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146.
중추절 정오가 가까워 오자 초대받은 강호인사들은 속속들이 백일봉으로 향했다. 그들은 솔직히 이곳까지 오면서도 반신반의하며 믿음이 가질 않았었다.
하지만 산 밑 마을에서 대기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각대문파의 장문인과 고수들이 모여든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지금 오르는 길에서도 초대받은 이들의 면면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놀랐다.
“헉!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기 저 대사는 바로 중원오대고수 중 한 명인 소림사의 각봉 대사가 아닌가?”
종남파의 장문 뇌백혼의 눈이 부릅떠지며 중얼거린 소리였다. 그는 옆에 대제자 등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체 무슨 일이기에 중원오대고수들이 움직이는지 그로선 당황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는 원래 천선부주 오비원이 참석한다는 말을 듣고 밑져야 본전이다, 라는 생각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실제로 각봉 대사를 직접 보게 되자 생각을 달리 먹었다.
‘서신이 워낙 추접해서 우습게 여겼건만 이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일인가 보구나.’
놀람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에 이번엔 혈곡의 곡주 단천우가 타고 다닌다는 가마인 혈륜거가 보인 것이다. 혈륜거는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산을 올라가는 기세가 마치 불덩이가 솟구치는 듯 보였다.
더욱이 혈륜거를 들고 이동하는 네 명이 뛰어난 경공술과 함께 핏빛 의복을 입은 터라 불덩이라는 느낌은 더욱 강하게 들었다.
‘혈곡에서까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이거 개방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큰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걸.’
종남장문 뇌백혼으로서는 불안감까지 느낄 지경이었다. 그러한 놀람은 비단 뇌백혼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초대받고 올라가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며 놀라워했다.
“저건 무당파의 운경 도장과 칠옥삼봉 중 최고의 기재라는 표숙이 아닌가?”
“오호∼ 공동파의 황보, 황업 장로까지…….”
“오대파의 도암산인이다.”
그들 모두는 결코 헛된 걸음이 아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백일봉의 모임에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올라갈 때의 그 흥분에 비하자면 백일봉에 오른 후에 받은 심적 충격은 상당한 것이었다.
“뭐, 뭐냐. 이건!”
“허거걱!”
“진짜 거지잖아!”
그들이 힘찬 발걸음을 디딘 후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경악과 탄성을 발했다. 그 까닭은 예상하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단한 고수들이 모여드는 분위기라면 살을 파고드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과 진중함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가롭게 뒹굴 거리거나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는 거지들이었기 때문이다.
십 년이 넘도록 노위군 아래 놓인 개방은 거지 방파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지다운 구석이 없었던지라 무림인들 대부분은 이렇게 처참한(?) 거지를 구경해 보지 못한 터였다. 무언가 거창한 것을 기대했건만 그건 그저 기대에 불과한 것만 같았다.
‘이름이 왜 진개방인지 이제야 알겠군.’
그들이 맥이 풀려 대층 자리를 잡으려 할 때였다.
휘리릭.
옷자락 나부끼는 소리와 함께 산 아래에서 한 사람의 신형이 솟구쳐 올라오더니 크게 외쳤다.
“표영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 쪽으로 쏠렸다. 거기엔 얼굴 가득 정기가 흐르는 젊은 검객이 서 있었는데 백의를 입고 검 한 자루를 등에 멘 모습이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은 풍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윽고 젊은 검객의 정체를 알아보았는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당의 일옥검수 표숙이로군.”
사람들이 중얼거린 대로 그는 칠옥삼봉 중 가장 뛰어난 기재인 표숙이었다. 이번 서신은 무당파에도 전해졌는데 표영이 보낸 것을 알고 표숙이 사부와 함께 온 것이었다. 표숙으로서는 흑조단참 상문표로부터 표영의 소식을 전해 들었던 터라 크게 염려하진 않았지만 마침 기회가 닿게 되자 사부님께 간청하여 사부와 함께 무당의 대표로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 표영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무림인들이 속속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인사를 나누고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상황이었다.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며 바라보니 형이었다.
“형∼”
표영이 반갑게 외치며 미끄러지듯이 달려가자 표숙은 일순 어리둥절했다.
