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120.
“헉!”
절로 경악성이 터졌고 침이 꼴까닥 삼켜졌다.
운형학이 짧은 경악성을 마쳤을 때는 어느덧 소시타의 칼은 칼집에 얌전히 들어가 있는 채였다. 운형학은 상대가 모질게 마음먹었다면 자신의 목이 달아났을 것임을 알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주접을 떤 소인을 용서하십시오!”
운형학은 머리를 연신 굽실거리며 힐끔힐끔 삿갓 안쪽을 바라보았다.
마주 볼 때는 몰랐으나 아래쪽에서 올려보자 한눈에 동영의 칼잡이임을 알아보았다.
‘쪽발이로구나. 섬놈이 어디서 감히! 필시 천선부를 찾는 것도 호승심 때문이겠지? 싸우기만 좋아하는 미련한 놈들이 어디 가겠는가. 내 결코 편하게 찾을 수 있도록 돕지 않으리라.’
“저는 사실 보잘것없는 마을의 무사에 불과합니다. 천선부주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세히 못 알아들을 것을 생각해 알지 못한다, 라는 부분은 천천히 그리고 명확하게 발음해 주었다. 소시타는 그 말을 알아듣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천선부는 천운산에… 천운산 어디…….”
천운산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었다.
“대인,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지들로 이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거지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거지들이 천운산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 번 거지들이 천운산을 알고 있다고 말한 운형학의 속셈은 엿먹어보라는 뜻이었다. 운형학은 현재의 개방이 거지들의 모습을 탈피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일반 거지들에게 물어본다면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소시타는 상대가 겁에 잔뜩 질려 뱉어낸 말이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답지 못하다. 어리석은 녀석일까?”
소시타는 그냥 말해야 하는 것을 의문형으로 말하고선 비웃음을 던지고 킬을 떠났다.
“거지… 거지…….”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일단은 거지를 찾도록 하자.’
소시타의 걸음은 다시 거지를 찾아 옮겨졌다.
소시타는 새벽같이 일어나 거지들을 찾아 나섰다.
거지라면 쉽게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개똥도 약에 쓰려면 귀하다는 괴상한 법칙이 적용된 것인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침 해가 솟아오르고 대지에 빛이 비출 때 소시타의 눈에 기쁨이 일렁였다.
“거지 떼들이다.”
이제껏 살면서 거지가 이렇게 반가워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다섯 명이나 되었다. 소시타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거지들에게 향했다. 그는 평상시에 무공의 흔적을 나타내려 하지 않기에 발걸음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이 걸었다.
그가 거지 떼 위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자 거지 떼들이 꿈틀대면서 눈을 떴다. 그중 젊은 거지 하나가 지껄였다.
“누가 아침부터 햇빛을 가리는 거야?”
그 목소리의 주인은 표영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드러누운 거지들은 당연 능파와 능혼, 그리고 제갈호와 교청인이었다.
능파와 능혼은 거지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일반인들에게 한 명의 거지로서의 모습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상대가 무림인이라면 입장은 달라졌다. 철저히 무림인으로서 대처해 나가는 것이다. 능파와 능혼은 이미 누군가가 다가온다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지만 상대의 그저 평범한 걸음을 보고 그리 크게 생각지 않고 있었다.
소시타가 삿갓 안쪽에서 말했다.
“너희는 거지일 것이냐?”
표영이 아침부터 무슨 말인가 하고 반문했다.
“거지일 거냐니? 이미 우린 거지인데 또 거지일 거냐는 뭐야?”
후닥닥 뱉어낸 말에 소시타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너희는 거지일 것이냐?”
“어허… 우린 이미 거지라니까 그러네. 삿갓이나 벗고 이야기하시오.”
