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25장 (126/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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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제16장 이인자의 한숨

혈곡의 비밀 회의 장소인 흑저.

그곳 제일 상석에서 곡주 단천우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양손에는 서신이 하나 놓여져 있었는데 눈길이 서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분노하는 것으로 보아 필시 서신의 내용이 단천우의 심기를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오비원∼ 네놈이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이 나쁜 자식 같으니∼!”

이곳 흑저는 사방이 꽉 막힌 밀실이었다. 조금만 소리를 내어도 소리가 크게 울리는데 거의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대자 웅웅거리며 끊임없이 소리가 울렸다.

탁자 좌우에 앉은 오대장로들은 이 분노의 불똥이 혹시나 자신들에게 튀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하며 겉으로 온갖 분노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럴 때 재수 없이 말을 꺼냈다간 여지없이 어디가 부러져도 부러지고 만다는 것을 익히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개자식 같으니라고! 지가 천하제일이면 다야! 으아악∼ 왜 귀신들은 오비원 같은 놈은 안 잡아가고 놀고만 있단 말이냐! 제발 죽으란 말이다! 죽어∼!!”

단천우는 끝내 분에 못 이겨 손에 쥐고 있던 서신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씹기 시작했다.

우그적 우그적.

“오… 비… 언… 주기 테아……!”

입 안 가득 종이가 들어차 ‘오비원을 죽일 테다’라는 말이 괴이하게 터져 나왔다. 단천우가 씹어 먹은 서신에 오비원이 무엇이라고 적어 보냈기에 이렇게 광분하게 되었을까?

서신의 내용은 그의 심사를 건드리기 충분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천선부주 오비원이외다.

곡주의 도움으로 강호는 태평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다오.

혹시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소식을 듣자 하니 개방 내에 내분이 일어 새롭게 ‘진개방’이라는 무리가 등장한 것 같소이다.

진개방의 방주는 당가의 오독관문을 뚫고 당가를 손에 넣었는바, 그 최종 목적은 개방에 있는 듯하오. 나는 처음에 이 일이 강호에 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일은 개방 내에서 해결해야 할 내분이라 단정 지었소. 그리하여 혹시나 혈곡에서 잘못 오인하여 진개방의 일에 관여하게 되지나 않을지 염려되어 이렇듯 글을 보내게 된 것이오.

혈곡과 당가는 그리 큰 연이 없는 줄로 알기에 굳이 신경 쓰지 않을 것으로 아오. 허나 만에 하나 다른 마음을 품어 경거망동한다면 멸문의 화를 초래하지 않을까 싶소이다. 부디 좌중하시어 혈곡에 번영이 있길 바라는 바외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산천을 벗 삼아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구려.

-천선부주 오비원.

단천우의 입장에서는 진정 발광할 만한 서신의 내용이었다. 이미 단천우는 이 서신을 받기 전에 옥기로부터 당가의 소식을 들었던 터였다. 당운각은 천선부로 가고 옥기는 혈곡으로 온 것이 아니던가.

혈살대주 송도악의 죽음과 당가가 엉뚱한 거지들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에 이를 갈고 있었는데 거기에 천선부에서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

원래 오비원의 경고가 있기 전 단천우의 계획은 진개방을 쓸어버릴 심산이었다.

진개방이라는 존재는 갑자기 등장한 눈엣가시였다 거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으로 생각했던 당가가 넘어갔고, 거기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개방이건만 진짜 개방이라고 들고 나왔으니 환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진개방이 죽은 엽지혼의 또 다른 후계자라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으으으윽…….”

서신을 씹어 먹고도 분을 이기지 못한 단천우는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탁자를 마구 내려쳤다. 그의 열화수에 의해 금강석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이인자의 설움이었다. 비록 오비원이 천하제일고수이고 그 아래 단천우가 있다 하지만 그 간격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오비원이 그런 식으로 서신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고 단천우도 냉정을 잃지 않았으리라.

흑저에 모인 장로들은 회의를 한답시고 모이긴 했지만 아무 할 일도 없이 씩씩대는 곡주만을 보고 있었다.

