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45장 (146/199)

 # 145

145.

진개방의 초대장은 혈곡에도 전해졌다.

개운하게 목욕을 하고 나온 혈곡의 곡주 단천우는 수하가 건넨 서신을 받아 들었다. 단천우가 눈을 치켜뜨고 수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의 뜻은‘이런 걸 나에게 주는 이유가 뭐냐. 너 정말 죽고 싶은 거냐’ 정도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청출표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누군가의 장난으로 생각하고 뜯어보았습니다만, 이 서신은 진개방이라는 곳에서 보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총관 소명하의 말에 단천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진개방이라는 말은 그에게 있어 이젠 천선부 다음으로 싫어하는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짜증스럽게 서신을 펼쳐 읽은 단천우가 읽기를 마치고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그 내용은 천선부에 보낸 것에 혈곡이라는 이름만 달라져 있을 뿐 내용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천선부와 혈곡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혈곡은 자기 밥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 미련한 노위군 녀석, 대체 일을 어떻게 하길래 그깟 진개방이라는 놈들을 아직까지 처리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런 놈에게 뭔가를 기대했다는 것이 부끄럽기만 하다. 아으윽. 속 터져!”

하지만 중추절 때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자칫 개방의 전대방주인 엽지혼을 살해한 일을 노위군이 일방적으로 혈곡에 뒤집어씌울 수도 있었기에 상황 변화를 봐가며 대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죽일 놈 같으니라고… 이번 일이 정리되면 노위군 네놈의 목은 내가 직접 따주마.”

서신에 전해져야 할 곳 중 빠져서는 안 되는 곳은 개방이었다.

표영은 노위군에게 보내는 서신만큼은 직접 친필로 작성하여 보냈는데 글을 다 읽은 노위군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로선 설마 하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노위군에게 전달된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나 진개방 방주 표영이 반역자 노위군에게 전하노라. 그대가 왜 반역자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헛된 망상에 젖어 극악무도한 패악을 저지른 그대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방주의 위치가 아님을 알라.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는 개방의 방주가 아닌 한 명의 반역자이며 패역한 죄인임을 명심하고 그 죄를 만천하에 고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중추절을 기해 천선부와 혈곡을 비롯한 각대문파에서 참여할 것이고 그들이 바로 증인이 되어줄 것이다. 그날 본인은 너의 솜씨를 먼저 보도록 하겠다.

그때까지는 네가 행한 모든 죄를 드러내지 않을 테니 살고자 한다면 최선을 다해 대결에 임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이 글을 보잘것없이 여겨 무시한다면 강호 무림인들로부터 비웃음을 들어야 할 것이고 스스로 죄를 인정하는 또 다른 행동이 될 뿐일 것이다.

그대는 중추절 정오 진모산 백일봉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진개방 방주 표영 고함.

노위군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당장 눈앞에 표영이 있다면 아마도 씹어 먹으려 들었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노위군은 반구옥에 가둬둔 이들의 탈출로 고심하고 있던 터였다.

그들이 입을 여는 날 자신은 자칫 무림공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서신을 읽고 나니 한줄기 희망이 보였다.

‘오냐! 소원이라면 너의 입이 열리기 전 널 찢어 죽여주마!’

그는 우사신공의 힘을 믿었다. 우사신공의 창시자 오뇌무가 들으면 놀랄 것이다. 노위군은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신공의 7단계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 외에 구대문파에 대해서도 서신은 전해졌다.

각 대문파들은 황당하다 여기며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천선부주 오비원이 참석한다는 말이 전해지면서 그들은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15장 결전

“하∼ 나는 방주님께서 부르시지 않으면 어쩌나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네.”

“에잇, 친구. 설마 방주님께서 우리가 죽는 것을 그저 수수방환하시겠는가.”

만첨과 노각은 걸인도에서 벗어나 진모산 백일봉을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재촉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 앞에는 손패가 달리고 있었고 뒤로는 해적에서 진개방의 일원이 된 방원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들이 진모산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표영이 표국을 통해 보낸 서신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강호로 나오게 된 이들은 마치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듯 활기 찼고 어린아이들이 유원지에 놀러 나온 것처럼 들떠 있었다.

하지만 약 100여 명에 이른 거지 떼들이 이동을 하다 보니 간혹 마을을 지나칠 때면 하릴없이 동네에 모여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기이하게 바라보는 눈초리를 피할 순 없었다.

“요새 거지새끼들은 아주 떼로 몰려다니는구먼.”