표영이 답답하다는 듯이 일어나 삿갓을 벗기려 했다. 말도 괴이하게 하고 뭔가 이상해서 혹시 정신 이상자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표영의 손은 삿갓을 벗겨내지 못했다. 어느새 소시타가 칼을 뽑아 자신과 표영 사이를 칼로 그어갔기 때문이다. 느닷없는 칼질에 일행이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표영이 손을 옆으로 두고 자제시키지 않았다면 주먹이 날아갔을 터였다.
소시타가 말했다.
“너희들은 거지니 말해야 할 것임이다.”
그 말에 능파와 능혼이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듯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이 자식아! 거지니까 어쩔래!”
하지만 소시타는 전혀 꿀림이 없이 자기 말만 했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고 거지 따위는 크게 문제될 것이라 생각지도 않은 터였다.
“거지 두목이 누구냐니까?”
이 말은 ‘거지 두목이 누구냐?’라는 질문인데 약간 이상하게 꼬여 버린 채 뱉어졌다.
“나다.”
표영이 말하자 소시타가 물었다.
“내 이름은 소시타 고로스케, 천운산에 오비원을 만나러 왔다. 인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표영은 천운산이고 오비원이고 알지 못했다. 제갈호와 교청인이 알고 있었지만 둘은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결코 이 삿갓 쓴 놈이 선한 목적으로 물어본 것이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표영이 손을 내저으면서 귀찮다는 듯 말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봐, 우린 바빠. 거지라고 늘 시간이 많은 줄 아는 모양인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알겠어? 그러니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고. 야, 다들 누워서 눈 좀 더 붙이도록 하자.”
표영이 자라고 하면 자는 것이었다.
능파와 능혼은 잠이 올 리 만무했지만 하라면 해야 하는 것이다.
소시타는 한낱 거지 떼가 세게 나오자 어이가 없었다.
“죽고 싶어서 그렇구나.”
표영은 아까도 하마터면 손이 잘릴 뻔했던지라 이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아니, 이게 어디서 시비를 거는 거야? 너, 누구냐!”
표영이 자리에서 누운 채로 돌멩이를 손가락에 끼워 날렸다.
피웅-
그러자 이번에는 소시타가 미처 피하지 못했고 삿갓이 돌멩이에 맞고 뒤로 벗겨졌다. 나타난 모습은 아주 괴이쩍은 모습이었다.
이마가 훤하게 드러난 모습에 위로 뾰족하게 머리를 말아 올리고 콧수염이 얍삽하게 난 것이 중원인이 아니었다.
일행 중 가장 견식이 높은 능혼이 누운 채로 말했다.
“섬 동네 동영의 칼잡이인 것 같습니다.”
“동영이라…….”
표영이 어디서 들은 듯한 기억을 더듬다가 무릎을 쳤다.
“그럼 간혹 나타나서 해적 짓을 한다던 그 쪽발이로군.”
게으른 가운데서도 운학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 것이었다. 운학 노인에게서 동영 섬사람들이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싸움을 좋아하고 약탈을 즐긴다는 것을 들은 터였다.
능혼 등이 맞장구쳤다.
“그렇습니다. 아주 개새끼들입니다.”
“허허, 그런데 왜 왔지?”
소시타는 삿갓이 벗겨지고 거지들끼리 뭐라고 씨부려 대자 오른손이 어느새 칼자루에 이르러 있었다.
“거지들이 제법이로세.”
그는 이제 마지막 기회를 줄 참이었다. 빌어먹는 거지들의 삶이 그리 정상이 아니고 힘드니 깨끗하게 한칼에 고통 없이 죽여줄 참이었다.
‘하지만 세상엔 거지들이 많은 법이지.’
다른 곳에서 또 찾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의 마지막 경고성이 터졌다.
“오비원이 있는 곳을 알려라.”
표영은 대책 없이 계속 오비원만 찾는데다가 버르장머리 없이 계속 억압적으로 나오자 자리에서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거 봐라? 내가 네 친구냐! 언제 봤다고 계속 반말이야. 반말이!”
표영이 느물거리며 일어서자 일행도 따라 일어나며 한소리씩 지껄였다.