단천우가 흉포하게 으르렁거리던 것을 멈춘 것은 약 일식경(30분)이 지나서였다. 단천우는 비로소 분노를 삭이고 말했다.

“일단 우리는 일의 추후를 살펴보도록 한다. 대신 곡함에게는 바로 개방으로 떠나라고 일러라. 진개방인지 뭔지 하는 것들을 싹 쓸어버리라고 말이야. 방주라는 놈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더란 말이냐? 엽지혼을 죽여주고 우사신공을 건네줬으면 집안 단속은 알아서 해야 할 것이 아니냔 말이다.”

단천우의 말에 다섯 장로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답했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만일 노위군이 어설프게 굴면 죽여 없애 버리고 말겠다.”

* 편집자 주: 이후 김현영 작가의 단편 소설 및 작가의 말이 이어집니다.

단편 - 위대한 청부(請負)

월성(月成)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친구의 주검 앞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응이 죽다니…….’

친구 하응은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싸늘히 식어 있었다.

“복수다, 복수! 내 이 자식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 테다!”

그의 두 눈엔 핏발이 섰고 온몸은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의 분노를 누군가가 지켜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 반응은 월성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누어질 것이 분명했다.

월성을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

“절친한 친구가 죽다니, 정말 안타깝구려. 반드시 복수가 성공하길 비오이다.”

월성을 잘 알고 있는 강호인들.

“야, 새끼야. 복수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복수냐. 속 시원하게 잘 죽었어. 하응 같은 놈들은 지금 죽은 것도 상당히 늦은 감이 있어. 그리고 월성, 이 자식… 너도 얼른얼른 죽어, 자식아. 강도에 강간범들이 무슨 복수한다고 설치고 난리야.”

그렇다. 월성… 그는 일명 도둑놈이자 강도인 것이다.

강호에서는 탐욕이 극에 이르렀다 하여 극탐(極貪)이라는 별호로 통용되었다.

그리고 죽은 하응은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색마(色魔)였다.

그래서 얻은 별호는 색탐(色貪).

둘을 합쳐 강호에서는 신탐쌍절(神貪雙絶)이라고 불렀다.

별호는 그런대로 운치가 있어 보이지만 두 놈 모두 인간성은 최악이랄 수 있었다.

월성은 비록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한번 한다면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가진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옳았다.

“난 복수하고 만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천선장주 오씨 늙은이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

월성이 말한 늙은이는 오비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오비원의 이름 앞에는 몇 가지 수식어가 항상 먼저 붙는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천하제일고수.

천선부주.

덕망과 지혜를 겸비한 자.

지금 이 위대한 무인을 향해 패역무도한 강도 월성이 택도 없는 복수의 칼을 뽑아 든 것이다.

지나가던 개가 성질을 내며 가슴을 치고 거품을 물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오비원의 딸을 강간하려다가 모가지가 떨어져 나간 색마 친구 하응을 위해서 말이다.

“월성, 내가 친구라서 자네에게 해주는 말이니 새겨들어. 건곤진인 오비원을 죽이기 이전에 말일세.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네.”

사기꾼 친구 모이검의 말에 월성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 그게 뭔가?”

“먼저 장터에서 계란을 하나 사. 많이 살수록 좋아.”

“응.”

“눈을 들어 적당한 바위를 하나 찾아.”

듣는 월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다음엔?”

“그리고 산에 올라가는 거야. 정성껏. 알겠나?”

“그리고는.”

“그리고 준비한 계란으로 바위를 내려쳐. 알았나? 내려치는 거야. 안 깨지면 계속 내려쳐. 그러다 계란이 바위를 깨뜨리게 되면 그땐 오비원도 죽일 수 있을 것이네.”

태연한 모이검에 반해 월성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복수를 도와주기는커녕 조롱하고 있다니.

“이 나쁜 놈! 네가 그래도 친구냐! 죽어라, 이 자식아!”

