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41장 (142/199)

 # 141

141.

이 광경을 생각해 보고 떠올려 보자!

손가락 뼈마디가 다 부러진 상태에서 글자를 바닥에 써 내려가는 광경을 말이다. 그것은 진정 초인적이라 할만 했다. 두 사람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자신들의 정체와 누구의 부탁을 받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능파와 능혼이 기다려 왔던 행동이었다.

처음부터 아혈을 찍어놓지 않고 입을 열어놓았다면 그들이 하는 말의 진위를 간파하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바닥에 써 내려가는 내용은 절대 거짓일 리가 없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면서, 손가락은 덜덜 떨리면서도 온 정성을 다해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광경은 지켜보는 제갈호조차도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응원을 하게 할 정도의 깊은 성의가 담겨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 이 순간 부러진 손가락으로 써 내려가는 수여막과 공초환의 마음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들과 함께하는 한 제대로 죽을 수도 없을 것이다. 오직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오직… 사실대로만…….’

두 사람에게는 방주 노위군의 얼굴과 그동안 십이밀로서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던 마음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 순간 제일 중요한 것은 알아볼 수 있도록 똑바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바닥엔 한 자 한 자 놀랄 만한 내용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개방의 노위군 방주의 비밀 집단인 십이밀 중 두 사람으로 수여막과 공초환입니다.

수여막이 어렵게 거기까지 쓰고 뒤를 이어 공초환이 써 내려갔다.

방주는 강호에 진개방이 나타난 것을 알고 은연중에 죽이고자 청막으로 우리를 보냈습니다.

다시 그 뒤는 수여막이 이었다.

노 방주는 사실 그의 사부였던 엽지혼 전 방주님을 모해하고 현재 방주 자리를 차지했으며 스스로 그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기에 혹시 엽지혼 방주님의 또 다른 제자가 나타나 정통성을 주장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거기까지 힘겹게 적어 나간 두 사람은 슬픈 눈동자로 능파와 능혼을 바라보았다. 이러다 손가락을 영영 쓰지 못할까 두려우니 제발 말로 하게 해달라는 뜻이었다.

능파와 능혼은 워낙 예상치 못했던 말들인지라 머뭇거리지 않고 혈도를 풀어주려 지풍을 날렸다.

슈슉-

바람 소리 같은 것이 지나치자 수여막과 공초환은 아혈과 마혈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참담한 가운데서도 다시 한 번 상대의 고매한 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헉헉…….”

“으윽…….”

신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상태가 풀리자 두 사람은 작은 소리로 고통을 표시했다. 둘은 입이 열리자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급 정보를 말하기에 바빴다.

그들의 말에는 현재 개방의 상황과 노위군의 심리 상태. 그리고 심지어 노위군이 방주로 등극하면서 반대한 세력들을 반구옥에 가둬두었다는 것까지 상세히 말했다. 그런 부분들은 나름대로 정보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 왔던 지문환에게도 너무도 충격적이라 쉽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건 제갈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엄청난 일이 어찌 강호에 알려지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라며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이 입가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따따따 읊어대는 것을 보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수여막이 개방에 관해 어지간한 내용을 다 말한 후 나름대로는 멋진 말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저는 사실 진개방에 대해 얼마나… 호감을 가졌는지 모른답니다. 단지 노 방주의 협박에 못 이겨 이곳에… 오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는 마음으로 이미 이들이 진개방 사람들이거나 혹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했기에 지극한 아부를 떨었다. 혹자는 말하길 너무 치졸하고 남자답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수여막처럼 온몸의 뼈가 흩어졌다 모이기를 8번 정도 한 후에서야 비판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고문에 강하기로 자부했던 수여막이 이 정도로 변했으니 가히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수여막의 아부에 이어 그에 뒤질세라 공초환도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개방이 최고입니다. 진개방 만세…….”

그는 팔이 부러져 제대로 손을 들 순 없었지만 두 팔을 치켜든 것보다 더 감동 어린 얼굴로 만세를 외쳤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제갈호가 능파와 능혼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러자 능파와 능혼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윽고 수여막과 공초환을 보고 말했다.

“가상한 마음이 좋구나. 너희 둘은 날이 샌 후에 방주님을 뵙게 될 것이다. 그때 너희는 아까 했던 이야기를 자세히 방주님께 고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수여막과 공초환이 힘을 주어 동시에 대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속으로 생각했다.

‘진정 이곳이 진개방의 소굴이었구나. 호랑이 굴로 들어와 호랑이에게 호랑이를 잡아달라고 부탁을 한 꼴이니… 거참…….’

‘대체 진개방의 방주라는 자가 누구길래 당가를 접수하고 어느새 최고의 살수 조직이라는 청막을 수하로 만들어 버렸단 말인가. 대단한 일이 아닐 수가 없구나. 어쩌면 그가 개방의 방주가 된다면 개방은 아마도 가장 강한 조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능혼의 차가운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너희 몸이 왜 이런가에 대해 방주님께서 혹시라도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만일 이 밤에 있었던 고문에 대해 말한다면 진짜 고문이라는 것이 뭔지를 보여 주도록 하겠다.”

“네.”

어찌나 싸늘한 말인지 수여막과 공초환은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방주라는 작자가 그리 악독한 인간은 아닌가 보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씨팔… 부하들은 너무 독하잖아…….’

