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
제9장 기이한 의뢰
청막의 막주 지문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앞에는 표영과 그 일행이 멀뚱멀뚱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씁쓸한 표정은 비단 막주 지문환의 얼굴에만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막주 휘하에 칠영주 중 여섯 명의 영주들도 찜찜함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막주 지문환은 거지 중의 상거지를 데리고 온 것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만약에 말한 대로 대단한 계약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거지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거기에 데리고 온 나채종 역시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그는 늘 삶 속에서 돈에 환장해 지낸 만큼 가장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이 바로 거지였다. 사지 멀쩡한 놈들이 골목 어귀나 시장 바닥을 전전하며 구걸을 하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열심히 무공을 익혀서 자신들처럼 열심히 사람이라도 죽여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거지들에게는 설득하거나 열심히 살아보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살다 살다 이런 거지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여러 거지들을 보아왔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60평생 살면서 보아온 거지들을 모두 모아놓는다 해도 이 거지에 비할 순 없을 것이다. 제길, 이제까지 살인 청부업을 하면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건만 오늘로 큰 오점을 남기게 되는구나. 저런 거지새끼한테 청부를 받다니… 엉성하게 말하면 도중에 콱 죽여 버려야겠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젯밤 꿈에 용이 나타나 내 몸을 휘감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토막난 절반짜리 검 한 자루가 날아와 용을 토막 내버리고 가버렸지 않은가. 용꿈을 꾸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괴이쩍은 검이 용을 죽여 버린 것이니 어쩌면 그 토막 난 검이 이 거지들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 정말 살려둘 순 없는 노릇이지. 그래도 죽인 후에는 몸조심을 해야겠어. 보잘것없어 보이던 반 검이 지날 때 용이 힘도 못 쓰고 잘려 나갔으니 말이야. 어쨌든 오늘은 재수 없을 것 같구나. 조심스럽게 보내야겠어.’
지문환이 표영 등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표영과 일행들도 지문환을 보며 조금은 괴이쩍음을 느꼈다. 원래 보편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때 살수 두목이라면 강철이라도 뚫어버릴 것 같은 예리한 눈매에 바람이 조금 스치기라도 하면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신비스런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지문환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표영이 본 청막의 막주 지문환의 첫 인상은 무요가 전에 한번 표현했던 대로 전형적인 장사꾼이었다.
그것도 철저한…….
거기에 전체적으로 뒤룩뒤룩 찐 살과 살에 덮여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작은 눈, 턱 아래 두툼하게 자리한 삼중 턱, 비단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 등은 그를 살수단의 두목이기보다는 갑부 중 한 사람을 보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멀뚱거리던 표영이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사람을 많이 죽여 돈을 너무 많이 벌어 저런 식으로 변해 버린 것일까? 아주 얼굴에 글자가 새겨져 있군. 나는 돈벌레다, 라고 말이야.’
지문환의 인상에 대한 다른 이들의 소감도 표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 새끼 보게나. 기분 나쁘게 어딜 쳐다보고 인상을 찌그리고 있는 거야. 콱 저걸 그냥!’
능파의 생각이었고 능혼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공을 익혀 살인으로 밥을 빌어먹는 놈들의 꼬락서니 하고는…….’
능파나 능혼이나 마교의 핵심이었지만 살수들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물론 마교 내에도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살수단을 따로 두기도 했지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다.
제갈호와 교청인도 나름대로 인물평을 하고 있었다.
‘어째 하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니 조만간 거지가 될 것 같은 인상들인걸.’
‘사람의 피 값으로 비단을 두르고 보물로 몸을 치장했구나. 쯔쯧!’
제갈호와 교청인도 표영을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덧 어느 정도 사람 보는 눈이 생겼고 겉을 과장되이 꾸미는 것에 혐오스러움을 느꼈다. 특히 그것이 속이 텅 비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지금처럼 사람의 피 값에 대한 대가로 부귀를 누리는 것은 더욱 그러했다.
서로가 어영부영 노려보며 상대를 평가하고 있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막주 지문환이었다.
