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134.
표영은 다시 한 번 보자는 말이 그저 해본 소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다시 보자고 했던 지문환도 큰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이 정도면 어떤 청부라도 들어줄 만한 보물인 것만은 확실했다.
표영이 약간 얼이 나가 있는 이들의 상념을 깨뜨렸다.
“어떻소. 이제 믿을 수 있겠소? 타구봉법의 출처가 어떻든 막주께서 청부를 수락한다면 마땅히 타구봉법을 전수토록 하겠소이다. 본인은 수락하는 순간 타구봉법의 절반을 전수하고 완수했을 때 나머지를 절반을 전수토록 하겠소이다.”
지문환은 구미가 바짝 당겼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의아함도 동시에 느꼈다.
‘대체 이 거지 녀석이 어떤 놈이기에 타구봉법을 알고 있단 말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개방의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나? 현 개방 방주 노위군도 타구봉법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리고 저 뒤에 있는 녀석들도 보통내기들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뢰를 할 사람이라면 그 상대가 만만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대충 생각을 정리한 지문환이 입을 열었다.
“물론 이곳까지 찾아온 것으로 보아 청막의 기본 규칙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만 다시 한 번 묻고 싶소이다. 그대들은 청막의 규칙을 알고 있는 것이오?”
“그 정도도 모르고서 어찌 막주를 보겠다고 했겠소이까. 하하하, 자꾸 우리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것 같소이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소이까. 그럼 좋소이다. 그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라도 다 수락하겠소.”
“만일 수락하지 못할 때엔…….”
표영이 뒷말을 잇기도 전에 지문환이 말을 자르고 자신이 뒤를 이었다.
“청막에서 내건 대로 그 순간부터 청막은 당신의 것이오!”
“좋소.”
표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뒷짐을 지고 발걸음을 떼며 청부 대상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본인이 반드시 죽여주었으면 하는 사람은…….”
막주 지문환과 여섯 명의 영주들이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예외의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어려운 상대가 없을 것이지만 상대가 타구봉법을 시연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임을 감안할 때 그리 녹녹한 인물을 지목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인을 청부할 대상에 대한 궁금증은 청막의 인물들 뿐만은 아니었다. 그건 능파와 능혼, 그리고 제갈호와 교청인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누구를 지목하려 하심일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표영의 입이 열렸다.
“바로 청막의 막주 당신이오.”
“헉!”
“허걱!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여섯 명의 영주들은 경악성을 터뜨렸고 능파 등은 탄성을 발했다.
‘허허, 그런 경우가 있었구나.’
‘절묘하다, 절묘해.’
한편 느닷없이 청부의 대상이 돼버린 지문환은 그 작던 눈이 붕어처럼 튀어나왔고 흰자위 위에 수많은 실핏줄을 드러내고 경악한 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턱이 빠져 버린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그의 동작이 그렇게 변했다고 해서 머리까지 그대로 멈춰 버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왜 나는 그동안 나를 누군가가 청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대체 저놈은 누굴까? 안면 몰수하고 그냥 다 죽여 버린 후에 아무 일도 없는 일처럼 하는 것이 좋을까? 그래, 그게 좋겠어. 그냥 묻어버리는 거야. 흙은 잘 덮어야겠지? 정말 꼭꼭 묻어두자. 그러면 누가 알겠어. 그리고 규칙을 바꾸는 거야. 다음에 또 다른 놈이 찾아와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휴우,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문파에서 찾아와 그렇게 요구했다면 어쩔 수 없이 청막은 그 조직에 흡수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래, 신속하게 다 죽여 버리도록 하자. 어서 영주들에게 명령을 내려야지.’
하지만 그가 통박을 열심히 굴리고 있을 때 이미 그의 목엔 칼날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여섯 명의 영주들이 이 황당한 상황에 손을 쓰려고 하자 능혼이 단도를 빼 들고 지문환이 놀라고 있던 틈을 타 목에 댄 것이다.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이제 앞으로 청막은 방주님의 것이다. 너희가 수긍하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막주가 자살을 하던지. 아니면 너희 손으로 막주의 머리를 몸통에서 분리시켜야만 할 것이다.”
능혼의 말에 엄주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지문환으로서는 상대가 언제 자신의 등 뒤로 날아와 목에 칼을 들이댔는지 놀라워하면서도 답답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얻어낸 이 기업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의 눈이 침침해지며 어둡게 변했다.
“크어어억∼!”
