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47장 (148/199)

 # 147

147.

“이것은 진개방과 개방의 대결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나와 노위군과의 대결이다. 혹여 이 자리에서 내가 쓰러져 죽는다 하여도 어느 누구도 방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무림인이고 싶다.”

이어 표영은 초대받은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들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장엄한 기운이 서린 말이었다. 하지만 표영의 무공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진개방인들 중 어느 누구 하나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 말은 노위군의 목이 날아가더라도 다른 사람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라 여겼다.

“방주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능파가 진개방원들을 대표해 답했고 바로 이어 천선부주 오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멋지군, 나도 보장함세. 자, 모두들 들으시오. 이곳에 있는 누구도 이 대결을 가로막지 않아야 할 것이오. 진개방 방주의 친형인 일옥검수도 마찬가지임을 잊지 마시게.”

표숙은 걱정이 되었지만 천선부주의 말에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숙여 답했다.

두 사람이 마주 섰고 가볍게 목례를 나눈 후 표영이 신형을 날렸다.

표영의 신형은 취팔선보였으며 양손으로 전개함은 파옥권이었다.

파옥권은 옥을 깨뜨리는 권법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옥은 가식을 두르고 선한 척 가장하여 옥처럼 보이게 하나 실제로는 보잘것없는 사람을 깨뜨린다는 뜻이었다.

쉬식.

주먹이 뻗어가는 기세가 공기를 가르는 것이 매우 위협적이었다. 이때 표영은 무공이 가히 능파와 능혼의 실력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아직까지 비천신공을 온전히 터득하지 못했고 만성지체의 틀을 온전히 깨지 못한 상태임을 생각할 때 대단한 것이라 할만 했다.

주위에서 지켜보는 각대문파의 무림고수들도 처음 뻗는 한 수를 보고 그저 겉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실력을 갖추고 있음을 깨달았다. 더불어 자신이 만약 저런 공격을 받는다면 어떻게 막을 것인가 생각해 보았는데 거기 모인 이들 중 약 7할 정도가 난색을 지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매서운 공격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노위군이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채 주먹이 뻗어오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거의 표영의 주먹이 지척에 이르게 되었을 때 노위군의 신형이 뒤로 주르르 물러났다. 하지만 그 정도의 변화는 표영도 감안한 상태였기에 더욱 신법을 가속하면서 주먹을 교차해 가며 따라붙었다.

그때였다. 노위군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튕겨지더니 표영의 주먹 사이를 헤집었다. 그건 마치 연기와 같은 움직임이었는데 표영이 열여섯 번의 변화를 주며 노위군을 향해 주먹을 날렸고 그중 다섯 개가 적중했다. 허나 표영도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퍼펑!

주먹을 고스란히 맞으며 달려온 노위군의 장력에 가슴을 얻어맞고 뒤로 나가떨어진 것이다. 표영은 등이 땅에 닿음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약간 어리둥절했다.

‘이건 대체 어떤 무공이란 말인가. 게다가 전력을 기울인 파옥권에 다섯 번을 맞고도 흔들림없이 장력을 뻗어오다니…….’

표영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었다. 놀란 것은 표영뿐만이 아니었다. 관전하는 이들 중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예 노위군이 어떻게 움직여 표영을 날려 버렸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개방의 무공이 저렇게 대단했던가!’

그들 중 혈곡의 곡주 단천우의 눈은 다른 사람보다 더욱 커졌다. 그가 노위군에게 우사신공을 준 것은 이처럼 대단한 고수로 성장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알아서 주화입마를 당하라는 것이었다.

‘제길! 지금으로 봐선 제대로 우사신공을 익힌 것 같은데… 어떻게 익힐 수 없다는 우사신공을 익힐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는 어쩌면 호랑이를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노위군의 무공은 자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표영은 내상을 입진 않았지만 상대를 얕잡아보는 마음을 버리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좋다, 강룡십팔장으로 상대해 주마.’

표영은 강룡장과 가장 잘 어울리는 낙엽부영을 시전하며 달려들었다. 노위군의 입가가 실룩였다.

‘황룡유희인가?’

노위군은 강룡십팔장을 대하자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사부가 원망스러웠다.

‘기껏 이런 애송이가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몰래 키워오셨단 말이오, 사부. 당신이 기대한 제자가 어떻게 죽어 가는지 잘 지켜보시오.’

노위군은 연쌍비로 몸을 움직이며 우사신공 중 혼돈장을 펼쳤다.

이것은 언뜻 비춰지기엔 개방의 취팔선권과 비슷해 보이도록 개조한 것이었는데 그 위력은 취팔선권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슈슉∼ 슉∼

두 사람의 신형은 번개와 같이 움직이며 교차했다. 가끔 팔이 부딪치거나 정면으로 힘이 충돌할 때는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금 어우러졌다. 순식간에 백여 초가 넘어가고 이백여 초가 지나면서 승기는 노위군 쪽으로 기울어져만 갔다.

“위험해, 위험해.”

능파가 떨리는 가슴을 붙잡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비록 무공이 전폐되었으나 보는 눈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지존은 조만간 위태로운 상태를 맞이할 터였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

그는 달려들어 지존을 구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비단 무공을 상실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능혼이 움직여 도울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전을 치르기 전 지존이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의 무림인이고 싶다.”

‘승패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지존께선 한 사람의 무림인의 모습을 보이길 원하셨다.’

능파는 생각했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누구도 지존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끝이다!”

노위군의 확신에 찬 음성이 나옴과 동시에 타격음이 이어졌다.

슉∼ 퍼펑!

“으으윽!”

