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124.
오비원의 말투엔 위압적인 분위기나 압도하는 기운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공손함만이 가득 담겨 있을 뿐이었다.
당운각이 당가의 장로이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고 해도 이제 90세에 이른 오비원에 비하자면 아직 새파랗게 젊은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오비원이 마흔 살이었을 때 당운각은 십여 세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오비원은 충분히 거만스럽게 말해도 될 위치에 있었지만 스스로를 낮추었다.
이렇게 되자 더욱 조심스러운 것은 당운각이었다. 겸손이란 원래 높은 지위로 올라갈수록 행하기가 힘든 법이다. 낮은 지위에 있을 때는 겸손을 보이다가도 직책이 높아지면서 자신을 망치는 사람들이 태반인 것이다.
당운각은 자신 스스로 장로의 신분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당운각이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먼저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원래 당운각은 이렇듯 자신을 낮추어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절로 깍듯한 말이 나왔다. 만일 오비원이 비틀어지게 나왔다면 비록 무림의 배분이나 연수가 높고 많아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높였을 것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저는 오행문에 일을 보기 위해 잠시 본가를 떠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당가의 사정을 들어보니 참담하기 그지없는 지경에 처한 것을 보게 되었답니다…….”
말을 하며 당운각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고 이 말들을 시작으로 모연에게 들었던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
“…부디 천선부에서 당가를 위해 중재해 주시길 머리 숙여 바랍니다.”
당운각이 말을 맺을 때 어느덧 오비원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운각의 입장에서는 결코 기대했던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보다는 나은지라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반응을 기다렸다.
‘과연 건곤진인은 어떻게 나을까?’
덥석 손을 잡으며 ‘도와주겠소이다’라고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리라.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오비원의 입에서는 너털웃음이 나왔다.
“껄껄껄걸… 하하하하…….”
비웃는 것이나 무시하는 것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분명한 즐거운 웃음이었다.
‘이건 승낙하겠다는 뜻인가?’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던 당운각은 퀭한 표정으로 오비원을 바라보았다. 오비원도 그런 당운각을 보았음인지 애써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했다. 한 손을 젓고 또 한 손은 입을 가렸지만 그래도 웃음은 계속 새어 나왔다.
오비원의 뒤쪽 좌우에 선 두 호법은 겉으로는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속으로는 뜻밖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근 몇 년에 걸쳐 자신들의 주인이 이렇게 즐겁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비원은 한참을 웃다가 애써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하하, 이거 너무 실례가 많았소이다. 원래 이렇게 웃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만 너무도 재미가 있어 웃지 않을 수가 없었구려. 아마도 지금 들은 이야기가 내 생애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 장로께선 아주 재밌는 분이시구려. 앞으로는 자주 찾아주시오. 자, 그럼 이제 마음껏 웃었으니 농담은 그만 하시고 당가에 생겼다는 문제를 말씀해 보시구려.”
건곤진인 오비원은 당운각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이다. 처음부터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오독관문을 지났다는 것과 그 거지 떼들이 당가에서 행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저 듣기 좋은 농담일 뿐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당운각의 얼굴은 검게 변해 버렸다.
퀭∼
그로선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도 모연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비원과 똑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 당시 모연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운각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단언하건대… 제가 말씀드린 것은 모두 사실입니다.”
아직까지 웃음의 여운을 즐기던 오비원과 호법들의 얼굴이 그대로 멈췄다. 또다시 농담이라고 믿기엔 당운각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이다.
“허험… 험험…….”
오비원은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헛기침을 연신 토해낸 후 말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현재 당가에 일어난 일이라 이겁니까?”
“그렇습니다.”
“으음…….”
오비원은 웃을 수 없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웃는다는 것은 매우 실례되는 행동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번에는 꾹 참고 속으로 사정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고수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겉으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었지만 속에서는 웃느라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런 모습이 당운각에게는 매우 심사숙고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일말의 가능성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허나 정작 오비원의 마음은 달랐다.
‘강호에 비록 정파와 사파가 대립하고 있어도 지금껏 특별한 분쟁은 없었다. 이번엔 아주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구나. 누굴까? 천기를 살필 때 보았던 영웅인가?’
“큰일이로군요.”
오비원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자 당운각의 얼굴이 상기되었고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부디 제발…….’
오비원의 말이 이어졌다.
“으음… 그런데 이번 일은 천선부가 관여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겠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실 묻는 당운각 스스로도 무엇이 문제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이후에 던질 한마디를 위해 이와 같이 물었다.
“그건 당가에서 내세운 오독관문의 규칙 때문입니다. 그 규칙은 다섯 차례 독을 통과하면 당가를 소유할 수 있다고 한 것이지요. 그 규칙은 바로 당가에서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닙니까? 거기엔 걸인이라고 해서 부적합하다는 말은 없지 않습니까. 실제 당가에서도 진개방에 독으로 시험을 했고 말입니다. 강호는 신의를 생명처럼 여기고 있음은 당 장로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특히나 문파에서 선포한 것은 더욱 소중하겠지요. 그것은 비록 천선부가 힘이 있다 해도 바꿀 수 없고 바꾸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당운각은 당연히 이 정도의 말은 나오리라 짐작했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
“진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 또한 그와 같은 문제는 특별히 이의를 제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당가에 잠입, 아니, 찾아왔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진개방’이라고 하며 진정한 개방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방에 대한 명백한 도전 행위입니다. 개방은 과거로부터 정파의 한축을 담당하며 그 힘이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몇몇 되지도 않는 이들이…….”
