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56장 (157/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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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부백경이 누운 채로 고개를 살짝 돌려 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 만한가요?”

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럭저럭… 솔직히 말하면 할 만해.”

“생각해 보죠.”

“좋아.”

거기까지 말한 표영은 하북칠살에게서 고개를 돌려 허공을 향해 느닷없는 소리를 질렀다.

“자, 이제 모두 나오도록!”

표영의 이 뜻밖의 외침에 부백경을 비롯한 모두의 눈이 일순간 깜박임도 잊은 채 고정되었다.

‘누가?’

‘설마…….’

‘그럴 리가!’

살면서 어떤 모습은 꼭 보이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는 법이다.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는 건 삶을 윤택하게 하고 가치 있게 빛내는 법이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지금 오늘의 일만큼은 하북칠살에게는 영원한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희망 사항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다다다닥.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한 달리기 소리였다.

‘어디서 들었더라… 그렇군. 서문세가의 바보 같은 호위들이 도망가던 소리가 아닌가.’

그랬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제일 먼저 모습을 보인 것은 서문세가의 열 명의 호위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하북칠살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오징어를 불에 구워 순식간에 구겨지듯 그렇게 구겨진 것이다. 그 뒤를 이어 늙은 마부가 다른 늙은이 한 명과 함께 등장했는데 마부와 또 다른 노인이 표영에게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지존이시여,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너도 애썼다, 능파.”

능파! 사실 마부는 능파였고 그 옆의 노인은 바로 능혼이었다. 처음에 이 일을 계획할 때 능파와 능혼은 서로가 마부 역을 하겠다고 소란을 피웠는데 끝내 능파가 우겨 마부 노릇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개방에서는 서문세가의 호위들마저 개방에서 변장하는 부분도 고려했었는데, 그러면 의심을 사게 될 것을 염려해 그것은 접어두었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제게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능혼이 아깝다는 목소리로 말하자 표영과 능파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하북칠살은 마부가 능파라고 하는 말에 황당함에 빠져 질식할 것만 같았다. 능파와 능혼은 강호상에서 개방방주의 오른팔과 왼팔이며 -비록 무공은 과거의 그들이 아니지만 강호인들은 모르고 있다- 태상장로로 이름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제갈호를 비롯해 손패와 개방의 8대장로들, 그리고 새롭게 신설된 무영칠단의 단주들인 과거의 살수단의 우두머리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느 한 명 소홀하게 대할 수 없는 개방의 실세들이 모두 나타나자 하북칠살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거기에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 뒤로 마차 안에 원래 타고 있어야 할 서문세가의 안주인 주지청과 표영의 아내가 된 교청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교청인은 품에 7개월 된 아들 표은을 안고 있었다.

사실 이번 하북칠살의 기습에 대한 것을 듣고 표영은 기분전환도 할 겸 겸사겸사 모두들 오게 한 것이었다. 이미 야외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된 상태였다. 표영은 교청인에게 다가가 아들을 받아 들고 까꿍까꿍을 연발했다. 표은은 까르륵 웃으면서 좋아했다.

한쪽에 있는 하북칠살은 철저히 무시된 상태가 아닐 수 없었다.

“자, 그럼 일단 좋은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표영이 은을 안고서 하북칠살에게로 다가가 아기에게 말했다.

“자, 은아. 이 아저씨들도 앞으로 아빠의 수하가 되겠다고 하는구나, 자. 아저씨들한테 인사해야지.”

은은 까르르 웃으면서 마냥 좋아 손짓했고 하북칠살의 얼굴은 이젠 아예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

제2장 거지가 될 수는 없다

모두가 단체로 미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미쳐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말아야지.

왜 나를 거지로 만드려 하느냐고∼. 내가 어딜 봐서 어울린다고!

할아버지! 아버지! 정신 좀 차려보세요! 어서 깨어나시라고요, 이건 마왕의 농간이에요. 부디 이겨내셔야 한다니까요.

-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심정의 혁성

***

어느 날 천선부주 오비원에게 그의 둘째 아들 오백이 불쑥 말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혁아를 천선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습니다.”

“진심인 게냐?”

