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122.
막경은 상대가 자신이 어찌해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님을 알고 전의를 상실했다. 게다가 옷차림을 보아하니 거지가 아닌가.
그는 황급히 외쳤다.
“우린 적이 아닙니다!”
하지만 능파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소매를 가볍게 떨쳐 단두사를 꺼냈다. 햇빛에 순간순간 번쩍거리는 단두사는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차르르 움직였고 능파의 움직임에 따라 어느덧 막경의 목을 휘감아버렸다.
만일 여기에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테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목은 영영 몸과 분리될 것이다.
다행히 막경은 자신의 목을 휘감은 것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눈치가 없진 않구나. 하하하!”
능파는 껄껄거리며 웃은 뒤 막경의 등을 툭 쳐 마혈을 짚은 후 신형을 날렸다. 다른 놈을 잡으러 가는 것이다.
능파가 막경을 제압하고 이동할 때 능혼도 청면수 해청을 제압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이는 흑월수 손동뿐이었다.
손동은 이미 두 명의 동료가 제압당한 것을 지켜본 터라 마음을 비우고 가만히 서 있었다. 싸우려는 의지가 전혀 없음을 보이고자 함이었다.
능파와 능혼은 손동의 곁에 이르러 거센 발길과 주먹을 날렸다. 그 공격은 손동을 직접적으로 노린 것이 아니라 아슬아슬하게 한 치도 안 되는 간격으로 주먹과 발길이 스쳤다.
만약 손동이 조금만 몸을 움직인다면 엄중한 상처를 입을 것이다. 둘의 움직임이 번개같이 좌우 위아래에서 안개처럼 움직이며 공격할 때 손동은 식은땀을 흘렸다.
‘제길,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나.’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는 표영이란 분께 긴히 전할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 말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위협을 가하며 짓궂게 몰아가던 두 사람의 동작이 멈추었다.
능파가 손동의 멱살을 쥐며 성난 얼굴로 말했다.
“어떤 이름인데 네깟 놈이 감히 함부로 입에 올리느냐!”
흑월수 손동이 캑캑거리면서 간신히 답했다.
“네네… 그분의 집안일입니다……. 전 그저…….”
집안일이라는 말에 능파가 손을 내려놓았다. 지존의 집안일이라는데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거짓말로 드러나면 그때 작살을 내더라도 지금은 참아야 했다. 하지만 경고를 보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만일 허튼수작을 부린 거라면 너의 혀를 뽑아버리고 대신 뱀의 혀를 달아주겠다.”
험악하기 그지없는 말에 손동은 안색이 핼쑥해졌다.
‘우리가 찾는 사람과 이름이 같긴 한데… 무공이 너무 강하잖은가. 이름만 같고 다른 사람이면 큰일 나겠는걸.’
손동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표영이라는 이가 이 정도의 고수를 수족처럼 부린다면 필시 그도 대단한 고수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은 자신이 찾는 자가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능파와 능혼은 다른 두 명의 살수들의 혈도도 풀어주고서 함께 표영에게로 갔다. 그들이 이르렀을 때 표영은 제갈호, 교청인과 함께 바닥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능혼이 표영에게 다가가 공손히 입을 열었다.
“저들이 쫓아온 무리들입니다. 사실인지 모르나 잡고 보니 방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표영은 윗몸을 일으켜 앉은 후 세 사람을 보고 말했다.
“어이, 거기… 이리들 오시오.”
세 명의 살수는 어정쩡한 자세로 표영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젊은 거지가 이 무리의 두목이란 점에 약간의 의아함과 함께 긴장했다.
표영은 세 사람이 눈앞에 이르자 손으로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여기 앉으시구려. 하하.”
“네?”
세 사람은 서 있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털썩 앉기도 뭣해서 엉거주춤한 상태로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했다. 그때 능파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네놈들 귀가 먹었느냐? 방주님의 말씀이 정녕 안 들린단 말이냐!”
그 말에 세 명의 살수들은 얼른 표영 옆으로 앉았다.
“그래, 어떤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혼원수 막경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청막의 사람들입니다…….”
청막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서두로 말을 꺼내자 표영은 처음 들어보는 조직의 이름인지라 호기심 어린 음성으로 되물었다.
“청막이라면 어떤 곳입니까?”
막경과 동료들은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 고수들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청막을 모른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흠흠… 청막은 청부 조직입니다.”
특별히 숨길 만한 이야기도 아닌지라 막경이 편하게 말하자 표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청부라… 대충 무슨 일을 의뢰받으시는 겁니까?”
“그야… 뭐 당연히 사람을 죽여주죠.”
그 말을 듣고 표영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참 생긴 것과는 달리 농담을 잘하시는군요.”
막경도 따라 웃었다.
“하하하, 제가 여기까지 와서 농담하겠습니까? 아주 재밌으시군요.”
막경과 동료들이 웃음 지을 때 표영의 웃음은 뚝 그쳤다.
“농담이 아닙니까? 그럼 진짜 사람을 죽여준다는 말입니까?”
“그럼요, 대신 그냥 죽이지 않죠. 그만한 돈을 내면 확실히 죽여준답니다.”
표영이 처음과는 달리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말투도 삐딱하게 물었다.
“정말입니까?”
막경은 왠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지만 설마 청부 조직이라는 것으로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네, 그럼요.”
