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144.
어느 샌가 능파의 손이 기이하게 꺾이면서 달려드는 이요참의 가슴을 움켜쥐더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때 이요참의 손은 거의 능파의 목에 닿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능파의 손이 이요참의 가슴을 후비고 있었기에 그는 힘없이 능파의 목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으으윽!”
고통스런 신음이 이요참의 입에서 새어 나왔고 그 뒤를 이어 능파가 잔혹한 음성을 흘렸다.
“너를 가루로 만들어주마.”
말은 그뿐이었지만 심장을 멎게 할 만큼이나 섬뜩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요참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으나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여전히 능파의 손이 안에 박혀 있는 고로 그저 신음과 김빠진 소리만을 낼 뿐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능파는 이요참을 들고서 반구옥의 입구에 서더니 양손에 힘을 주고 허리를 부러뜨려 버렸다. 처절한 비명이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으아아아악∼.”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밑으로 던져 버리면 끝날 일이었지만 능파는 그렇게 쉽게 죽이지 않으려 했다. 능파는 이요참의 양다리를 붙들고 머리를 아래로 오게 한 다음에 옆 벽면에 메다꽂았다.
머리통이 터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라는 것을 능파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를 없애 버린 이에 대한 복수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약 오십여 차례를 휘두르게 되었을 때 이요참의 몸은 너덜너덜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 끔찍스런 광경에 교청인이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흘렸고 능혼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휘릭.
능파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되자 비로소 절벽 아래로 던지고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눈이 서서히 풀리면서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대법이 발휘된 시간이 지나 힘이 소진돼 버린 것이다.
절벽 중간에 머물러 있던 표영은 위에서 무엇인가 큰 물체가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절벽의 울퉁불퉁하게 솟아난 곳을 들이받으며 떨어져 내렸는데 여러 개로 나누어지더니 그중 하나가 표영이 머문 곳 근처 뻗어난 가지에 꽂혔다. 그것은 놀랍게도 이요참의 목이었다. 목 아랫부분이 가지에 정확히 꽂혔는데 이요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표영은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요참의 이러한 최후가 마음을 씁쓸하게 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생명이 가는구나.’
단지 그가 죽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따름이었다.
제14장 초대장
“이젠 좀 나아진 듯싶구나. 다들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표영은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을 막느라 손가락이 부러지고 등에 도상을 입은 상태에서 나흘간을 절벽의 중간지점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어느 정도 손가락이 움직일 만한 상황에 이르게 되어 절벽을 올라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팔 한 팔 뻗으며 올라갈 때마다 오른손에서 통증이 밀려들었지만 수하들을 빨리 만나야 한다는 일념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올라가는 길은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떨어질 때 심호흡 몇 번 정도 할 거리라도 막상 올라가려 할 때는 무척이나 길고 먼 길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약 반 시진 정도가 지나서 표영은 반구옥의 입구 근처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앗! 방주님!”
표영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능혼이었다. 그는 능파의 몸을 돌보고 있었는데 인기척을 느끼고서 밖을 내다보다가 표영을 보고 기쁨의 함성을 지른 것이었다.
표영은 눈을 들어 살피며 모두들 무사한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참담한 몰골에 퀭한 눈을 한 여러 사람들이 보였는데 표영은 그들이 바로 감옥에 갇혀 있던 개방의 의인들임을 알 수 있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능파의 상세가 그리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생명을 보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능파는 무공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무림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나의 생명이다’라는 대답보다도 ‘나의 무공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능파에게 있어서도 무공은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능파는 자신의 무공 혹은 생명보다도 지존이 더 소중했기에 아무 후회도 없었다.
지존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스럽다.
이것은 그가 가진 진솔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표영은 개방인들과 함께 반구옥을 빠져나온 후 여유를 갖고 사형을 찾았다. 장산후는 이미 표영이 올라오기 전 일행들로부터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터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표영은 장산후의 초췌한 모습 속에서 사부의 그림자를 보았다.
‘좋습니다, 사부님.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모든 것을 본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표영은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고 그 울림은 장산후의 마음으로도 전해졌다.
천선부의 부주 오비원은 자신의 거처로 들어와 오른쪽 벽면을 가볍게 밀었다. 그러자 벽면이 옆으로 스르르 밀리면서 또 하나의 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중벽으로 구성된 안쪽에는 한 폭의 그림이 훌륭한 화가의 솜씨로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약 십육칠 세로 짐작되는 소년이 검을 들고 기수식을 취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소년의 동작은 그저 벽화임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역동적인지 금방이라도 검이 쭉 뻗어나갈 것만 같아 보였다.
오비원은 자리에 앉아 탁자 위에 마련된 찻잔에 차를 따른 후 느릿하게 벽화를 바라보았다.
‘잘 지내고 있는 게냐. 보고 싶구나.’
오비원의 눈에는 어느덧 아련한 그리움이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방금까지 아무 움직임도 없이 고정되어 있던 소년은 오비원의 눈에서 검무를 펼쳤다. 가히 환상적인 몸놀림이었다. 솟구쳐 오르는가 싶으면 어느덧 검은 수평으로 뻗으며 예리한 빛을 뿌렸고 잔뜩 웅크렸다가 펼치며 입곱 방위를 점하며 찔러가는 검은 위력적이었다.