월성의 주먹질에서 시작된 싸움은 반나절이나 계속됐고 모이검의 머리통이 피 범벅이 되고 월성의 어깨가 탈골될 때서야 둘의 싸움은 비로소 멈춰졌다.

대개가 이런 식이었다.

모든 친구들은 월성의 복수 계획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오히려 혹시나 건곤진인 오비원에게 잘못 보일까 봐 죽은 하응과 알고 지냈다는 것조차 잊으려 하는 녀석들이 많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친하다고 생각했던 세 친구의 말을 들어보자.

전문 소매치기 도복만.

“가능하지, 암 가능하고말고.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정한 때가 있는 법. 자넨 아침에 일찍 일어나 늘 서쪽을 바라보게나. 그리고 아침 해가 서쪽에서 떠오른다면 서슴없이 내게 달려와. 망설이면 안 되네. 복수는 중요하니까 말이야.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 우리의 복수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네. 그땐 내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달려가겠네.”

고리대금업자 고합.

“하응, 그 자식 내 돈 빌려가서 갚지도 않고 죽어버렸어. 월성, 자넨 하응과 제일 친하지 않았나?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자네가 하응 대신 돈을 갚아주는 것이 가장 이치에 합당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사기꾼 천보.

“으응? 넌 누구기에 나를 아는 척하는 거냐? 그리고 하응은 또 누구야. 허허, 요즘은 별 희한한 놈들이 다 찾아오네. 애들아. 당장 이 미친놈을 쫓아내라!”

그 외에도 대여섯 명이 더 있었지만 위에 세 친구와 오십보백보였다. 어느 누가 있어 천하제일고수 오비원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월성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복수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무모한 성격의 소유자라지만 대놓고 ‘나를 죽여 주시오’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천하제일검이 뉘 집 개 이름은 아니잖은가?

이 복수를 위해 다음으로 알아본 곳은 청부 살수 조직이었다.

그는 그동안 도둑질과 강도짓을 통해 모아둔 총재산을 털어 청부 조직을 찾았다.

중원제일의 살수 조직 흑월단(黑月團)을 찾아가 월성이 진중하게 말했다.

“건곤진인 오비원을 죽여주시오.”

이 몇 마디 되지도 않은 말.

이 말 때문에 월성은 흑월단에서 뼈를 묻을 뻔했다.

살아났다는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흑월단의 단주를 비롯한 장로들이 불을 뿜듯 소리쳤다.

“이 자식아! 차라리 우리보고 함께 자결을 하라고 그러지 그러냐!”

“너, 대체 누가 보낸 거냐! 우리 조직을 무너뜨리려는 음모가 분명해. 너, 어디서 왔어! 우리의 맞수인 청살단에서 보냈냐?”

“안 되겠어, 이 자식 고문해!”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흑월단에게는 조직의 생사가 달린 문제였던 것이다.

아무리 청부 조직이지만 청부를 받지 말아야 할 존재가 있는 것이다.

그가 바로 건곤진인 오비원이다.

“으아아아아악∼!”

월성의 비명 소리가 흑월단의 고문실을 울린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흑월단주 노둔아가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고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쭈∼ 욱∼”

고문은 참으로 다양했다.

손톱 뽑기, 칠 일간 잠 안 재우기, 물 고문, 머리털을 비롯한 몸에 난 모든 털을 모조리 뽑아버리기, 인두로 가슴 지지기, 눈동자를 바늘로 찌르겠다고 위협하기, 밥 굶기기, 거꾸로 매달아놓고 고춧가루 물 붓기, 분근착골수로 모든 뼈들을 탈골시키기… 그 외에도 이루 말로 형용할 수조차 없는 고문을 약 삼개월여 동안 당한 후에야 월성은 간신히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고문의 막중함에 비해 흑월단주의 마지막 말은 맥 빠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미안해. 그래도 자식아, 건곤진인을 죽여달라는 것은 너무한 거야. 다음부터 그런 말 하지 마. 알았지? 험험… 험험…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정말 미안해.”

토닥토닥.

씨익 웃으며 어깨를 두들겨 주는 흑월단주의 위로를 받으며 월성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섰다.