“부용과 함께 오래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으음…….”

“외부 문파 중에서 혁아를 온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분으로 아버지께서 추천해 주십시오.”

“결정이 난 후에 너희는 꽤나 힘들 텐데…….”

“아프겠지만 참아보겠습니다.”

“좋아. 사실 나도 걱정하던 바였다. 너희들이 어려운 결심을 하였구나.”

“혁아에게는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는 도리어 모르는 척하겠습니다.”

“으음… 그렇게 하마.”

“감사합니다.”

“현 강호에서 혁아의 사부가 되기에 적격인 사람은 오직 그뿐이다.”

“어떤 분이십니까?”

“아마 네가 들으면 보내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럼 혹시…….”

“짐작한 대로다.”

“…아버지 뜻에 맡기겠습니다.”

“좋다, 내 직접 그에게 부탁해 보도록 하마. 하지만 그에게 강제로 떠맡길 수는 없으니 그가 원치 않는다면 보낼 수 없다는 것은 알아두거라.”

이렇게 해서 표영이 하북칠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그에 대해 대응 전략을 즐거이 마련하고 있었을 즈음 오비원으로부터 한 장의 서신이 날아들었다.

‘건곤진인의 손자 오혁성이라… 후훗, 재밌겠는걸.’

표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순간 이제 15세인 오혁성의 미래의 색깔은 바로 흐릿하게 탈색되어 갔고 추레하게 변색되었다.

쿵쿵쿵!

“할아버지, 전 절대 갈 수 없어요! 아니, 가지 않을 거라고요! 왜 이 손자를 생거지로 만드시렵니까?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정신 차리시라고요!”

혁성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뭐, 원래 평상시에도 그다지 정상이라고 보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쿵쿵쿵! 쿵쿵쿵!

혁성의 손이 굳게 닫힌 오비원의 처소 문을 강타했고 이어 난리법석이 이어졌다.

“제발 문 좀 열어보시라고요. 비겁하게 이러실 겁니까? 할아버지∼”

혁성의 근처에는 나이 지긋한 호법들이 있었지만 이 소란스러움에 그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바라볼 뿐 달리 말리거나 그만 하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천선부 내에서 어느 누가 있어 이런 횡포를 부리고도 멀쩡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혁성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표영에게로 보내기로 결정되어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혁성에게는 갓난아기 적부터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흘러 누구나 한 번 보면 좋아하게 되었다. 그건 오비원도 예외가 아니어서 끔찍이 혁성을 아끼고 사랑했다. 무공에 대한 자질도 매우 뛰어났으며 학문에 대한 이해도 대단했다.

하지만 혁성은 점점 나이가 들면서 행실이 제멋대로 변해갔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취미로 정한 듯이 천선부인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래도 아무도 크게 대항조차 못했다.

그러기엔 오비원의 사랑이 너무 컸고 내총관으로 있는 아버지 오백과 소부용의 애정이 너무 지극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오백과 소부용이 점점 횡포가 늘어나는 아들을 보며 자식을 사랑한다면 모질게 가르쳐야 한다는 점에 마음을 모으고 끝내 표영에게로 보내기로 마음먹게 된 것이었다.

쿵쿵쿵……!

“정말 이러실 겁니까?”

거의 말투만으로 봐서는 할아버지와 한판 붙어보겠다는 손자로 보였다. 혁성은 코에서 뜨거운 김을 뿜어내면서 ‘으아악∼!’이라는 괴성과 함께 발을 구르다가 근처에 있는 호법들에게 달려들어 마구 손을 날려 머리통을 때려 버린 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두 호법이 혁성의 손짓에 머리를 맞을 리는 없지만 만일 피하기라도 한다면 더 끈질기게 달려든다는 것을 익히 알기에 대충 맞아준 것이었다.

오비원은 안에서 쿵쾅거리는 소음을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마구 흔들어대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하였던 터라 혁성이 떠난 지도 모르고 여전히 ‘아아아∼’라는 말과 함께 귀에 댄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강호인들 중 누가 있어 오비원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겠는가. 그만큼 혁성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라 할만 했다.

뛰쳐나간 혁성은 천선부 내를 가로지르며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갔다.