“그러니까 그쪽 분들께서는 아주∼ 중대한 청부를 하겠다는 말씀이시오?”
그는 존댓말을 사용하며 말해야 하는가를 내심 고민했었다. 하지만 억만 분의 일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정중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가 ‘아주∼’라는 말을 길게 늘여 말한 것은 만일 아주∼ 중대하지 않은 청부로 수작을 부린 것이라면 아주∼ 작살을 내버리겠다는 의도가 깊게 배어 있었다.
그에 맞춰 표영이 답했다.
“하하, 물론 아주∼ 중대한 청부이지요.”
지문환은 표영의 웃음에 기분이 상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이제 자신이 말을 꺼내기만 하면 단번에 목을 날려 버릴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후, 거지 녀석들 그 꼬락서니로 무슨 보물을 가지고 다니겠느냐.’
그로선 거지들을 만나 귀찮은 것도 귀찮은 거지만 자신만만한 거지들의 안색이 창백해질 것이라 생각하니 그것도 볼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본 막에서는 공짜로 청부를 받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요? 게다가 우린 거지라는 신분이라고 해서 할인을 해준다든지 하는 경우는 없다오.”
‘후후.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이 거지새끼들아? 혹시 이놈들 먹다 남은 옥수수를 준다든지 누룽지를 던지는 것은 아니겠지?’
나름대로 결정타라고 생각했지만 표영의 안색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값을 치르는 것이야 뭐 어려울 게 있겠소이까? 본인이 청부할 사람은 값이 많이 나가니까 당연히 그에 걸맞은 거래가 이뤄져야겠지요.”
“하하, 보기와는 달리 말이 통하는구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말과는 달리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다시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어떤 보물이 있는지 한번 구경이나 해봅시다. 그게 뭔지 매우 궁금하외다.”
표영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타구봉을 꺼내 들고서 발걸음을 떼며 왔다 갔다 하며 말했다.
“하하, 내가 제시할 보물은 바로 이 몽둥이에 담겨 있소이다. 비록 보잘것없이 보이지만 이 속에는 큰 힘이 들어 있지요. 어떤 이에게는 자녀가 가장 큰 보물일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부모님을 가장 큰 보물로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이 배운 바 학식을 보물로 여기는 이도 있을 테지요. 막주는 가장 큰 보물이 무엇이라 생각하시오?”
지문환의 표정은 무슨 잡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냐, 라는 식으로 변해 싸늘하게 말했다.
“보물이 보물이지 무슨 부모와 아이 타령이오. 보석이나 돈, 또는 그에 상응하는 무공을 내놓도록 하시오.”
“좋소이다. 우리는 무림인이니 솔직히 말해 진주나 보석 따위가 어찌 진정으로 보물이라 할 수 있겠소. 내가 청부에 내걸 것은 개방의 타구봉법이오.”
타구봉법!
농담치고는 조금 심한 농담이었다. 농담도 적당해야 최소한 코웃음이라도 나오는 법이다.
정도가 심하면 그냥 얼굴엔 씁쓸함만 남는 것이다. 지문환을 비롯한 영주들의 얼굴엔 반찬을 먹었는데 모래가 잔뜩 씹혀 나온 듯한 표정으로 기분 잡친 기색이 확연히 드러났다.
‘하아, 정말 짜증나는군. 저것들이 멀쩡하게 대전에 서 있는 것부터가 뭔가 잘못된 거지.’
모두가 짜증 섞인 표정을 지을 때 막주 지문환은 다시 한 번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 인내심의 강도는 자신이 생각해 봐도 놀라울 정도였다.
‘내가 이리도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었는가! 허허.’
“하하, 이 중요한 순간에 그런 농담을 하시다니 상당히 담력이 있으신 분이로군요.”
“하하, 농담이라니요. 막주는 지금 분위기가 농담할 분위기로 보이시오?”
