙적으로 움직이니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정상이 아니다. 괴짜라고 하는 거야.
- 주먹을 어루만지며 표영이
***
세상에 살면서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 다행스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술 한잔 기울이며 거리낌 없이 푸념하듯 내뱉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는 친구라면 지난날의 상심을 털어버리고 마음에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건곤진인이라 불리는 천선부주 오비원에게도 과거에 바로 그런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지만 그때는 그와 술을 한 잔 기울이는 시간이 이처럼 그리워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도 이제 조만간 자네를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으이, 그러니 자네도 조금만 참게나…….’
오비원은 자신의 거처에 마련된 탁자에 않아 짧게나마 옛 친구를 떠올렸다. 그가 되뇌는 친구는 바로 과거 개방 방주였던 천상신개 엽지혼을 가리킴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그가 생각나는 건 탁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엽지혼의 제자이자 현 개방의 방주인 표영 때문이었다.
“자, 잔이 비었습니다. 한잔 받으십시오.”
표영은 오비원의 초대를 받고 점심나절이 지나 천선부로 온 터였다.
“하하, 고맙네. 표 방주.”
오비원은 표영을 대하면서 옛 친구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 좋았다.
소탈한 성격과 모든 것을 유쾌하게 바라보는 시각 등 표영은 옛 친구를 너무도 닮아 있었던 것이다. 늘 자신을 돌아볼 때는 수수함 속에 비범함을 지니길 바랬고 그의 거처 또한 화려함 대신 정적인 담백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 앉아 있는 젊은 거지는 자신의 초연함보다 더욱 초연해 보였고 더러운 겉과는 달리 그 어떤 담백함보다 더욱 담백해 보였다.
‘과거 엽지혼을 보며 부러워했던 것이 바로 그런 분위기였지. 좋은 제자를 거두었어.’
자꾸만 그렇게 보아서인지 어느 땐 외모마저 비슷하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런 감정은 사실 표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비원에게는 사부가 머물러 있는 듯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먼 길을 와줘서 고맙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서신은 잘 받아보았습니다. 손자를 제게 맡기고 싶으시다구요?”
오비원을 대하는 표영의 말투는 여느 때와는 달리 매우 공손했다.
“그렇네.”
“천선부의 무학이야말로 그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진대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건 다 내 탓이라 할 수 있지. 내가 너무 오냐오냐해서 그 녀석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지 뭔가.”
표영은 당장에 납득할 수가 없었다. 천선부를 이끄는 이가 어찌 그런 사소한 감정에 휘말린단 말인가. 그 정도로 나약했다면 지금의 천선부는 이 정도는 아니었을 터였다.
표영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 것을 보고 오비원은 멋쩍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래, 자네가 이해하긴 힘들 것이네. 그만한 사연이 있다네.”
표영은 살짝 고개만 끄덕였고 그 사연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법이니까. 어차피 말해 줄 것이라면 묻지 않아도 들려줄 것이라 생각했다.
오비원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지난번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묻지도 못했군. 아이의 이름은 뭐라고 지었나?”
“은(恩)이라고 지었습니다. 은혜를 풍성히 받고 은혜를 잊지 말라는 뜻을 새겼습니다.”
“표은이라… 좋은 이름이군.”
오비원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후 벽면을 바라보았다. 표영은 그의 얼굴 한쪽 구석에 그리움이 묻어 있다고 생각했다.
“휴우… 나도 아들 녀석이 보고 싶군.”
표영은 순간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농담인 것을 간파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이렇게 가까이에 아들들을 두시고서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다니 자식 사랑이 너무 크신 것 아닙니까?”
표영은 많은 강호인들이 그런 것처럼 아직 오비원의 셋째 아들에 대한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스갯소리로만 알아들을 뿐이었다.
오비원은 대답 대신 벽면을 향해 소매를 떨쳤다.
펄럭∼
스르르르…….
소매에서 경기가 일며 벽면이 옆으로 젖혀졌다. 그리고 드러난 안쪽 벽면에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어린 검객이 검법을 펼치는 벽화가 나타났다. 그 벽화의 주인공은 오비원이 하루에도 수차례 바라보는 넷째 아들이었다.
“오유태라 하네, 넷째지.”
표영은 아까 자신이 실언한 것을 생각하고 약간 머쓱해져 술잔을 비웠고 오비원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나도 자네 사부를 보러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그래서인지 철이 들었나 보이. 과거에 내가 아들을 쫓아낸 것은 마땅히 잘한 일이라도 생각했던 마음이 날이 갈수록 후회가 되니 말일세…….”
오비원은 그 말을 시작으로 표영에게 넷째 아들에 대한 지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가장 기대가 컸던 진정한 천선부의 후계자로 생각했었다는 것, 자신의 뜻을 저버리고 평범한 여인과 혼인하고자 고집을 부리고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아 부자의 연을 끊자고 말하며 쫓아내었던 이야기들이었다.
“휴우…….”
오비원이 내뱉은 한숨엔 짙은 후회가 묻어 나왔다.
“누군가가 내게 지금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면 아들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 대답할 거네.”
표영은 벽면에 그려진 곱상하면서도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오유태를 바라보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오비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과거 날 위해 오천 번의 기원을 하늘에 올리지 않으셨던가.’
모든 부모의 마음은 같은 것이리라 지금에 와서 표영은 아들을 낳고 보니 더욱 그 마음이 피부로 와 닿았다. 아마도 자식이 없었다면 머리로만, 그저 이치적으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직접 찾아보시지요. 힘드시다면 개방 제자들을 동원해서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오비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보지 않은 것은 아니라네. 2년 전쯤에 살그머니 살펴본 적이 있었네만 그 녀석 앞에 나서질 못하겠더군. 내가 모질게 굴며 내쫓고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서기가 어렵더군.”
표영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술잔만 기울였다. 그가 염려하는 말을 충고하듯 거창하게 늘어놓을 것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오비원이 깊이 생각하고 더욱 마음 아파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번에 내 손자를 자네에게 맡기는 이런 일이 발생한 것도 사실 다 내 잘못이라네. 넷째가 쫓겨나던 해에 혁아가 태어났지. 난 사실 해가 지날수록 후회하고 있었고 못난 짓을 하고 말았다고 자책했네. 그런 아쉬운 마음이 혁아에게 보상하듯 전해진 것이지. 그 녀석은 그렇지 않아도 사랑스러운 데다가 내 마음까지 셋째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해 무슨 일이든지 다 받아주었지 뭔가. 그래서 지금에 이르러선 갑자기 호통을 치거나 하기가 난처해져 버린 거야. 그러다 보니 녀석이 기고만장해져서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고 온갖 해괴한 짓을 다 하고 다닌다네. 물론 다들 내 눈치 때문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말일세.”
오비원의 음성은 그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사랑스러움이 여러 갈래로 섞여 있는 듯 보였다.
표영은 이제야 혁성을 자신에게 보내려고 한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