눈물을 머금은 월성의 모습은 참혹하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머리털은 다 뽑혀 대머리로 변신했고 분근착골수로 인해 뼈가 다 한 번씩 탈골되었다가 붙여졌기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서야 간신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이 상태로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오래 못 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너에겐 분명 무엇인가가 있어!”

흑월단을 제외한 살수 조직 여섯 곳에서 던진 동일한 질문이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월성을 갈구며 고문했다.

“말해, 말하란 말이야. 너의 진정한 목적은 뭐야?”

“저는 단지 오비원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을… 으아악∼”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이 자식! 죽어라. 죽어!”

한 곳에 두 달씩, 고문의 기간은 일 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월성이 일이관지 소하천을 만난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랄 수 있었다.

그는 강호에서 최고의 기인으로 통하는 이가 아니던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이때를 위해 만들어진 말인 듯했다.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도와주마.”

“정말입니까?”

“자식, 너는 이제껏 속고만 살았느냐.”

“죄, 죄송합니다.”

“청부를 해라.”

“누구에게 말입니까?”

“전설의 살수에게지.”

“네? 전설의 살수라네요?”

“그래, 바로 전설이다. 너는 먼저 청부의 조건을 갖추어라.”

“뭐든지 하겠습니다.”

“우선 비급을 익혀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뒤이어 이루어질 것이다.”

“어디에 있습니까?”

“만학서원의 귀퉁이에 모아두었다.”

단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비급에 기록된 모든 것을 실천하고 또 실천했다.

그의 몸은 날로 건강해졌고 마음도 풍요로워졌다.

만나는 사람에게 항상 먼저 인사했고,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가끔 복수의 마음이 약해지려 할 때면 쓰디쓴 돼지 쓸개를 입에 물었다.

그 자극은 마음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고 의지를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로부터 십 년 후.

월성의 나이 43세가 되었을 때 그는 비급을 연마해 오성 정도의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의 몸은 몰라볼 정도로 좋아져 예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는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했다.

이십 년 후.

월성의 나이 53세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전 중원을 위진시킬 정도가 되었다.

별호도 참으로 다양하게 불렸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자면 ‘철의 사나이’, ‘덕성(德聖)’, ‘개과천선(改過遷善)의 화신’, ‘중원제일의 인상 좋은 사람 서열 5위’ 등이었다.

노력은 끝내 그의 인상마저 변화시킨 것이다.

삼십 년 후.

영락제 10년, 그는 드디어 모든 비급을 온전히 터득하고 완성했다.

이제 곧 청부를 이루게 될 날이, 복수의 날이 이제 눈앞에 이른 것이다.

천선부 앞에는 많은 사람들과 화환들이 즐비했다.

화환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화환 앞에 기록된 글귀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소림사)

고 오비원 대협의 영전에 애도하는 마음으로 명복을 빕니다.(무당파)

평소 고인의 은덕을 되새기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화산파)

모든 사람의 얼굴이 천하제일고수 오비원의 죽음을 애석해 할 때 월성의 가슴은 환희로 물들었고 두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드, 드디어… 복수를 했다.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어. 흑흑… 내가 그동안 말씀대로 행한 일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오비원이 죽을 때 월성의 나이 72세였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 월성은 105세가 되어 죽었다.

그가 죽은 후 그가 걸어온 삶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그를 추앙하고자 했다.

그는 과연 어디에 기반을 두고 살았기에 훌륭한 인격체로서 마지막까지 살다 갈 수 있었나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어떤 이는 월성이 무공의 달인이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학문적 성취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집에 있는 서적을 발견한 모든 사람들은 비로소 모든 것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발견된 책들은 이러했다.

장수만세(長壽萬歲), 진시황(秦始皇) 무작정 따라하기, 공동장수구역(共同長壽區域) 신비촌(神秘村), 내 몸 내가 고치련다, 장수문(長壽門)의 후예(後裔), 마왕(魔王)의 장수일기(長壽日記), 할 수 있다. 특별판 장수비결(부록 있음), 장수의 시대, 장수의 계곡 나우식가’, 나도 장수할 수 있으면 좋겠다, 황제의 검집에 숨겨진 비법.