“이 새끼 아주 웃긴 놈일세.”
“쪽바리에게 무시당할 순 없어.”
“섬 촌놈이 어디 와서 까부는 거냐.”
“흥, 고생 좀 해야 정신 차리려나.”
소시타는 그저 가소롭게만 여겨졌다.
그는 가만히 숨을 고르며 일격을 날릴 태세를 준비했다. 지껄이고 있던 입은 머리와 함께 땅바닥을 구르리라.
하지만 사태는 그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표영이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갑작스레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마침 그 순간은 소시타가 숨을 들이쉬는 중도라 매우 절묘한 시점에 닿아 칼보다 표영의 주먹이 빨랐다.
퍼억!
정확히 면상을 가격당한 소시타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소시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일반 거지가 날린 주먹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기절하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하지만 정작 표영이 주먹을 날린 것은 매우 빠르고 정확하고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강룡십팔장처럼 공력을 더해 공격한 것이 아니었기에 치명적이라고까진 할 수 없었다.
표영으로서는 아까 칼이 한번 휘둘러져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크게 대단하다고는 생각지 않은 터였다.
‘이 자식들!’
소시타가 분노를 폭발시키며 칼을 뽑으려 했지만 그것도 뜻한 대로 되지 않았다. 일제히 능파와 능혼, 그리고 제갈호와 교청인이 달려들어 짓밟아 버린 것이다.
“어디서 감히 깝죽대는 것이냐!”
“죽어라, 이 자식아!”
“다시 섬으로 돌아가라. 어디서 싸움을 하러 온 것이냐!”
“이런 쪽바리 같으니라고!”
집단 폭행이었다.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동영 최고수인 소시타는 정신을 아득히 잃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밟았을까. 대략 한식경(30분) 정도 밟았을 쯤 소시타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흐물흐물 기절해 버린 상태에서도 몇 번 더 밟힌 소시타는 꿈조차도 꾸지 못하고 뻗어버렸다. 가느다란 신음 소리만 나는 것에 표영이 수하들을 긴박하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마디.
“튀어!”
그 말에 표영과 일행이 신형을 날려 소시타에게서 멀어져갔다. 사실 그냥 천천히 가도 될 일이었지만 표영은 장난기가 일어 해본 행동이었다.
소시타가 깨어난 것은 늦은 밤이 되어서였다. 차가운 기운이 땅에서 스멀거리며 올라오자 몸이 움츠러들며 정신이 든 것이다.
‘아… 여긴 어디지……?’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거지 떼들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소시타는 분노에 이글거리며 칼을 뽑아 들려 했다.
“어……?”
그의 입에서 짧은 경악성이 터졌다. 손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손이 축 처지고 뇌에서 명령을 보내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으아악……!”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가 처음에 중원에 발을 디뎠을 때에는 자신감으로 충만했고 생은 활력으로 넘쳐 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외상으로는 허리에 금이 가고, 오른손의 신경이 끊어지고, 다리뼈도 부러져 버렸다.
거기에 내상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이 천하제일고수라는 오비원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거지들에게 얻어터져 반병신이 된 것이 아닌가.
다케시마가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정한 승부는 나 자신과의 결투, 거기에서 이기고 또 이기면서 결국은 천지만물에 나를 동화시켜 나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처연한 표정으로 절룩거리며 길을 걸을 때 짐승의 부르짖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그것은 늑대 떼였다. 늑대 떼들이 느닷없이 소시타에게 몰려온 것은 그가 내지른 괴성 때문이었다. 원래 늑대 떼들은 달을 보며 울부짖으려고 했었는데 소시타가 하도 시끄럽게 소리 지르자 울화가 치밀어 몰려든 것이다.
“뭐, 뭐냐, 이건 또!”
소시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도망치기 급급했다. 결국 늑대 떼에게까지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긴 소시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병신이 된 몸으로 동영(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