“음, 그럼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표영의 목소리가 조금 차가워졌다.
“네.”
“그쪽 분들은 이제껏 몇 명이나 죽였소이까?”
각자는 대략 머리로 셈을 해보고 차례로 대답했다.
“저는 대략 41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부끄럽게도 아직 32명밖에 안 됩니다.”
“저는 38명이 되는군요.”
그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표영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고 소리쳤다.
“이런 개새끼들을 봤나!”
느닷없는 호통에 세 명의 살수들이 놀라 일어났고 능파 등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 새끼들 붙잡아!”
세 명의 살수들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강호에는 수많은 문파가 있고 또는 직업이 있는 것처럼 살인청부는 자신들의 천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그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능파 등이 우르르 달려들어 세 명의 몸을 붙들었다.
살수들은 이미 능파와 능혼에게 잡힐 때부터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기에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반항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잘못한 것이 있어야 도망을 치든 대적을 하든 할 것인데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는 단지 집안일을 전하러 왔을 뿐입니다.”
“흑조단참 상문표님의 부탁을 받은 겁니다. 저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비록 저희가 살수들이지만 대인을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표영은 더 이상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세 명의 뺨을 차례로 갈겼다.
짜자작!
“네놈들에게 묻겠다. 너희의 목은 얼마 정도면 끊을 수 있느냐?”
살수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들은 그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는 전혀 던져 본 적이 없었기에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목이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지만 자신들의 목숨만큼은 절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얼마냐니까?”
“…….”
“값으로 매길 수 없다는 것이냐? 그럼 너는 얼마냐?”
그 옆에 있는 청면수와 흑월수에게 차례로 물었지만 어느 누구도 말을 하진 못했다.
표영이 얼굴에 가소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비겁한 놈들! 돈으로 사람을 죽이다니… 이런 놈들이 있는 한 돈을 가진 자라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누구든지 죽일 수 있지 않겠는가. 버러지 같은 놈들! 어지간한 사파 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이야.’
“이놈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콱 그냥 죽여 버릴까? 아니, 아니야… 그러면 똑같은 놈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래도 살려두기엔 너무 기분이 더럽잖아. 그냥 손만 잘라 버릴까? 아니지, 그건 너무 약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표영은 그들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살수들은 표영의 말에 따라 얼굴이 환해졌다가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했다.
표영이 동작을 멈추고 세 사람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희는 살고 싶으냐?”
“네!”
번개 같은 대답이었다.
“좋다. 그럼 너희들은 앞으로 이틀 동안 죽음을 체험토록 한다.”
“네?!”
“너희가 이틀간 묻힐 무덤을 직접 파도록! 실시!”
‘죽음을 체험하다니…….’
‘땅에 묻힌다니……!’
‘혹시 꺼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살수들은 몸과 마음이 얼어붙었다. 얼빠진 표정을 짓던 그들은 일제히 광란의 몸부림을 쳐대기 시작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왜 그러시는 거예요!”
“이렇게 죽을 순 없어요. 어떻게 살아 있는 채로 사람을 묻을 수… 으아악∼!”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그들은 능파 등에게 붙들려 있는 가운데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매를 버는 것에 불과한 몸짓일 뿐이었다.
“이놈들이 사람은 여럿 죽여 놓고 겁은 또 많네. 가만히 있지 못햇!”
표영이 달려들어 타구봉으로 난타하자 능파와 능혼, 그리고 제갈호와 교청인도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렸다.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된 뒤 바닥에 뻗어버린 세 명의 살수들이 거친 숨을 내쉴 때 표영이 다시금 말했다.
“빨리 파는 게 좋은 거야. 언젠가는 파야 할 거니까 말이다.”
결국 피할 수 없는 길임을 인지한 살수들은 힘겹게 일어나 자신들의 무덤을 팠다. 한 줌 한 줌 땅이 파질 때마다 드는 기분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울적하더니 중간 정도 팠을 때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약 일식경(30분)에 걸쳐 자신들의 무덤을 파낸 살수들은 표영의 말없는 손짓에 따라 시체마냥 흐느적거리며 걸어가 구덩이 속에 얌전히 누웠다.
“자, 이틀 동안만 누워 있도록. 그동안 땅속에서 돈 때문에 죽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라.”
표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능파 등이 우르르 달려들어 흙을 덮었다. 다리가 덮이고 가슴이 덮이고 얼굴이 덮여오자 설움과 절망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이틀 후에 꺼내준다고 했지만 그 후에 살아나리란 보장은 없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란 생각이 든 것이다.
땅속에서 호흡하는 데는 크게 지장은 없었다. 결코 무공이 낮은 것이 아닌지라 가늘게 공기를 들여 마실 수 있었던 것이다.
묻힌 지 반 시진(1시간)정도가 되었을 때 살수들은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도 황당했기에 그냥 울고만 싶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지극히 고요함 속에서 한 시진이 지날 때 이들은 귀를 자극하는 괴이쩍은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소리가 커졌다.
벌레가 움찔거리는 소리에서 파도가 밀려드는 소리 정도로 커졌다고나 할까.
지하의 소리는 음산하기 짝이 없어 두려운 공포로 심장을 짓눌렀다. 그것은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었다.
소리는 점점 심장을 파고들더니 이젠 급기야 눈을 감고 있는 살수들에게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