이 외에 음식 조절에 대한 서적도 만만치 않았다.

표류후식(漂流後食), 천사지식(天使之食), 삼우인식단(三友人食單), 타락식단(墮落食單) 멀리하기, 천상비뢰식, 만선문(萬善門)의 후식(後食), 무당괴협특별식(武當怪俠特別食).

하나같이 쟁쟁한 초절정 식이요법 장수 비결 서적들이었다.

그의 집안 구석구석 벽과 천장마다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붙어 있었다.

1. 낙천적으로 생각하라.

2. 화를 승화시켜라.

3. 적당한 시간 수면을 취하라.

4. 물은 꼭 생수를 마셔라

5. 몸을 청결히 유지하라.

6. 밥은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라.

7. 술을 마시지 말라.

8. 적절한 운동을 하라.

9. 아침 식사는 반드시 해라.

10. 아름다운 것만 보고 들어라.

모두의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일이관지 소하천은 월성을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오비원을 죽일 수 있는 전설의 살수가 딱 한 분 계시지. 그리고 충분히 들어줄 수도 있는 분이시라네. 아니, 반드시 들어주실 거야. 그분은 이제껏 어느 누구의 청부도 거절해 보신 적이 없거든. 그러나 복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그건 자네가 복수를 하고자하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이야. 그 청부를 수락할 살수는 바로 하늘이기 때문이지. 그 누가 천명의 부름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말이야.”

어떤가, 자네는 하늘에 청부를 해보겠나?

* 작가의 말

마천루 스토리 4 - 마감의 공포

작가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고 한다면 언제일까? 아마도 백이면 백 마감을 이룬 때가 아닐까 싶다.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여서 각 권을 끝내기만 해도 세상을 훨훨 날아갈 것 같은 해방감에 취하기도 한다. 글을 마쳤다는 것이 그만큼 큰 기쁨인 것은 그만큼 그동안이 힘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마천루의 작가들도 거의 폐인처럼 마감의 나날을 보내다가 글을 마친 후에는 생기가 넘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글을 마쳤다고 해서 모두 기쁨만 찾아오는 것만은 아니다. 글을 마쳤다는 환호성도 잠시 각 작가들은 마감 이후에 반드시 행해야만 할 의무를 깜박하고서 다 하지 않았을 시엔 놀랍도록 두려운 살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온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살기인지라 그 공포를 직접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실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 공포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무당괴협전』의 작가 한성수님의 지난날 체험을 돌아보아야만 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한성수님의 경우가 왠지 더 실감난다고나 할까.

얼마 전이다. 한성수님이 마감을 마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였다. 그는 글을 끝냈다는 기쁨에 여유롭게 룰루랄라 휘파람이 저절로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그는 등골이 바짝 당겨지며 오싹한 한기를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갑작스럽게 차가운 물이 등에 끼얹져진 듯한 느낌과 비슷했다(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땐 남극의 추위가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간다라는 말도 했었다). 그는 휘파람을 멈추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귀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데다가 그는 어릴 적 귀신이 부를 때 뒤를 돌아보면 그 자리에서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황당한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혹시 강호에서 살인 청부업자들이 목을 노리듯 현대판 킬러라도 등 뒤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시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헉……!"

그의 눈이 등잔만하게 커졌고 그의 눈동자에는 뒤에서 노려보던 존재들이 투영되어 있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마천루 작가들이었다. 늘 보면서 호형호제하던 이들의 모습에 한성수님이 놀란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작가들 모두의 입가에 냉소가 머물러 있었고 몸에서는 풀풀 싸늘한 한기를 품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는 그들의 손에 각기 독문병기를 지니고 있었는데 어떤 이는 검을, 어떤 이는 주걱을, 또 어떤 이는 나무젓가락 등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짧은 순간 한성수님은 지금 순간 피하지 못한다면 어쩜 영영 세상에 머물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해…….'

