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36장 (137/199)

 # 136

136.

안으로 들어가서 본 상황은 처음 받은 충격보다 열 배는 더 충격적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햇볕을 쬐고 있는 모습은 마치 원숭이들이 나무가 주위에서 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 중엔 막주를 비롯한 영주들까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들이 이 정도로 망가진(?) 모습을 갖춘 데는 표영이 오후의 햇살을 따사로이 받는 것이 거지들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우겼기 때문이었다.

지문환 등 지도급 인사들은 수하들의 놀라는 표정을 보았지만 이미 그들보다 더 많은 수하들 앞에서 망가져 보았고 또한 각 집을 돌며 개밥을 먹고 시장 통을 지나며 뇌려타곤을 외쳤던 터라 별달리 부끄러운 기색이나 민망한 표정은 없었다. 그래도 아예 그런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인지라 그는 슬그머니 등을 돌리고 누웠다.

청막의 특파원들이나 청부를 요청했던 이들이나 나름대로 경악스럽게 이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을 때 나무 그늘 아래서 발을 까닥거리던 표영도 놀라워했다.

그가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청부를 요구하는 이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듣기로 외부에 나가 있는 요원들은 100여 명 정도라고 했는데 모인 숫자를 보아하니 1천여 명이 훨씬 넘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한단 말인가? 대단한 일이로군.’

거지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 뭔가를 소유하려 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표영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어디엔가 매어 있다든지 혹은 형체가 있든 형체가 없든 뭔가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에 따른 욕심이 일어나고 더불어 시기가 일어나겠지만 표영에겐 그 어떤 것도 구속됨이 없었기에 욕심도 없었고 그에 따른 불만도 없었다.

‘그렇게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무리들을 죽 둘러보았다. 청부를 원하는 이들이 오기 전까지 한줄기 바람에 살랑대는 잎사귀처럼 평화롭던 이곳에 삭막함이 감돌았다. 그것은 마음까지 답답하게 조여 오는 거북스런 느낌이었다.

‘그래도… 잘 타일러 봐야겠지.’

표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청부를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표영은 청부를 원하는 사람들을 총 네 개 조로 나누었다.

각 조마다 대략 200명에서 250명 정도를 배치하고 그에 따라 해결사도 네 부분으로 나누게 되었는데 그 구분은 이러했다.

일조(담당자: 표영과 교청인) - 무림인이 아닌 보통 서민들의 부류.

이조(담당자: 제갈호와 무요) - 무림인이나 선하게 보이는 이들.

삼조(담당자: 지문환과 두 명의 영주) - 약간 험하게 보이는 무림인이나 강해 보이진 않는 자들.

사조(담당자: 능파와 능혼) - 얼굴도 험상궂고 무공도 강한 이들.

표영은 이렇게 분류해 놓고 각 담당자들에게 어떻게 그들을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 내용인즉, 간단히 말해 적당히 어루만져 주어 굳이 살인을 하지 않도록 선도하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삼조와 사조에 대해서는 조금의 주물러 줌(?)도 허락했는데, 가끔은 폭력이 더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따로 능파와 능혼을 불러서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마교이지만 절대 본색을 드러내선 안 된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알겠느냐? 그렇기에 최대한 선한 모습을 나타내어야 한다.”

능파와 능혼이 결의에 찬 얼굴로 야무지게 대답했음은 물론이었다. 모든 분류가 마쳐지고 나서 네 개의 전각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게 되었고 한 사람씩 들어가 본인이 원하는 청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청부를 요구하러 온 이들은 살수들치고는 지나치게 더러운 모습에 확 그냥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유당이라는 자가 ‘살수들이 뭐 이 모양이냐! 다 거지새끼들뿐이잖아∼’라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소란을 피우다 사정없이 얻어터진 것을 본 후로는 아무도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패버린 사람은 능파였고 능파는 다시 표영에게 신나게 얻어터졌음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일조에는 서민층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얼핏 봐서 누구를 죽이는 일하고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이 보였는데 표영과 교청인에게는 이런 이들이 살인 청부를 했다는 것 자체가 의외로 다가왔다.

첫 번째 의뢰자는 나이 든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허리가 굽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는데 누가 보더라도 앞으로 그리 오래 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 탁자 쪽에 자리한 의자를 빼주면서 할머니가 쉽게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맙수다, 젊은이.”

할머니는 표영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짓고서 자리에 앉더니 곧바로 품을 뒤져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탁자 위에 내려놓을 때 철썩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은전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필시 청부의 대가로 지불코자 함인 듯싶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은전을 내놓은 것으로 보아 어서 빨리 죽여주길 바란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보잘것없지만 받아주시게나.”

표영의 성격상 어지간한 일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이겠으나 지금의 상황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입장이었다.

‘대체 이 걷기조차 힘들어 하는 할머니는 누구를 죽여주길 바란단 말인가?’

그런 의문은 함께 있는 교청인도 마찬가지였다.

‘괴인에 의해 아들이라도 잃은 것일까? 아니면 가족이 몰살이라도 당한 걸까?’

그때 표영이 약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할머니! 여기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알고 오신 겁니까?”

할머니는 물어보나마나 한 소리를 한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알다 말다. 내 죽기 전에 꼭 한 사람을 죽여주었으면 좋겠구먼.”

할머니의 대답에는 일체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그걸로 미루어보아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이름은 조천상이라고 해. 나이는 올해 일흔셋이지.”

일흔셋이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평균 연령이 50세에서 55세이며 오래 살아봐야 60세였다. 그렇기에 육십 세만 살아도 잔치를 벌일 정도로 대단하게 보았던 터였다.