가장자리에 앉은 할아버지가 말을 꺼내자 줄줄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긴 힘이 없으면 세력이라도 있어야겠지. 그래야 밥이라도 한술 더 뜰 테니까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저놈들은 너무 몰려다니는구먼. 저것들이 아주 메뚜기 흉내를 내려고 저러나.”

“거참, 자네 말 잘했네. 저런 놈들이 구걸을 한다고 휘젓고 다니면 정말 메뚜기가 논을 훑고 지나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겠구먼.”

“말 잘했다니! 그럼 이 늙다리야, 내가 언제 말을 잘못한 적이라도 있었더란 말이냐?”

“아이, 이 영감탱이가 칭찬을 해도 지랄이야.”

원래 할 일이 없고 시간이 남아돌면 사사로운 것에 목숨을 거는 법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삶의 자극이 생기고 활력도 일어나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노인들의 말싸움은 삶의 한 부분이었다.

“하여튼 이 주책바가지들 늙어도 싸우는 건 여전하다니까. 거지만도 못한 것들 같으니.”

“뭐야, 새끼야!”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지금 새끼라고 부르냐? 죽고 싶냐!”

동네 노인들이 한바탕 욕지거리를 해가며 티격태격할 사이 걸인도를 떠나온 손패와 만첨, 노각 일행들은 부지런히 진모산을 향했다.

진모산으로 향하는 진개방인들은 손패 일행뿐만은 아니었다.

약 20여 명에 이르는 구당가인들, 즉 진개방 사천 분타주 당문천과 지타주 등도 서신을 받았는지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발걸음과는 달리 당문천은 연신 짜증 섞인 음성을 뱉었다.

“정말 가기 싫다. 가기 싫어.”

그는 솔직한 심정으로 눈곱만큼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각대문파의 장문인이나 대표자격으로 오는 이들을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 쪽팔렸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서신에 해독에 대한 말만 없었더라도 나중에 맞을지언정 진모산에 오르진 않았을 것이다.

“아, 씨팔. 정말 머리 아프네.”

지금까지는 강호에 소식이 많이 전해지지 않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온 천하에 당가가 거지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질 것은 분명했다. 그는 걸인도에서 특별 수련을 받고 영약 복용부터 모든 과정까지 수료했지만 아직까지 체면은 다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체면까지 온전히 벗어던지려면 적어도 2년 정도는 수련해야 했기에 당문천에겐 아직 무리였다.

약간 뒤쪽에서 달음질하며 당문천의 말을 들은 지타주 당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개밥을 먹을 땐 항상 일등을 놓치지 않으신 분이 엄살은, 후후.’

그건 당추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다른 지타주들도 속으로는 분타주 당문천이 누구보다 성실하게 거지 생활에 적응해 가고 은근히 이번 모임도 기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천 분타의 진개방인들의 발걸음은 중추절이 되기 전에 진모산에 도착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갔다.

중추절이 되기 삼 일 전에 표영을 위시한 진개방원들은 진모산의 중턱 평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는 아직 어떤 문파에서도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삼 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산 아래 마을에는 도착해 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표영은 앞에서 서성거리며 자리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 있는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문파 같으면 앉아서 장문인이나 방주의 말을 경청할 것 같으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대형을 갖출 테지만 역시 진짜 거지 방파답게 드러누워 있는 거지부터 시작해서 삐딱하게 나무에 기대고 앉은 거지 하며 형형각각의 모습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후후, 수련들을 열심히 하는지 많이 자연스러워졌구나.’

다른 지도자가 보았다면 불호령을 쳤겠지만 표영은 도리어 흡족스러웠다. 표영은 이미 확인하였지만 혹시나 오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와야 할 사람은 거의 온 듯싶었다.

사방에 퍼질러져 있는 이들은 늘 함께하는 능파 등과 걸인도에서 온 손패 일행, 구당가인들, 그리고 구청막인들이었다.

한편 반구옥에서 구출된 개방의 영웅들은 쇠약해진 몸과 정신 상태였기에 이번 모임에는 참석시키지 않았다.

표영은 반구옥의 개방인들을 동원하여 노위군의 만행을 알릴 수도 있었지만 이요참의 악랄함과 노위군의 잔악함을 직접 보고 겪은 터라 정면으로 승부할 마음을 가진 터였다.

표영이 어슬렁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동안 각 지역에서 참다운 거지로서의 사명을 다하느라 매우 즐거웠으리라 생각한다. 험험.”

표영은 말을 해놓고도 조금은 미안한 구석이 있는지 헛기침을 하고서 다음 말을 이었다.