마음속의 울림이 강하게 전해졌다. 그는 덩치가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비와 비길 만했고 사자후의 공력에 있어서는 사손에 버금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적으로 둔갑한 작가들의 숫자는 감당키 어려웠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대개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 풀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매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나중에 본인이 한성수님께 따로 물어보니 그때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위기를 느낀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발에 힘을 주고 공중으로 신형을 날렸다. 거대한 체구에 걸맞지 않는 놀라운 신법이었다. 그것은 능공허보까지는 아니었지만 그에 거의 필적할 만한 경공술이었다. 몸을 띄운 한성수님은 책상 칸막이 위를 솟구쳐 올라 맞은편으로 내려섰다. 그의 의도는 건너편 쪽의 유리 창문을 열고 밖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도망가는 것을 쳐다만 볼 리 만무했다.

일검에 산을 쪼개고도 아무런 생각도 없다는 무상검의 주인 일묘님의 검이 날았다. 역시 이름답게 검로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 쭉 뻗어갔다. 만일 한성수님이 창문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면 무상검에 찔린 꼬치구이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성수님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아무리 무상검이 생각이 없고 무상검을 시전하는 일묘님이 혼돈자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어도 검의 날카로움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창문으로 빠져나가려던 몸을 뒤로 빼고 피해낼 수밖에 없었다.

챙!

무상검이 벽에 박히며 온몸으로 울었다. 한성수님은 검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섬뜩함을 느꼈다. 만일 조금만 늦었더라도 검은 자신의 몸에서 울었을 것이 아닌가.

그는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공격에 그대로 있을 순 없었다. 독문병기인 금룡혈편이라는 회초리를 꺼내 들고 혼돈자 일묘님의 목을 감아갔다. 의도인즉 금룡혈편으로 목을 감은 후 내력을 주입해 머리를 날려 버릴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한성수님이 상대하는 인물은 안타깝게도 일묘님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그 주위로는 여러 사람이 노려보고 있지 않던가. 회초리가 뻗어가는 동시에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두 가닥의 경기가 한성수님의 가슴을 향해 나아갔다.

'뭐지?'

한성수님은 의문을 품음과 동시에 해답을 알았다.

나무젓가락!

'타락고교의 홍성화님이로군!'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강호를 울려대는 홍성화님의 솜씨가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무젓가락이 있는 곳에는 홍성화님이 있다는 말까지 강호에는 생겨나지 않았던가. 그는 뻗던 금룡혈편을 신속히 거두면서 나무젓가락을 쳐내야만 했다. 회초리의 중간 부분이 출렁이며 나무젓가락과 부딪쳤다. 나무젓가락은 내력이 잔뜩 실려 있었는데 회초리의 경력과 부딪치면서 아슬아슬하게 한성수님의 어깨를 빗나가 벽에 꽂혔고 한성수님은 그 충격에 잠시 몸을 떨어야만 했다.

'대체 왜……?'

그는 이 살인적인 공격에 치를 떨었다. 왜 이렇듯 매서운 살수를 전개한단 말인가. 도무지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들어 홍성화님을 바라보았다. 나무젓가락이 빗나가긴 했지만 홍성화님은 아직 살인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성수님은 도무지 탈출이 불가능함을 느껴야만 했다. 여전히 다른 이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홍성화님은 다시 나무젓가락의 종이를 벗겨내고 있었고 그 옆에 목정균님은 비뢰도를 날릴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한성수님은 힘으론 빠져나간다는 것이 불가하다 인정하고 한소리 크게 사자후를 터뜨렸다.

"왜…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이오?"

어찌나 강력한 내공이 실린 것인지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네 개 중 두 개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더불어 가까이에 있던 창의 유리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역시 사자후 신공은 명불허전이었다. 한동안 사무실 내에는 여러 기물들이 달그락거렸고 공기가 안정을 찾지 못하며 윙윙거렸다. 하지만 그런 소란 속에서도 모든 작가들은 어느 누구 하나 비틀대거나 쓰러지는 이는 없었다. 이들은 모두 다 생활 중에 사자후에 대한 면역이 되어 있었고, 또한 내공의 조예가 깊었기에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사자후의 호통이 나갔음에도 여전히 모두의 얼굴엔 은은한 분노와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다시 한성수님의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졌다.