표영의 몸이 워낙 추접해 웬 쓰레기 더미가 빠른 속도로 덮쳐 오는 듯한 착각에 빠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표숙은 상문표가 전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동생은 대단한 고수더군. 게다가 함께하는 수하들의 무공은 나로서도 판단이 어려울 정도로 뛰어났다네. 휴우,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땀이 나는군. 하지만 진개방을 표방하고 다니다 보니 아마도 자네가 직접 보게 되더라도 곧장 알아보긴 힘들 것 같으이.”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던 표숙이었다. 오히려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기분이 언짢기까지 했었다.
‘이 녀석이 영이란 말인가?’
아직 얼떨떨해할 때 표영이 그 더러운 손으로 반갑게 두 손을 꼭 잡았다.
“설마 형이 직접 올 줄은 몰랐는걸.”
“네가 정말 내 동생 영이 확실한 거냐?”
표영이 활짝 웃었다.
“하하하, 무당파에선 요즘 농담도 가르치나 봐? 하하하.”
그제야 동생이 확실하다는 것을 안 표숙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근데 이 녀석아, 이건 너무 더러운 것이 아니냐?”
하지만 바로 표숙은 말문이 막혔다.
“모르는 소리. 두목이 본을 보여야 체계가 잡히는 법이거든.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구.”
“허허허.”
표숙과 표영 형제는 잠시 동안 오랜만에 만난 정을 나누었고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관계에 멍청한 표정으로 구경하기 바빴다.
특히 제갈호와 교청인은 설마 했었던 두 사람 관계가 실제로 형제로 드러나자 더욱 어이가 없었다.
‘당시 방주의 맨 얼굴을 봤을 때 닮았다고 느낀 건 제대로 본 것이었군.’
‘그런데 어찌 형제가 하는 짓이 저리 다를 수 있을까? 거참.’
표영은 표숙과 대충 집안 이야기를 나눈 후에 초대를 받고 찾아온 무림 각대문파 대표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진개방 방주 표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무당의 운경이라고 하네. 반갑군. 허허.”
가까이에 있는 운경 도장으로부터 시작해서 표영은 정겨운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대부분에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악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과감하게 건넨 손길을 거부하긴 힘든 노릇이었다.
“공동파의 황업이네.”
황업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끝내 손을 건네지 않았고 표영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황업이 악수를 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자 그때부터는 모두 말로만 인사를 나누었다.
비중있는 인물 중 아직까지 오지 않은 이는 천선부주 오비원과 개방의 노위군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혈곡의 곡주 단천우는 혈륜거에서 내려 황금장포에 휩싸인 채 표영을 노려보았다. 지금 하는 짓으로 봐서는 분명 자신에게도 인사를 건넨다고 올 것이 분명했다.
‘저런 보잘것없는 놈에게 노위군이 절절거렸단 말인가? 더럽고 어리숙해 보일 뿐인 것 같은데 말이야. 그나저나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단천우는 추잡하기 그지없는 표영이 가까이 오는 것은 자신의 명성에 흠을 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오직 자신과 비길 수 있는 자는 천선부 오비원밖에는 없다고 여기는 그였다. 단천우는 얼굴 가득 냉막한 기운을 흘렸다.
이것은 그의 장기 중 하나로 이렇게 하게 될 때 수하들도 하나같이 두려운 마음에 접근하지 못하곤 했다.
‘후후, 녀석. 간이 오그라들어 차마 다가오지도 못하겠지.’
하지만 그런 장담은 표영을 몰라도 너무 모른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수없이 많은 나날 동안 싸늘한 냉대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구걸을 해오던 표영이 아니던가.
어지간한 눈치에는 표영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철면피 중의 철면피인 것이다. 표영이 반가움에 가득한 얼굴로 날듯이 단천우에게 달려왔다.
‘뭐, 뭐냐. 이 새끼…….’
단천우는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고 표영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쪽이 바로 혈곡에서 오신 분들이신가 보군요. 멀리서 핏빛 가마만 봐도 혈곡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답니다. 오∼ 여기 가마에 새겨진 글귀는…….”
표영은 혈륜거 중앙에 새겨진 날아갈 듯한 기상이 어린 글귀를 보며 감탄사를 발했다. 거기엔 단천우의 별호인 진령악제(眞靈惡帝)가 적혀 있었다.