지문환은 숨이 막히고 마음이 답답해지고 기혈이 들끓어 그만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피를 토하고 혼절해 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여섯 명의 영주들은 손을 쓸래야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얼토당토않은 일이었고 이렇게 청막이 무너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건만 막주가 적의 품에서 울화를 못 참고 쓰러져 버린 터라 달리 어찌해 볼 수조차 없었다.
막주 지문환이 피를 토하며 이틀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헤맬 동안 여섯 명의 영주들은 회선환을 복용하고 표영에게 충성 맹세를 올려야만 했다.
충성 맹세를 한 이는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총관을 비롯해 지도자급에 속한다 싶은 이들은 모조리 회선환을 복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지문환이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는 이미 더 이상 청막은 과거의 청막이 아니었다.
영주들은 하나같이 혈색이 새하얗게 변해 넋이 나간 상태였고 믿을 만하고 쓸 만한 이들이라면 어김없이 회선환을 복용했던지라 모두들 그와 같이 얼이 나간 상태였다.
상황을 표현해 보자면 ‘최악 중의 최악’이라고 할 만했기에 지문환도 결국 회선환을 거부할래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첫째는 청막의 규칙을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깨뜨렸다는 명목이 상대에게 있었고, 둘째로는 그때 받은 충격이 너무 심해 아직까지도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때독을 받아먹은 지문환은 다시금 그 쓰디쓰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독맛(?)에 마음이 뒤틀려 몸져누워야만 했다.
한편 청막의 근처에서 표영 등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무요 일행은 제갈호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슬그머니 청막으로 돌아왔다. 사실 무요로서도 생각지 못했던 청부였고 그 나타난 결과를 믿을 수 없었지만 직접 눈으로 본 청막이 침통함에 젖어 있음을 보고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부에 있던 이들은 무요 일행이 돌아왔음에도 거기에 신경을 쓰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까지 마음을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청막의 인원은 막주 지문환을 포함한 전문 살수들과 기타 그 맡은 바 일을 따라 대략 삼백 명가량이었다.
이들은 청막이 어리버리 넘어간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잔인한 살수의 틀을 벗기 위해 ‘체험, 죽음의 현장’에 뛰어들게 되었다.
숫자가 너무 많아 지형적인 문제와 관리의 문제로 인해 죽음 체험은 세 번으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1기로 모인 100여 명 중에는 막주 지문환과 영주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참혹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표영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저기 저 땅을 보아라. 차디찬 땅덩어리가 너희를 부르고 있지 않느냐? 각오는 되어 있겠지? 너희들은 반드시 해낼 수 있다! 예로부터 남칠여구라 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남자는 칠 일을 버틸 수 있고 여자는 아흐레를 버틸 수 있다는 말이다. 이로 보건대 여자들이 좀 더 독한 면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여자들은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 한번 화내면 남자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단 말이다.”
체험 죽음의 현장에 대한 격려를 하던 중에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말이 새 버린 표영은 한참 동안이나 여자의 독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다 모두들 퀭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인식한 후에야 넉살 좋게 웃으며 본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하하하하……. 그러니까 내 말은 칠 일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신과의 싸움을 해보라는 것이다. 자, 모두들 파놓은 구덩이에 눕도록 해라!”
표영은 손까지 쭉 뻗으며 비장하게 말했고 그와는 반대로 100여 명의 살수들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꾸역꾸역 파놓은 구덩이에 몸을 눕혔다.
모두들 자리에 들어간 것을 보고 다시금 표영이 힘차게 외쳤다.
“자, 묻어라∼!”
체험 죽음의 현장 2기생들과 3기생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흙을 덮어갔다. 앞으로 이레가 지나면 자신들이 이렇게 묻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흙을 덮는 그들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더불어 땅에 묻히는 1기생들 중엔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런 모습은 처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총 21일이 지나 ‘체험, 죽음의 현장’은 무사히 마쳐졌다. 그 체험 속에서 그들은 과거 무요와 일행이 그러했던 것처럼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가장 눈에 확 띈 변화는 뭐니 뭐니 해도 그들의 얼굴에 드러났다.
모두는 하나같이 새하얀 분을 찍어놓은 듯 창백하게 변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건 각기 이레간에 걸쳐 햇빛을 전혀 받지 못하고 흙더미에 덮여 있었기에 창백한 것도 그 이유라 할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레라는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지옥을 다녀온 것 같은 심적 충격을 받은 까닭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고 차디찬 땅바닥에 누워봄으로 인해 죽은 자의 설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이레라는 시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루가 천 년같이 느껴질 만큼 길었던지라 심리적 기간으로 따지자면 가히 칠천 년의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충격과도 같았다.