"새로운 마음으로 글을 쓰기 위해 부단히 열심을 내고 있는 본인에게 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이오!"

그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다. 어디에도 흠잡을 데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얼굴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씩들…….

"허허… 거참,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거 너무하는군."

"염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구."

"흥! 다시 피가 튀어야 하겠군."

"말로 해선 안 되겠는걸."

"클클클."

사파의 거두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분위기는 자못 살벌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한성수님은 무슨 영문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만을 너무 갈구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뿐이었다.

'제길,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무엇이 문제일까?'

그때 바람과 벼락의 검을 소유한 최후식님의 입에서 한성수님이 알고 싶어하는 답이 나왔다.

"아직도 모르겠나?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한성수님이 침을 삼키는 지 목젖이 크게 울렁거렸다.

"……?"

예리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최후식님이 말을 이었다.

"그건 바로 한턱을 내야 한다는 것."

쿠궁!

그렇다. 결국 책을 끝낸 후에 한턱을 내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모든 작가들은 하루이틀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급기야 가슴속에서 시퍼런 칼날을 빼 든 것이었다. 한성수님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이런! 그 중요한 것을 내가 깜빡하다니… 아차했으면 명대로 살지도 못하고 하늘로 갈 뻔했구나. 하지만 여하튼 무서운 인간들이다.'

한성수님이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놀란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 모두의 눈은 어떤 답이 나올지 탐욕스럽게 변해 있었다. 만일 바라던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만 같았다. 한성수님이라고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통박을 굴렸다.

'이번엔 대체 얼마나 뜯길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래! 바로 그렇게 하는 거야!"

그는 마음속으로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좋습니다. 당연히 한턱을 내야죠. 오늘은 가지고 온 돈이 없으니 수일 내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의 이러한 말속에는 깊은 심계가 담겨 있었다. 그가 말한 수일 내로 날짜를 잡겠다는 말에는 생략된 문장이 있었다.

'사람이 가장 적을 때 한턱 내도록… 해야지.'

하지만 다른 작가들은 전혀 그런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약속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기뻐했다. 그들은 들고 있던 무기들을 사방팔방으로 던져 버리고 싸늘한 냉기를 거두었다. 아까까지 사파의 거두들로 보였던 작가들은 모두 순식간에 정파로 돌아섰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주 단순한 인간들인 것이다. 아마도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등장하는 원숭이들과 막상막하의 인간 군이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

위에 기록된 이야기는 약간의 과장이 있었지만 태반이 진실로 가득 차 있다. 어떤 누구라도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어영부영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는 위에 한성수님과 같은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천루에서는 마감을 극복한 위대한 승리 이후에는 다시 한턱을 쏴야 하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그럼 왜 이렇듯 작가들이 한턱에 목말라 하는가. 눈치 빠른 독자들 중에는 어느 정도 알아차린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그동안 먹지 못해 허기진 배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평소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을런지(이런 비참함의 원인은 순전히 게으름이 원인이라는 설이 가장 강력하다).

일례로 짜장면을 먹으면 처음에는 화기애애하게 먹다가 끝에 가서는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 단무지 때문이다. 잠시 눈알이 핑그르르 돌며 서로를 살핀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무젓가락을 날린다. 그러면 놀랍게도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불꽃이 사방으로 튀기며 접전이 벌어진다. 그것은 한마디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당해보면 진짜 처절함이 넘쳐흐른다. 과연 우리는 언제쯤 단무지의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산동장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특대로 단무지를 주라고 부탁을 드려야 할까.

하지만 이 모든 티격태격이 충격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삶의 활기가 아닐지 싶다. 그런 일이 없다면 얼마나 밋밋하고 재미없을까. 그렇게 함께 뜻을 같이하고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마천루 작가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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