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28장 (12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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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노위군의 얼굴은 여전히 싸늘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적잖은 타격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수만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피어났다.

‘진개방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혈곡에서 고의적으로 그런 조직을 만들어 나를 압박하려는 것일까? 아니야, 그럴 리는 없다. 그들은 지금도 내가 빚을 많이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미련스럽게 그리할 리가 없어. 그럼 대체 누가? 어떤 무리가? 설마… 사부는 우리가 모르는 제자라도 외부에 두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한두 가지 재주를 전수해 줄 수는 있어도 개방의 법통을 잇게 하진 않을 것이 아닌가.’

생각만으로는 무엇 하나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곡함은 노위군의 안색이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을 보고 조금 더 자신의 말을 믿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하기론 혹시 죽은 엽 방주에게 또 다른 제자가 있었지 않았나 의심이 드는데 노방주는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라도 있으면 말해 보시구려.

노위군은 그 말에 속으론 흠칫했으나 겉으론 불쾌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모르고 있는 사제가 있을 턱이 없지 않느냐.

‘만약에 진개방이 실재한다면 사제가 있다는 것도 계속 부인하고만 있을 순 없겠구나. 어쩌면 사부는 나를 아끼지 않았고 사형만 편애했으니 사형은 이 내막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때 곡함이 웃음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 자네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네만 괜찮나?”

은근히 말로 신경을 건드린 후 이어 전음을 보냈다.

-혈곡은 현재 힘을 응축하고 있는 과정에 있소이다. 곡주께서 말씀하시길 강호에 아직 우리의 진면목을 나타내야 할 때는 아니라고 하셨소. 그렇기에 이번 진개방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관여하기가 조금 어려운 것이오. 특히 이번 일은 상대가 진정한 개방이라는 명목으로 나타난 것이기에 다른 문파에서 관여하기도 난처하외다. 강호는 필시 개방의 내분으로 인식할 것이니 말이외다.

곡함의 말인즉슨 일체 개방에 음으로든 양으로든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 속에는 나름대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에 있어서는 천선부의 압력에 의함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치부를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계속 곡함의 전음이 이어졌다.

-개방에서는 만사를 제쳐 두고 진개방 문제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도록 하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곡주께서는 이번 일을 매우 염려하고 계시오.

곡함의 눈이 차가운 냉기를 뿌렸다.

-집안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곳에 무엇을 기대한다는 게 무리가 아닐까라는 말씀도 하셨소이다.

노위군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지만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더욱더 큰 상처를 남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하하, 하하하.”

노위군은 갑작스레 진정으로 기쁘다는 듯 온몸을 흔들며 웃음을 날렸다. 곡함의 얼굴이 약간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너스레를 떨어보려 함인가? 별 짓을 다 하는군.’

하지만 노위군은 연신 웃음을 지으며 멈출 줄을 몰랐다.

“하하하… 하하하…….”

그렇게 조금 더 웃음을 짓던 노위군의 목소리가 잦아들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느새 그의 눈빛은 분분히 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만에 하나 지금 내게 한 말이 허튼소리라 한다면 다음번엔 너의 혀를 뽑아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

전음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살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린 말은 곡함에겐 묘한 찜찜함으로 다가왔다.

그로선 이미 할 말도 다 했고 한시라도 노위군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냉막한 얼굴 가운데 정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어려운 부탁만 하고 가는 거 같아 미안하네그려.”

“잘 가게나.”

둘의 눈빛은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곡함이 나가고 노위군은 한동안 문 쪽을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살심을 전신에 퍼져 나가도록 했다. 이런 살심도 우사신공을 연마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내 언젠간 반드시 혈곡을 무릎 꿇게 하고 말겠다! 앞으로 진정한 사악함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이를 부드득 갈고 나서 노위군은 진개방이라는 정체 모를 집단에 대해 생각했다.

‘사부는 죽어서까지 나를 곤란하게 하는구나. 미친 노인네 같으니라고.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말썽이군. 진정으로 나는 개방을 강호무림의 한 방파답게 멋진 모습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왜 몰라준다는 말인가! 내가 방주를 이어야 한다는 것을 왜 몰라준다는 말이다!’

잠시 광분에 젖어 거친 숨을 내쉬던 노위군의 머리로 또 한 생각이 스쳤다.

‘그래, 사제가 진정 있다면 나는 몰라도 사형은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로 밝혀진다면 신속히 없애야겠지. 내일은 반구옥으로 가야겠다.’

그의 눈빛이 잔인함으로 물들어갔다.

제4장 반구옥의 고문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드러낸 망창산에 열두 개의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가히 그들의 신법은 빼어나 날아오른다, 라고 말해도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중 황금빛 장포를 입은 이가 제일 앞선 채였고 그 뒤로 열한 명이 날개처럼 벌리고서 좁혀들었다 펼쳤다 해가며 뒤따랐다.

주변에 있던 각종 동물들은 느닷없이 등장한 괴이한(?) 인간들을 보며 재빨리 몸을 숨기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들은 개방의 방주 노위군과 그의 심복 중의 심복이랄 수 있는 십이밀(十二密)들이었다. 십이밀은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리 이름 짓게 되었는데, 지금은 이들 중 혜화가 돌아섰기에 십일밀이라고 불러야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십이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들은 노위군의 친위대답게 무공도 상당한 수준을 갖추었다.

수준을 비교해 보자면 개방 내에서 장로들 바로 아래 단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노위군으로부터 장로들보다 더한 신뢰를 받고 있었고 노위군에 대하여, 그가 어떻게 방주가 되었으며, 또 현재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가 하는 것 등등,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깊이 관계되어 있었다.