이른 아침이 되어 수여막과 공초환은 들것에 실려 표영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응급조치를 취했다고는 해도 여러 차례 부러지고 탈골된 뼈가 알아서 후닥닥(?) 붙을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옅은 신음 소리를 내며 1조의 전각에 들어가며 두 사람은 조금의 설렘과 함께 작은 두려움을 품었다.

‘진짜 거지들의 두목이라 이거지……. 진개방의 방주는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몸은 이 지경이 되었어도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구나.’

공초환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했다.

‘수하들이 저 정도인 걸 보면 방주의 무공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두 사람은 생김새와 무공 실력, 그리고 풍겨 나오는 기운 등을 상상해 보며 기대감을 증폭시켜 나갔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보자면 이들은 이미 표영을 본 터였다.

단지 표영과 진개방주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제 낮에, 즉 처음 청막에 오게 되었을 때 표영이 조를 나누며 짧게 지도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들도 그 모습을 보았었다. 하지만 그들은 당시 표영의 의복이나 외양이 그다지 튀어 보이지 않은 탓에 중간급 정도의 젊은 지도자 정도로만 치부했을 뿐이었다.

그들이 들어섰을 때 표영은 탁자 옆 맨바닥에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수없이 많은 밤을 보냈지만 표영에게 지난밤은 특별한 시간이었다.

비천신공은 그 특성상 비천함에 처하며 사람의 도를 알고 깨달음이 더해지면 그 기운이 커지게 되는데 그에 따른 현상이 바로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표영은 어제 여러 사람들의 아픈 사연을 듣고 적지 않은 깨달음을 얻어 심력을 크게 소모하여 깊은 잠에 빠졌고 아침이 돼서 일어났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상쾌한 기분을 즐기며 천장을 보고 발을 까닥대고 있는 중이었다.

능혼이 문을 얼고 들어오며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방주님, 이른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개방에서 온 두 사람이 긴요히 전해드릴 말이 있다고 하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어? 개방?”

느닷없이 개방에서 찾아왔다는 말에 표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런 모습을 문 앞에서 지켜보던 수여막과 공초환은 황당함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뭐, 뭐냐… 저 거지새끼가 방주란 말인가?’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는 거야.’

그들로서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개방의 십이밀로 지내며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무림인으로서 자세(?)가 나온다는 점이었다. 거지 차림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또한 비밀 조직이라는 점은 마음에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그렇기에 표영의 외양은 그들에겐 입을 쓰게 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쩌겠는가. 조금이라도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간 이번엔 아예 온몸에서 뼈를 추려낼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능파가 한소리 쏘아붙였다.

“방주님께 인사드리지 않고 뭘 그리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냐? 귀한 옥체를 대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말에 수여막과 공초환이 서로 뒤질세라 표영에게 인사를 올렸다. 물론 드러누운 상태였지만 목소리는 지극하기 그지없었다.

“개방 방주 노위군의 비밀 조직인 십이밀 중 칠밀인 수여막 진개방주님을 뵙습니다.”

“하늘 아래 살며 진개방주님을 뵈올 수 있다는 것은 소인으로선 천 번 만 번 하늘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십이밀 중 구밀인 공초환이라고 합니다.”

거창한 인사에 표영이 손을 내저었다.

“아… 그런 괴상한 말들은 필요없고, 개방인들로서 무슨 말을 하려고 왔소이까?”

수여막과 공초환은 표영이 방주의 신분이면서도 하대를 하지 않자 곤혹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말 놓으십시오. 저희는 보잘것없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렇습니다. 심히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하, 그래도 그렇지. 어찌… 혹시 진개방인들이라면 모를까 그대들은 아직까진 개방인들이 아니오?”

수여막과 공초환이 서둘러 답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이제부터 진개방의 일원이 되길 원합니다.”

“부디 거둬 주십시오.”

둘은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살아남는 것을 바란다는 것도 지나친 사치일지 모른다.

그저 고문을 더 이상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만이 간절할 뿐이었다.

“그대들은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하하, 좋아. 너희는 내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함이냐?”

그때부터 두 사람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내용들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거기엔 표영이 그동안 심증으로만 갖고 있던 사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노위군이 방주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반대했던 이들이 갇히게 되었고, 그들이 반구옥에 갇혀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더불어 노위군은 혈곡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도 듣게 되었다.

두 사람이 말한 것은 지난 새벽에 말했던 것보다 더욱 상세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표영은 사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얼굴이 어두워지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고 그 뒤 반구옥에 대한 내용을 들을 때는 눈을 빛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표영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고맙다. 너희들이 없었다면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을 것이다.”

표영은 두 사람의 어깻죽지를 잡고 흔들며 연신 장하다는 말을 했다. 수여막과 공초환으로서는 바스러진 뼈가 잡히자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지만 혼심의 힘을 다해 참아냈다.

‘으으윽…….’

‘겨, 견뎌야 해……!’

표영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까지 청막의 모든 청부를 해결하고 곧바로 우리는 반구옥으로 가도록 한다.”

표영은 반구옥에 갇힌 이들을 구하고 이젠 개방과 정면 승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가면 사형을 볼 수 있을까?’

사부가 들려주었던 대사형에 대한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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