“이건 말도 안 돼∼ 개방에서 무슨 배울 것이 있다고 가라고 하시는 건가! 이건 꿈이야, 꿈! 악몽이란 말이다!”

혁성의 이 외침으로 인해 천선부에는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혁성이 지나가면서 연신 나팔을 부는 소리에 사람들은 처음엔 ‘이게 무슨 잡소리냐’라는 식의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혁성의 표정이 평상시 미친 것의 세 배 정도의 얼굴로 뛰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감동이 모두의 얼굴에 떠올랐다.

원래 이별이란 진한 아쉬움과 걱정을 남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천선부인들이 보인 그 감동은 아쉬움이 아닌 순수한 기쁨, 바로 그것이었다. 마음속에서 아침 해가 솟아 차례로 온몸에 찬란한 햇빛을 비추었다.

‘그래, 삶이란 이런 것이지.’

‘그동안 당한 걸 생각하면… 흐흑.’

모두의 얼굴이 햇살에 어둠이 물러가듯 그렇게 화사하게 변해갔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의 소원을 하늘이 끝내 들어주셨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이 소식이 단지 소문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실현되기를 정화수를 떠놓고 기원을 올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이때로부터 너무 기쁜 나머지 난데없는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우울함도 불면증의 원인이 되겠으나 사람이 너무 기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건 배고파 죽겠다와 배불러 죽겠다와 같은 맥락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천선부인들은 드러내 놓고 환호하진 못했지만 삼삼오오 모이게 되면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며 기쁨을 나누었고, 이제 살맛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위로했다.

“허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맞이하게 되는군.”

“그러게 말이네, 하늘은 결코 무심하지 않으셨던 거야.”

“난 사람들이 기적을 봤다고 하면 콧방귀를 뀌었는데 내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나.”

“암, 천선부에 서광이 비춤이지.”

“게다가 개방 방주 구주신개에게 가게 된다니… 볼 만하지 않겠나?”

“그렇지, 구주신개와 혁성 공자와의 만남이라… 기대되는걸, 강호 최고의 괴짜와 개망나니의 만남이니 말일세.”

“과연 누가 더 셀까?”

“쉽게 말하기 어렵군, 한 사람은 중원을 휩쓰는 괴짜요 또 한 사람은 천하제일 천선부를 휩쓴 괴짜이니 말이야. 게다가 혁성 공자의 뒤엔 부주님이 계시지 않은가. 아무리 구주신개라 해도 부주님의 얼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

“허허, 자네. 그건 틀린 말인 것 같네. 구주신개가 눈치를 보다니… 어림 반 푼 어치 없는 소리 말게나. 건곤진인께서 왜 구주신개를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러나? 성품이나 마음가짐이 전대 방주인 천상신개 엽 대협을 많이 닮아서가 아닌가. 과거 엽 대협이 어디 부주님 눈치를 봤던가.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그런 분이셨지. 아마 구주신개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걸세. 게다가 지금 개방의 세력은 천선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고수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구주신개의 무공 또한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제 아무리 혁성 공자도 꽤나 고생 좀 할 걸세.”

“그렇긴 하지만 혁성 공자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자네도 알잖아. 구주신개도 그런 종류의 인간은 많이 경험해 보지 못했을 걸세. 그래서 하는 소리지.”

“자자, 우린 마음 편히 구경이나 함세. 되도록 구주신개 쪽을 응원해야겠지만 말야.”

천선부인들은 이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했다. 하지만 거의 모두는 부디 구주신개 표영이 오혁성을 데리고 떠나주길 간절히 바랬다. 그건 오혁성에 당한 지난 시간들이 너무도 괴로웠기 때문이다.

혁성은 흔히 ‘혁성 공자’라 불려졌지만 양지에서의 애칭은 괴짜 공자라는 뜻의 ‘괴공’이라 불려졌고 음지에서는 ‘개망나니’ 또는 ‘미친개’라 불려졌다. 물론 혁성은 괴공이라는 말을 좋아했고 자신이 ‘광견’으로 불려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질 못했다. 누구나 그렇듯 자신의 허물은 사실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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