“가만 보자… 그러니까… 진… 릉… 악… 아하하, 아하하, 좋은 말이로군요.”
단천우가 황당함에 젖어 등줄기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무섭다거나 긴장해서가 아니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단 생각 때문이었다.
아무리 거지새끼라도 그렇지, 이건 너무 무식한 놈이었던 것이다. 어린아이들도 다 읽을 만한 자신의 별호를 엉터리로 말할 뿐만 아니라 끝 자는 아예 무슨 자인지 읽지도 못한 것이다.
그는 솔직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서 당장 때려죽이고 싶었다.
‘정말 대책이 서지 않는 놈이로구나. 너의 얼굴을 기억해 두마. 하긴 잊어먹기도 어렵겠다만.’
단천우는 혹시나 손을 내밀면 자기는 냉정하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표영은 무척이나 반갑다는 듯 불쑥 단천우를 껴안으며 말했다.
“하하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단천우가 피하지 못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데다가 표영의 동작이 무척이나 빨랐기 때문이었다.
“으읍!”
그보다 더 그를 곤혹스럽게 한 건 냄새였다. 보통 아무 데서나 맡을 수 있는 땀 냄새가 아니었다.
적어도 100년 정도 땀을 흘린 후에 음지에서 말린 듯한 냄새라고나 할까. 단천우는 코가 썩는 것 같아 급히 숨을 멈췄다.
표영은 악취로서 진개방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며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모두는 하나같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변해 버렸다.
사파의 최고봉이라 하는 혈곡의 곡주에게 저런 식으로 태연자약하게 행동함이 자신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간덩이가 배 밖으로 잠시 외출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저 방주라는 작자는 생각이나 하고 사는 걸까? 내가 보기엔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대단한 건 사실이구나. 중원오대고수 중 이인자라 할 수 있는 단천우에게 저렇게 대담하게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일옥검수로 명성을 날리는 표영의 형 표숙의 경우엔 동생의 행동을 보고 상문표가 전해준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진령악제 단천우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태연히 행동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무림인들도 어려운 일이다. 영이의 무공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일지도 모르겠구나.’
한편 수모 아닌 수모를 당하게 된 단천우는 화를 내야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는 것이 꼭 화를 내거나 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런가 하고 멍청하게 서서 생각했지만 뚜렷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런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사실 표영과 진개방의 수하들이 전혀 긴장하거나 진중함이 없이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세상만사 뒹굴 거리는 것이 최고다, 라는 듯한 모습들이 은근히 주변을 압도해 버린 것이었다.
단천우가 어이없음과 황당함이 뒤범벅된 상태에서 어리둥절해할 때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 아주 작은 소리로 시작되었는데 점점 커졌고 이윽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 상황이 벌어졌다.
“저기… 저 사람 당가의 가주가 아닌가?”
“설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나? 할일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거지 노릇을 하겠냔 말이네.”
“아니야, 저기 좀 봐. 그 옆에는 당경 장로 같은데…….”
“저, 정말이군!”
당문천은 급기야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강호고수들을 보며 눈이 뻘겋게 충혈되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끙∼’
하지만 이미 꽤나 많은 시간 거지 생활을 했고 나름대로 모질게 마음을 먹고 있었던 터라 과거 처음 진개방에 들어오게 될 때의 절망감 정도는 아니었다.
“하하하, 반갑소이다.”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건넨 당문천의 얼굴 옆으로는 어느새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중인들의 놀람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제갈호와 교청인이 칠옥삼봉 중 제일인 표숙에게 자신들을 드러냈기에 사람들은 제갈세가의 후계자로 꼽히는 제갈호와 남해검파의 무남독녀가 진개방의 수하로 되어 있음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이기에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다닌단 말인가?
게다가 거지 노릇을 서슴없이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초대받은 모두가 진개방의 면모를 들여다보며 놀랄 때 일단의 무리가 불쑥 백일봉 정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수수한 옷차림의 천선부주 오비원과 두 호법이었고 한쪽은 현 개방 방주 노위군과 일곱 장로였다. 오비원의 얼굴은 평온함이 가득했고 노위군의 얼굴은 분노와 냉정함이 깃들여 있었다.
이들이 백일봉에 오름으로 인해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난 셈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