막주 지문환의 인내심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조롱받을 수 없다고 여겨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이, 거지새끼야! 여기가 어디라고 하,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주, 죽고 싶냐! 이 미친새끼야! 천상신개 엽지혼이 실종된 후에 개방에 타구봉법이 사라진 것이나 알고 거짓말을 해라. 이 쌍놈의 새끼야아악∼!”
얼마나 짜증이 난 것인지 지문환이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그는 이제껏 어떤 경우에도 말을 더듬지 않았던 사람이었고 다른 영주들도 모두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내뱉은 짜증에 가득 찬 괴이한 외침은 황당하기까지 했다.
일순 대전 안에 긴장이 감돌았다. 그중 능파는 표영이 욕을 먹었을 시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리는 증상이 있지 않던가.
표영으로서는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타구봉으로 능파의 머리통을 살짝 내려치며 경고를 준 후 말했다.
“사실 세상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진실을 가리는 경우가 많지요. 막주께서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직접 보지 않고서는 절대 단언해서는 안 되는 법이외다. 내 지금 보여드릴 테니 부디 보는 눈이 있기를 바랄 뿐이오.”
지문환은 기가 막혔다. 우길 것을 우겨야지 젊은 놈이, 그것도 거지새끼가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허허, 거참…….”
하지만 지문환은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봉이 요란스럽게 움직이며 타구봉법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봉을 뻗으니 산악이 쪼개지며 바다가 나뉘는구나.
산천이 내게 말하길 멈추라 하나 나는 그칠 수가 없다.
오로지 가르고 갈라 세상에 악인들을 다 멸한다면
그날이면 아마 나의 손은 쉼을 얻을 수 있을까.
세상에 모든 위선을 감고 얽어 잡아둘 것이다.
선하다고 말하는 자 중에 선한 자를 찾기 어렵고
의롭다고 말하는 자 중에 의로운 자를 찾기 어려우니
나의 봉은 그들을 얽어 잡아둘 것이다.
세상을 굽어보는 이들 중에 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자 있는가.
나의 봉이 그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가 세상을 휘어잡으려 하는가.
내 봉이 그를 휘고 끌어 업신여겨 주리라.
교만한 이들 중에는 개만도 못한 자 많으니
내 그들을 막대기로 봉하리라.
한번 가두면 벗어날 수 없고
그 안에서 혼란을 겪듯 돌고 돌 뿐이리라.
이것은 과거 엽지혼이 표영에게 타구봉법을 처음으로 펼쳐 보이며 들려준 노래였다. 표영은 움직임 속에 타구봉의 여덟 개 핵심 구걸인 반(拌:쪼개고), 벽(劈:가르고), 전(纏:얽어매고), 착(捉:잡으며), 도(挑:휘고), 인(引:끌며), 봉(封:봉하여), 전(轉:회전시킨다)의 기본적인 변화만을 보여주었다.
모든 것을 지금 다 보여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막주 지문환은 타구봉법을 견신한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작은 막대기 하나로 태산같이 누르는가 하면 그 가벼움이 깃털과 같이 표홀하기도 한 움직임에 경악했다. 그런 놀람은 청막의 여섯 영주들도 마찬가지여서 이제까지 상대를 경시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이건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잖은가!’
‘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았음에도 기세가 돌고 도는 것은 현묘하기 짝이 없구나!’
‘도대체 저 거지의 정체가 뭐 길래 타구봉법을……!’
‘타구봉법을 내걸고 죽일 정도의 사람이란 또 누구란 말인가.’
청막의 막주 지문환은 한참이나 놀라다가 갑자기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듯 혼자 중얼중얼 거렸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일 것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납득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나름대로 꿈을 깨 보겠다고 했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뜨고서 모든 것이 현실임을 인식한 지문환은 침음성을 흘리고 말했다.
“으음… 다시 한 번 보여줄 수 있겠소?”
아까 막말을 내뱉었던 것은 쏙 들어간 상태였다. 표영은 손을 저으며 타구봉을 허리춤에 꽂았다.
“고수들이 한번 보여줬다고 못 알아볼 리가 없는데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