오비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소년의 검술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묘하게도 아련한 슬픔이 깔려 있었다.
‘너를 쫓아냈지만 네가 앞에 있다면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말해 주고 싶구나.’
벽화에 그려진 소년은 오비원의 넷째 아들 오유태였다. 오비원에게는 4남 3녀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중 오유태는 네 명의 아들 중 막내로 제일 어렸지만 무공을 깨우침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자질을 갖추었었다.
첫째부터 셋째 아들도 결코 자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넷째에 비하자면 달빛과 반딧불의 차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곁에 넷째 아들 유태는 벽화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벽화는 오비원이 아들의 놀라운 성취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붓을 날려 그린 것으로 당시의 흥분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래, 그때 녀석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 지금쯤 손자 녀석도 꽤나 컸겠구나.’
그가 그저 벽화만을 바라보며 아들을 그리워함은 아직까지도 자존심이 살아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오유태가 천선부에서 종적을 감추게 된 것은 아버지 오비원에 의해 영구히 천선부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오비원은 오유태의 자질에 감탄하며 그에게 장래 천선부의 희망을 걸었었다. 그러나 오유태가 스무 살의 나이가 되었을 때 연설하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면서 일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평범하기 그지없었지만 오유태는 깊은 사랑에 빠졌다. 곧 오비원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연설하가 어느 한 구석 빼어난 점이 없음을 보고 후사를 생각하여 혼인을 반대하게 되었다.
오비원의 반대에 오유태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이 누구보다 따뜻했고 그녀와 함께 있으면 봄 햇살을 쬐는 듯 포근함을 느꼈었다. 그는 후사를 이음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였을 때 비로소 사랑스럽고 귀한 자녀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늘 순종적이기만 하던 아들의 반발에 오비원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리고 급기야…….
“정 그렇게 고집을 피우겠다면 내 눈앞에서 당장 사라져 버려라! 그리고 영원히 내 앞에 나타날 생각하지 마라! 너는 지금 이 순간부터 내 아들이 아니다!”
눈을 감았다 뜬 오비원의 귓가로 당시 분노에 휩싸여 폭언을 퍼부었던 자신의 말이 윙윙거리며 울리는 듯했다. 이제 천수가 얼마 남지 않은 이때 인생에 있어 가장 후회되는 일은 바로 넷째 아들을 모질게 쫓아내었던 일이다.
‘벌써 이십 년이나 지났구나.’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동안 찾지 못한 것은, 아니, 찾지 않은 것은 그래도 막연히 남아 있는 한 가닥 자존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 역시 아무것도 아님을 그는 깨닫고 있었다.
“아…….”
오비원은 옅게 탄식을 발하며 상념에 잠겼다. 잠시 후 그의 상념은 바깥에서 들려온 한 목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속하 동추입니다.”
오비원은 소맷자락을 휘저어 젖혀두었던 벽면을 원상태로 복구시킨 후 답했다.
“무슨 일이냐?”
“진개방에서 청출표국을 통해 부주님께 전한다며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진개방?”
오비원은 ‘어디서 들었더라’라는 식으로 작게 중얼거리다가 곧바로 진개방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다.
“오호, 진개방에서 이젠 서신까지 내게 보내오다니… 들어오라.”
동추가 공손히 건넨 봉투의 겉면에는 진개방 방주 친서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오비원의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걸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겉봉지에서부터 꼬질꼬질 땟자국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진짜 거지다운 서신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초대장이라 함은 나름대로 품격을 갖춰 초대받는 이로 하여금 꼭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지는 것이 기본이겠으나 그가 보고 있는 초대장은 상식을 벗어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종이는 너덜너덜했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새까만 얼룩으로 더럽혀진 것이 초대를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기분을 잡치게 해서 절대 오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혹시 배달 사고일지도 모른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청출표국에서는 떠나면서 오해가 있을까 싶어 말을 남겨두고 간 상태였다.
“미리 말씀드리고 떠납니다. 서신을 보시고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더럽더라도 그건 저희가 잘못 배달한 것이 아니라 원본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저희도 이런 경우는 250년 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천선부주 오비원은 이제껏 받아본 어떤 초대장보다도 반가웠다. 아까까지 넷째 아들 생각에 우울했던 마음이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차근차근 글을 읽어가는 그의 표정은 더욱 기쁨으로 번져 갔다.
진개방 방주 표영이 천선부주에게 알립니다. 이번 중추절을 맞아 개방의 진정한 후인이 누구인지를 판가름할까 하니 부주께서는 비록 바쁘시더라도 발걸음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진개방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진짜 거지들의 방파로서 현재 방주로 있는 노위군의 죄를 묻고자 하니 공증인의 입장이라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소는 호북성 운암 지역에 위치한 진모산 백일봉 정상이고 때는 중추절 정오이니 잊지 말고 오시길 거듭 부탁드립니다.
-진개방 방주 표영
서신을 다 읽은 오비원은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광오한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서신을 보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야지. 암…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었으니까 말이야. 그뿐인가. 다른 문파 사람들도 가도록 도와주겠네. 껄껄껄.”
화단으로 나와 뒷짐을 지고 거니는 오비원의 얼굴엔 소년의 호기심 같은 것이 잔뜩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근심에 주름졌던 얼굴은 오랜만에 기쁨으로 주름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