표영은 노위군이 날린 주먹에 의해 복부를 가격당하고 나가떨어졌다.

“우웁… 푸헉!”

표영은 가슴이 울렁거리며 입으로 피분수를 뿜어냈다. 내장 쪽이 타격을 입어 핏덩어리가 연신 목을 타고 올라왔다. 더불어 복부에 받은 타격이 너무 커 단전에 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충분히 자신을 가졌건만 명백한 패배였다.

표숙이 놀라 눈에 불을 켜고 몸을 떨었다. 동생은 너무도 고통스러워했고 그것을 지켜보는 형이 마음은 더욱 찢어질 것만 같았다.

왜 아까 천선부주의 말에 동의했는지 원망스러웠고, 동생이 왜 관여하지 말라고 했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표영은 주먹조차 쥐어지질 않을 만큼 몸에 아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몸짓으로 비칠거리며 구석에 있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가까이 다가선 노위군이 손가락만 튕긴다 해도 표영은 마지막을 맞을 터였다. 흐릿한 시선에 노위군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보였고 그것마저 점점 어두워지며 표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마음에 모아두었던 지난 추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정겨웠던 사부, 능파와 능혼, 비에 흠뻑 젖어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교청인도 보였다.

너무 힘이 들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그래, 교청인. 넌 아직 두 번이나 목욕할 차례가 남아 있었지.’

“피식.”

노위군의 옅은 비웃음이 귓가에 파고들자 표영은 추억에서 벗어났고 이번에는 장산후 사형이 들려주었던 노위군에 대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15살이 되었을 때였어. 그때 사부는 눈이 맑은 아이를 데리고 오셨다네. 약간은 두려움에 질린 얼굴이 안쓰럽기도 하고 왠지 귀엽게 보였지. 그 아이가 바로 7살이 된 노위군이네. 사부님은 얼마나 그 아이를 아끼고 사랑해 주셨는지 모르네. 오히려 내가 시샘이 날 지경이었으니 말일세. 하지만 원래 자식을 낳아 길러도 그렇다고 하더군. 첫째가 태어나면 첫째가 제일 예쁘지만 막상 둘째가 태어나면 첫째보다는 둘째가 더 사랑스럽다고 말일세. 난 첫째로서 어느 땐 노위군이 얄밉게 보일 때도 많았었지. 하지만 그 애는 사부님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어.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 녀석은 변하기 시작했지.”

‘그래, 사부님은 누구의 소행이었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믿고 싶지 않으셨겠지. 그래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정신 착란이 일어났던 거야. 후후, 그랬었구나. 이 녀석은 그런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표영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복수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다무셨던 사부를 그려보았다. 사부는 그때까지도 마음에 노위군을 담아놓고 계셨던 것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노위군이 우수를 높이 쳐들었다. 능파와 능혼 등 진개방의 수하들의 눈에 절망이 감돌았다. 일옥검수 표숙은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등에 멘 검을 검집째 풀고 왼손에 거머쥐었다.

‘어머니, 이 숙을 용서하십시오.’

무림인으로서 결투를 벌이는 것이기에 이렇게 참담히 지켜만 봐야하지만 그 후에는 자신의 목숨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참이었다.

그때 표영이 힘겹게 눈을 뜨고 꺼져 가듯 말했다.

“바보 같은 녀석… 넌 아직 멀었어. 후후.”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혹은 세상 모든 것에 초탈한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특별할 것 없이 보인 표영의 한마디 말에 노위군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그의 마음은 곧바로 먼길을 돌아 과거로 향했다.

“바보 같은 녀석아. 넌 아직 멀었어. 후후. 알겠느냐?”

사부였다. 나무 그늘에 기대앉아 타구봉으로 땅을 두드리며 세속을 초탈한 모습과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음을 노위군은 보았었다.

‘아, 사부님.’

놀랍게도 표영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무심결에 던진 말과 분위기는 과거 엽지혼이 노위군에게 무공을 가르치며 했던 것과 너무도 흡사한 것이었다.

노위군은 비록 우사신공을 익히며 오로지 사악한 마음만을 간직하고자 했지만 잠재된 마음에 남아 있던 엽지혼의 따스함이 이성을 뚫고 파고들었다.

광기에 번뜩이던 그의 두 눈이 차분히 가라앉더니 손이 가만히 내려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불어 닥친 뜻밖의 변화에 모두의 시선이 노위군에게로 향했다.

순간, 노위군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맺히더니 볼을 타고 흘러 신발로 떨어졌다.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지는 것은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바로 앞에서 보는 표영의 눈에는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바보 같은 녀석.”

다시 한 번 사부의 음성이 머리를 울렸다. 그와 동시에 노위군은 양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더니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느닷없는 괴성에 모두 놀랄 때 노위군은 머리카락을 다 쥐어 뜯어버릴 듯 힘주어 잡으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아아악… 아아악!”

그가 갑작스러운 행동에 두 장로가 달려 나와 부축했다.

“고정하십시오, 방주님!”

하지만 이미 노위군은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건 억지로 선한 마음을 억누르고 악한 마음으로만 달려가서 7단계를 이룬 우사신공이 산산조각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표영이 한 말로 인해 마음속 깊이깊이 숨겨두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죄책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사부가 아니었다면 노위군은 어릴 적에 굶어 죽었거나 보잘것없이 골목을 떠도는 부랑자가 되었을 것이다.

둑이 터지듯 밀려드는 인간적인 감정들로 인해 악한 마음 구조로 완성된 우사신공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퍼퍼펑! 펑!

“으억!”

“커억!”

노위군은 도움을 주러 온 장로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장력을 날렸고 무방비 상태에 있던 둘은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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