그런 점에서 일흔셋이라는 나이는 대단한 장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까닭에 표영은 조천상이라는 사람이 필시 무공을 익힌 고수일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수련을 한 사람이라면 일흔셋이 아니라 그보다 더 장수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천상이라는 사람에게서 가족을 잃은 게로구나. 으음… 강호에 그런 인물이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표영은 마음속 깊이 조천상이라는 이름을 각인하고서 물었다.

“조천상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말씀해 보십시오.”

하지만 정작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답은 표영이 예상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것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다네. 그 사람은 내 남편이거든.”

“네?!”

표영과 교청인이 놀라 입을 쩍 벌렸고 할머니는 그때부터 자신이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인즉 이러했다.

남편을 죽여 달라고 찾아온 이 할머니의 이름은 주경운이었다. 그녀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조천상에게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그녀는 환갑에 이를 때까지 남편을 위해 살고 또한 자녀를 위해 살아왔다.

나이가 어릴 때는 그저 황망함 속에 집안일을 배우고 남편 수발드는 것을 익히느라 정신없이 보냈고 20대가 되어선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큰 변화 없이 그녀의 나이 60세가 될 때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건 바로 환갑이 지나서였다.

어느 날 문득 저녁노을이 지는 모습을 보다가 괜스레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어떤 특별한 생각을 가졌다거나 뜻을 두고 황혼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던지라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하기만 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난 후로 그녀는 계속 왜 눈물이 흘렀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도통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던 그녀는 매번 하루 해가 질 때면 찬란하게 저녁노을을 만들며 서서히 사라져 가는 해를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거의 칠 일간을 바라보았지만 눈물이 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팔 일째 되던 날은 구름이 잔뜩 끼어 그만 저무는 해를 볼 수가 없었다. 그날 구름 낀 저녁 하늘을 보며 그녀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구름이 가득 끼어 햇살이 가려진 그 저녁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음을 말이다.

-나에게 죽음의 날은 시시각각 다가오건만 나의 황혼은 너무도 답답하기만 하구나. 아름다운 황혼으로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

그런 생각은 그동안 마음속 깊이 꾹꾹 눌러놓았던 잠재된 이상을 깨웠다. 그때부터의 마음은 조절이 불가능했다. 제방의 둑이 무너지듯 여지없이 밀려드는데 그건 그동안 살면서 억압되어 온 여인으로의 후회와 한탄이었다.

-이제껏 나의 삶은 무엇이었던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일 뿐, 남편을 위한 나 자신이었을 때 남편은 그런 나를 과연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우했던가? 자식들은 어떠한가. 나는 온몸으로 헌신했지만 지금 자식들은 성장하여 자기 자식을 낳으면서 그들에게만 매달리고 있다. 나의 삶은 무엇이었나?

앞으로 내게 남은 삶은 얼마 정도일까? 1년, 아니면 2년? 혹은 3년? 그 어떤 날도 장담할 수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하루하루가 아까웠다. 남들 다 간다는 여행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지냈던 시간들이었다.

이젠 허리가 구부러지고 몸에 힘이 빠져 가고 있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싶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남편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늙어 노망이 났다며 혀를 끌끌 찰 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때부터 늘 순종적이던 그녀는 남편과 다투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그녀가 요구한 것은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 조천상은 할망구가 주책이라며 타박만 할 뿐이었다.

그는 젊어서나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했으면서 부인의 작은 요구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그런 나날들에 그녀는 하루하루가 참담하기만 했다. 자신의 입장을 전혀 생각지 않고 ‘그래, 나의 삶은 원래 이런 것이지’라며 무의식적으로 살았을 때는 -비록 맥없는 하루하루일지라도-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어떨 땐 왜 자신이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후회가 일기조차 했다. 차라리 바보같이 그저 무의미하게 하루하루 살다가 죽는다면 이런 마음의 고통은 없었을 텐데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그런 생활 중에 그녀의 마음엔 서서히 독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던가.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그녀의 각오는 처녀 못지않았다. 그리하여 지금으로부터 1년 전부터 그녀는 남편을 죽여줄 사람을 찾는 한편 열심히 돈을 모았다.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린다고 했다. 그녀는 여차저차 하여 청막을 알게 되었고 크나큰 행운으로 여겼다. 그리고 지금 표영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돈이 부족할 것 같긴 한데 늙은이라 죽이기는 수월할 거외다.”

주경운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 들은 교청인은 황당함을 느낌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진지해졌다.

같은 여자로서 그녀가 걸어온 삶이 답답하기도 하고 또 안타깝게 여겨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함께해 온 남편을 죽일 것까지 있겠는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휴우, 어렵군. 방주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진지하기는 표영도 마찬가지였다. 표영은 한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의 이야기 중 대부분은 마음속 깊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걸인의 길을 가면서 사람의 마음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분간할 수 있게 된 표영인지라 할머니의 음성에 진심 어린 뜻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표영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아하하! 말씀 잘 들었습니다.”

표영의 웃음소리는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었지만 누가 듣더라도 활기차기 그지없었다. 옆에서 듣던 교청인이 화들짝 놀라 일순 표영을 벙찐 표정으로 바라볼 지경이었다.

표영의 말이 이어졌다.

“하하, 할머니가 건네신 돈은 솔직히 누굴 죽이기엔 그리 충분치 않지만 정 원하신다니 그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주경운 할머니의 눈엔 의혹과 함께 기쁨이 일렁였다. 그녀로서는 솔직히 긴가민가했던 것이다.

“정말인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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