지금 노위군이 망창산을 오르고 있음은 혈곡에서 찾아온 곡함의 말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개방의 비밀 뇌옥인 반구옥으로 가서 사형인 장산후에게 그 내막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어느덧 정상에 오른 노위군과 십이밀은 차례로 밧줄을 잡고 절벽에 만들어진 뇌옥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내려서자 지키고 있던 개방 제자 두 명이 머리를 조아렸다.

“방주님을 뵈옵습니다.”

“수고가 많다. 특별한 일은 없겠지?”

“네, 방주님의 높으신 은혜를 따라 반구옥의 죄수들은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투는 흡사 흑도(黑道)인들을 보는 듯 절대 복종의 뜻을 담고 있었다. 끈끈한 정과 문파의 어른을 대하는 존경심보다는 두려움이 더욱 담겨 있는 모습과 말이었던 것이다.

노위군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장산후가 갇혀 있는 뇌옥으로 곧바로 향했다.

삐그덕.

개방 제자가 자물쇠를 풀고 문을 당기자 굳게 닫혀 있던 뇌옥에서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노위군은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모르는 사제가 있단 말이렷다? 후후.’

성큼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간 노위군은 들고 있던 횃불을 고정해 놓는 곳에 내려놓고서 눈으로 장산후를 찾았다.

장산후는 엎어진 채로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이봐, 지금 시체 흉내라도 내고 있는 것이냐? 좋은 말로 할 때 정신을 차리는 게 여러모로 신상에 이로울걸?”

지금의 이 말은 노위군이 장산후에게 해오던 말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성질에 못 이길 때면 욕지거리와 함께 심하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어느 정도만큼은 예우를 갖추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변화는 철저히 우사신공 때문이었다. 그는 신공의 능력을 얻기 위해 선한 마음은 일체 포기했고 그로 인해 진보된 무공을 얻을 수 있었지만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포악하게 변해만 가고 있는 것이다.

죽은 시체와 같이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장산후의 몸이 뒤집어졌고 그와 함께 그의 얼굴엔 헤벌쭉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세게 나오는구나. 네놈은 오늘도 비천신공의 비결을 물으러 온 것이겠지? 바보 같은 녀… 커억!”

장산후는 미처 뒷말을 끝맺지 못했다.

노위군이 발을 날려 옆구리를 강타해 버렸기 때문이다.

퍽!

장산후의 몸은 끊어진 연처럼 날아 뇌옥의 벽에 부딪치고 다시 튕겨져 나와 신음성을 토해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으으윽!”

‘이놈이 미쳤나? 보자마자 지랄이냐.’

장산후는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때 그의 귓가로 노위군의 살얼음 같은 음성이 들렸다.

“이제 나에게 비천신공 따윈 필요 없다. 허튼소리를 내지르면 이번에는 혀를 뽑아버리고 말 테니 그리 알아라.”

노위군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장산후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입을 열었다.

“귀를 세우고 내 말을 똑바로 들어라. 사부는 너와 나 이후에 세 번째 제자를 둔 것 같은데, 넌 알고 있었느냐?”

사부와 사형도 몰라보는 비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에 고통에 힘겨워하던 장산후는 꺼억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 으하학… 개, 개소리 작작해라. 네놈이 개 같은 줄은 내 익히 알고 있었다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 개도 그런 소리는 안 한단 말이다. 으하하…….”

실제 전대 방주 천상신개 엽지혼이 거둬들인 제자는 자신과 노위군뿐이었기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노위군은 누가 뭐라고 한다 해도 세 번째 제자가 있을 것이라 단정 짓고 있는 상태였기에 장산후의 말이 조롱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라도 죽고 싶긴 하겠지. 하지만 네놈을 죽일 생각은 없어. 그러면 너무 관대한 것이 되거든.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 어서 사제에 대해서 털어놔라.”

“사제라고? 네놈이 사제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단 말이냐? 사제라고 부르는 놈이 사형을 이렇게 대하고 사부를 죽게 만들었단 말이냐? 지나가던 똥개가 방귀를 뀔 일이지, 아무렴. 하하하!”

아픈 옆구리를 움켜쥐고 장산후는 연신 힘겹게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노위군은 더 깊게 오해하기 시작했다. 실제 장산후의 말뜻은 그가 사문의 호칭을 쓸 자격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사제 운운하는 말에 진짜 사제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 이제야 뭔가 말이 통하는군. 제대로만 말하면 매는 줄여주겠다.”

그 말에 머리를 땅에 기댄 채 장산후가 이기죽거리며 말했다.

“좋다, 솔직히 말하마.”

노위군이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장산후는 길게 숨을 몰아쉰 다음에 말을 이었다.

“…넌…….”

진지하기 그지없는 말과 목소리였다.

“개새끼야. 키키킥.”

언제 진지했었냐는 듯 자기가 말해 놓고도 웃긴지 장산후는 연신 키득거렸다.

노위군은 사제에 대한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자 잠시 동안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장산후는 노위군이 가만히 있자 다시 손가락질을 해가며 또 말했다.

“키킥, 맞아 맞아. 네놈의 속셈은 이것이었구나. 내가 혼자 있으면서 웃을 일이 없으니까 날 웃기려고 뜬금없는 말을 한 것이지? 녀석, 싸가지는 없어도 나름대로 기특하기도 하지. 그런 것이었다면 넌 성공한 거야. 이번엔 제대로 웃겼으니까 말이다. 너, 앞으로 전문적으로 웃기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떠냐?”

그 말은 여태껏 참고 있던 노위군의 발을 자동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래, 매를 버는 것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 그런데 이건 좀 심하지 않나?”

퍼퍼퍽! 퍼퍼퍽!

발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움직였고 그에 따라 장산후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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