당운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몇몇 되지도 않은 이들이라는 말을 꺼내고 보니 그들 몇몇에게 당가가 농락당했다고 생각하자 부끄러워진 것이다.
“…자신들이 정통 개방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개방 문제로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정파에 대한 도전이며 곧 천선부에 대한 도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천선부에서는 이번 기회에 개방의 이름을 도용하는 무리들을 징계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당운각의 말은 논리가 확실했다.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가 혈곡이나 다른 사파에 찾아가지 않고 천선부에 온 것도 바로 이런 논리를 펼쳐 천선부를 움직여 보려 했기 때문이다. 천선부의 정파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심을 자극해 진개방의 무리들을 강호에서 축출시킨다는 생각이었다.
“음… 듣고 보니…….”
당운각은 자신의 말이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비원이 기대에 찬 당운각의 눈을 보며 말했다.
“…본인의 생각과 많이 다르군요.”
당운각의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맥이 탁 풀렸다.
“……!”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들어봐야 했다.
“당 장로님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가 가외다. 하지만 개방과 진개방이라는 곳의 문제는 정파 전체로 적용할 문제는 아닌 듯싶습니다.”
당운각의 눈빛이 흔들렸다. 더 이상 들어보나마나 천선부를 통해 당가를 복구하는 것은 물 건너간 것이다. 오비원의 말이 이어졌다.
“그건 단지 개방 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겠지요. 다른 문파에서 개방을 삼키려 한다면 모를까 단지 자신들이 진정한 개방이라고 나선다면 집안 문제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 경우엔 오히려 끼어드는 것이 큰 실례가 되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번 개방과 진개방의 일에 있어서는 강호의 어느 문파라도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당운각은 어느 정도 체념하고 있는 상태여서 그러려니 했는데 오비원의 마지막 말은 그의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느 문파라고 관여해서는 안 된다니!’
천선부에 도움을 얻지 못할 것 같아서 다른 곳을 찾아보려고 했건만 이젠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제길, 이게 뭐란 말이냐!’
이제 거의 당운각의 얼굴은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실 당운각은 오비원이 왜 이런 식의 말을 했는지에 대해 그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아마 그 사실을 알았다면 천선부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 오비원은 현재의 개방을 그리 좋게 보지 않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개방전대 방주인 천상신개 엽지혼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오비원은 엽지혼이 어떻게 실종되었으며 죽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에게 엽지혼은 중원 오대고수 중 한 명이라기보다는 절친한 친구이자 때론 삶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그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뒤 오비원의 상실감은 매우 컸다.
그 후 개방은 엽지혼이 걸어가던 길과는 반대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오비원은 탐탁지 않았으나 크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당운각이 비록 정파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당운각이 여전히 절망에 잠겨 있을 때 오비원이 편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구려. 당가의 오독관문은 심히 어려워 본인도 감히 시험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았건만 진개방의 방주라는 분이 거뜬히 통과했다니… 대체 어떤 사람인지 기회가 닿으면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구려.”
당운각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오직 유구무언. 그는 망연자실해져 넋이 삐진 사람처럼 멍해졌다. 거기에 오비원이 정겨운 미소와 함께 차를 권했다.
“자, 차가 많이 식었구려. 어서 드십시오.”
손을 내밀며 권하는 오비원의 말이 당운각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지금 그의 머리는 환상과 환청이 요란하게 난무했다.
-저기 거지다. 거지라고!
한 손에 사탕을 된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며 자신을 놀려댔고 빨래하고 돌아가는 아낙네들은 위아래로 훑어보며 지나갔다.
-쯧쯧쯧, 늙어가지고 거지 노릇이라니… 자식도 없나 봐… 불쌍한 사람 같으니라고.
이윽고 당운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고 그중엔 오비원도 섞여 있었다. 오비원은 가까이 다가와 동전을 발 밑에 떨어뜨리며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그렇게 정신이 나간 채로 당운각은 천선부를 나섰다. 어떻게 배웅을 받았는지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도 몰랐다. 어제와 똑같은 세상이었지만 당운각에게만큼은 이제 거지같은 세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쓸쓸히 당가로 향했다.
당운각이 천선부를 떠난 후 오비원은 좌호법 동추에게 명했다.
“너는 지금 즉시 혈곡으로 떠나 이 서신을 혈곡의 곡주 단천우에게 전해라.”
오비원으로서는 사파 계열인 당가가 진개방의 수중으로 떨어졌기에 혈곡이 모종의 행동을 취해 진개방이라는 곳에 압력을 가할 것에 대해 경고를 주고자 함이었다.
“존명.”
동추가 절도 있게 답한 후 그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오비원은 혼자 남아 아까 당운각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진개방이라… 왠지 엽지혼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하지 않는가.’
그의 직감은 표영의 행적에서 어렴풋이 엽지혼의 흔적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