그렇게 ‘체험, 죽음의 현장’을 마친 후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던 살수들은 이삼 일간은 각기 침소에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끙끙거렸고 나흘째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햇살을 받으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괜한 한숨을 내쉬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모습들은 각기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표영의 눈에는 청승을 떠는 모습으로 보였기에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만큼 너그럽지 못했다.
‘이제 죽음의 체험도 마쳤으니 그 다음 과정으로 나아가야겠지. 흐흐흐.’
그것은 이름하여 거지 수련. 영약 복용과 뇌려타곤, 만천화우, 귀식대법 등 진개방의 내로라하는 찬란한(?) 비전비술들을 익힐 차례가 된 것이다.
표영은 청막을 접수한 지 보름 정도가 지나게 되었을 때쯤 수련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과 청막의 미래와 앞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위해 전 인원을 모이게 했다.
이미 연설의 내용이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능파와 능혼, 그리고 제갈호와 교청인을 통해 대충 들었던지라 전체적인 분위기는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약 삼백여 명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앞을 주시했고 표영은 앞쪽 정중앙에 급조된 단상에 올라 빙 둘러본 후 입을 뗐다.
“에∼ 그동안 체험을 거치느라 모두 수고들 많았다. 어려운 길이었지만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통과해 준 것에 대해 본인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도 땅속에서 느꼈던 그 느낌을 잊지 말고 늘 떠올린다면 모두들 훌륭한…….”
‘훌륭한’에서 말을 끊자 땅을 쳐다보거나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이들까지 뒤에 뭐라고 할지 궁금한지 시선이 쏠렸다.
“…거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많고 많은 말들 중에 훌륭한 거지라니…….
훌륭한 사람이라든지 혹은 훌륭한 무림인이라든지 얼마나 좋은 말이 많은가. 청막의 살수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어두워졌다. 설마설마 하며 믿지 않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려 하는 것이다.
그 설마란 영주들이 전해준 말이었는데 청막은 사라지고 앞으로는 거지 무리가 될 것 같다는 말이었다.
“이제 너희에게 살수라는 무거운 책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자유롭고 언제나 마음 편한 새로운 삶. 바로 거지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어떠냐? 좋지 않냐? 하하하!”
표영의 웃음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능파 등 원래 함께했던 이들뿐이었고 나머지 청막인들은 입술 주변이 실룩거리는 것이 속으로 ‘씨발’거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이곳은 더 이상 청막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진개방 산서 분타로 명하겠다. 이곳 산서 분타는 지문환 분타주가 책임자가 될 것이다. 자, 지문환!”
살수계의 지존으로 군림하고 황금에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막주 지문환이 아니었던가. 그는 이제 거지 무리의 분타주로 대변신의 순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지문환은 소개를 받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하게 허리를 숙여 표영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진개방 산서 분타주 지문환입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 거지로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러한 행동에 살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하니 그들의 태양과 같은 지도자가 이처럼 순순히 말 잘 듣는 개처럼 고분고분 꼬리를 흔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의 눈에 실망의 빛이 감돌 때 산서 분타주로 새로이 임명된 지문환의 눈가엔 눈물이 감돌았다. 그라고 어찌 이런 모습을 수하들에게 보이고 싶었겠는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첫째는 지난밤 새 능파와 능혼에게 붙들려 얻어터진 터였다.
제대로 인사를 해야 한다며 패버린 것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 등은 멀쩡했지만 그의 몸은 장난이 아닐 정도로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그런 상태를 알 리 없는 수하들이기에 분명 실망했겠지만 만일 지난밤의 일을 알았다면 모두 동정의 눈물을 쏟았으리라.
두 번째로는 지문환이 회선환을 복용했다는 점이다. 그로선 이미 목숨을 담보 잡힌 상태였기에 삐져나갈 구멍이 없었던 것이다.
실제 무림인에게 있어서 자부심과 긍지를 빼면 남는 게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지문환의 경우엔 그런 마음들은 이미 상당 부분 퇴색돼 버린 상태였다.
그는 한 사람을 죽일 때마다 수중에 돈이 들어오는 맛을 들이다 보니 무림인으로서의 기백을 잃고 그저 재물에 푹 빠진 욕심 많은 늙은이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청막의 정체성에 대해 진개방의 산서 분타로 확고히 정해놓은 후 표영은 말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