“방의 형제들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듣도록 하라. 이번 백일봉에서의 모임은 강호에 개방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중대한 결전이 될 것이다. 나는 일단 그와 겨루어 천하인들 앞에 무릎 꿇린 후 비로소 그의 죄를 물을 생각이다. 그러나 고수들 간의 대결에 있어서 승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승패의 결과가 어떻게 난다 하더라도 누구도 그 대결에 끼어들어서는 안 됨을 명심하라.”

진개방원들은 역시 진정한 거지답게 연신 뒹굴거리며 답했다.

“네에∼.”

“알았습니다요∼.”

이런 행동과 대답은 과거 진개방 초기 때는 볼 수 없는 간덩이 부은 행동이라 할 수 있었지만 표영은 이번에 모인 방의 형제들의 모습을 보고 흡족함을 느껴 모든 면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도록 명한 터였다.

이들은 절도나 기개를 뿜어내는 대신 빈둥거리거나 뒹굴 거리며 발가락을 까닥이는 절정에 이른 거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표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이 시간은 서신에 약속한 대로 해독약을 주도록 하겠다.”

그 말에 빈둥대던 모두가 흥분된 몸짓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독의 발작 기간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해독을 해주겠다는 것인가?’

‘설마 방주가 미친 건 아니겠지?’

‘방주가 죽을 때가 된 것인가? 저렇게 마음이 착한 건 아닌데…….’

그들은 마음을 졸이며 바짝 긴장했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하게 남아 있던 독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혹시라도 기일이 차지 않아 독이 발작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제발 해독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을 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볼 때 표영은 헛소리하기를 밥 먹듯이 하고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취미라 할 정도로 괴상한 말을 잘하는 방주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느닷없이 웃어젖히며 ‘하하, 좋아하긴. 당연히 농담이지. 하하하’라고 말할 만한 위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꿀꺽∼.”

다음에 이어질 표영의 말을 기다리며 모두는 마른침을 삼켰다. 표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곤 우측 방향으로 손을 쭉 뻗고서 말했다.

“저기 보이는 바위 안쪽에 해독약을 놓아두었으니 너희는 한 알씩 복용하도록 해라. 독으로써 독을 제압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니 많이 먹는다고 좋아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 가라∼.”

표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는 나는 듯이 달려갔다. 그들은 서로 먼저 가려고 서로를 밀치고 잡아당기며 혹은 너무 서두르다 자빠지면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만일 이들이 표영이 강제로 먹게 한 것이 독이 아니라 몸에서 벗겨낸 때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 심정은 어떠할까. 또한 지금 죽기 살기로 달려가 먹으려 하는 것도 동일한 때라는 것임을 안다면? 단언하긴 힘들지만 아마도 세상에 살고 싶지 않으리라.

표영은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수하들을 보며 마음으로 굳게 다짐했다.

‘이건 영원한 비밀로 간직하도록 하자. 후후.’

이미 수하들은 때를 말아서 만든 해독제를 먹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내가 먼저 먹을 거야. 썅∼”

“누구냐! 누군데 뒤에서 잡고 난리야!”

“이 새끼들아. 너흰 위아래도 없냐!”

“야, 임마! 너, 하나씩만 챙겨! 거기 호주머니에 한개 더 챙기는 새끼, 너 죽을 줄 알어∼”

“누굴 보고 욕하는 거냐? 당경, 이 새끼 죽고 싶어!”

“앗! 분타주님, 죄송합니다. 그래도 하나만 가져가셔야죠.”

“알았어, 자식아. 눈은 빨라 가지고.”

“이건 또 누구 발이야? 발로 밟지 좀 마. 해독제가 다 으스러지잖아!”

“개밥도 먹은 놈이 그거 가지고 야단이야. 박박 긁어서 먹으면 될 거 아냐!”

“네놈 신발에도 묻었잖아. 거기 서지 못해! 야! 어딜 가!”

“최고의 맛이다. 최고야∼ 우후∼.”

“산해진미가 무엇이더냐. 으하하하!”

세상에 많은 보물이 있고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이들 진개방인들처럼 더러운 때를 서로 먹겠다고 아우성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입 안 가득 텁텁함을 느끼며 이빨 사이에도 끼었지만 그 어떤 향수보다 더 향기롭게 느꼈고 어떤 음식보다 맛있게 쩝쩝거렸으며 또 맛있는 고깃살이 이빨에 낀 것보다 더 기쁘게 때를 혀로 핥으며 빼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표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느리게 박수를 쳤다.

“훌륭하다, 훌륭해. 우리 진개방의 미래는 아침 햇살처럼 천지를 깨울 것이다. 하하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