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16장 (117/199)

 # 116

116.

제10장 각기 자기 길로 가고

남해검파와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이틀 후 떠나갔다.

교청인과 제갈호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더욱 훌륭한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다짐했다.

능파와 능혼은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그나마 조금 정들었던 교청인과 제갈호를 죽이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삼 일이 지나 당문천과 장로들, 그리고 십영주들은 표국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인도로 향했다. 그들의 뒷모습은 너무도 쓸쓸해 보여 많은 당가인들의 마음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뒷날의 이야기이지만 당문천 등은 손패에게 온전히 호송되었고 그 후에 걸인도로 옮겨지게 되었다. 손패는 당문천을 보았을 때 감동에 젖어들었다.

‘마교의 미래는 밝도다.’

명명이 자자한 당가의 지도자들이 모두 진개방의 수하가 된 것이다. 하지만 손패보다 더 좋아한 사람은 만첨과 노각이었다.

둘은 강호의 고수로 이름을 날리는 당가인들을 교육시킨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당문천 등은 먼 길을 이동해 결국 거지 수련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하루하루 지옥 같은 나날들을 보내며 과연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죽어야 하는지를 날마다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들의 수련은 과거 표영이 전수했던 그대로였다. 영약 복용이라는 미명 아래 매일 개밥을 먹어야 했고, 호신강기를 익힌다고 뇌려타곤을 외치며 시장이며 길바닥을 굴렀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환영하는 분위기였고, 동네 할아버지들과 아이들 역시 매우 만족해했다.

당문천 등은 그런 가운데 서서히 거지로 적응하기 시작했고, 몇 달이 지나면서는 실실거리며 농담도 나눌 만큼 스스로를 거지로 규정지어 갔다.

비록 이 자리에 마땅히 와야 할 삼장로 당운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그도 돌아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삼장로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녀석, 나중에 따로 고생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하면 좋았을 것을…….”

진개방의 분타주로 스스로를 인정하기 시작한 당문천의 말이었다.

당가의 삼장로 당운각이 모연을 만난 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 천운(天運)이라고 할만 했다. 만일 그가 중도에 모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상상하기 힘든 고초를 당했으리라.

어쩌면 당문천 등은 자신들만 당한 것이 억울하다며 나중에 온 당운각을 더욱 심하게 갈구었을지도 몰랐다.

당운각이 오행문의 문주 설충의 회갑연에서 돌아오고 있을 때는 당문천과 다른 장로들이 오백 대를 매일 서로 치고 받으며 게거품을 물고 있던 때였다.

그는 설충과 친분을 쌓고 있는 터였기에 당가 대표의 입장으로 참석했었던 것으로 이번에도 거나하게 취할 수 있어 흡족한 기분으로 돌아오던 차였다.

그렇게 싱글거리며 콧노래까지 부르고 오던 당운각이 거의 당가 부근에 이르렀을 때는 파송식도 끝이 나고 당문천 등이 걸인도로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당가에 거의 이른 바로 그때 당운각은 시녀 모연을 만나게 되었고 곧바로 그녀의 휘둥그레진 눈과 함께 입을 귀까지 찢어가며 경악하던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평소 당운각이 알고 있는 모연의 눈은 조그마했다. 그리고 입술은 비록 도톰하긴 하지만 결코 크지 않아 오밀조밀하게 생겼지 않던가. 이렇게 눈이 이마까지 치솟고 입이 귓가에 이르도록 찢어질 수 있는 신체 구조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저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에 오히려 놀란 당운각은 하늘을 향해 다시 한 번 신의 권능을 느꼈다.

“어, 어디 아프냐?”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그녀가 아프다는 것도 아니었고 묘기를 보여주려고 함도 아니었다.

그녀가 역용술을 배워 얼굴을 뒤바꾼 것은 더 더욱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의 이야기는 이번엔 당운각의 얼굴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놓고 말았다.

모연의 말을 들은 당운각은 눈이 튀어나오고 흰자위 가득 실핏줄을 그어냈는데, 세상에 그 어떤 거미라 해도 그보다 촘촘한 거미줄을 치기는 힘들 것만 같았다.

게다가 어찌나 입을 뜨악하게 벌렸던지 과연 그의 의도가 모연에게 자신의 목젖이 얼마나 잘 요동치는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 놀라서 그런 것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이것이 지금껏 일어난 사건의 전부이옵니다.”

모연의 표정과 말투는 너무도 진지하고 간혹 잔떨림이 있어 추호의 거짓도 없어 보였지만 당운각은 놀람 중에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진짜라고 해도 믿지 않을 심산이었다. 당가가 어디 동네 건달패거리들의 이름이 아니잖은가. 게다가 당운각 스스로가 오독관문 중 마지막 무형지독의 위력이 어떠한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무형지독의 위력을 알고 있는 것에 비례해서 지금 가문에서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었다.

“네가 한 말이 진정 참이렷다!”

바위라도 꿰뚫어 버릴 것만 같은 눈빛에 모연이 몸을 움찔하면서 답했다.

“어찌 제가 삼장로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오독관문을 통과한 거지 방주에게 당가는 귀속되었고 조만간 멀리 거지 교육을 받으러 떠난다고 하셨습니다.”

당운각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끙… 좋다, 너는 다시 한 번 아까 한 이야기를 해보아라.”

당운각은 어떻게든 모연의 말이 거짓이길 바랬다. 만일 지금이라도 모연이 ‘헤∼ 농담이었어요. 장로님’이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썩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껄껄껄 웃으며 넘어가 줄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당운각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모연은 처음과 하나도 틀림이 없이 똑같은 말을 전한 것이다. 거기에만 그쳤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까는 빠뜨리고 이야기하지 않았던 내용, 즉 갈조혁의 죽음에 대한 것까지 상세하게 들려주어 당운각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당운각의 머리는 급성 빈혈이라도 걸린 듯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만약 이대로 들어간다면 나 또한 무슨 곤욕을 치를지 모를 일이다. 일단 도움을 요청해야만 한다.’

또 다른 생각도 났다.

‘아니지, 아니야…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모연, 이 계집애가 거짓을 말했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순 없어.’

당운각은 생각을 끝내기 무섭게 잔인한 살기를 남김없이 드러냈다. 그것은 가식적으로 흉내만 내는 그런 살기가 아니었다. 한낱 시녀에 불과한 모연이 그런 당운각의 살기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녀가 호신술을 익혔다곤 하지만 그런 건 코흘리개 애들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모연의 얼굴은 삽시간에 파랗게 질렸고 몸은 매서운 겨울 추위에 떨듯 부들거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자, 장로님… 왜, 왜 그러세요…….”

너무 무서우면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법이다. 오직 지금의 그녀는 저승사자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연약한 병자였다.

순간 당운각은 오른손을 쭉 뻗어 그녀의 멱살을 움켜쥐어 끌어 올리며 말했다.

“클클클… 내 진작 너를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건만 오늘에서야 뜻을 이루게 되는구나. 네년이 감히 나를 조롱하다니… 그래, 실컷 조롱하고 나니 재밌느냐?”

갈림길이었다. 부디 여기에서 ‘죄송합니다. 거짓을 고해 마음을 어지럽힌 점 죽어 마땅하지만 이번만은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이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두려움으로 물든 모연의 검은 눈동자는 아주 작게 축소되어 있었다. 이윽고 두려움에 떨리는 그녀의 입이 열렸다. 애써 살기를 드러낸 당운각의 심장도 그에 맞추어 쿵쾅거렸다.

“제, 제가 자, 잘못했습니다. 죄, 죄송… 합니다. 하지만 저는 힘이 없어 그, 그 거지들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당운각은 처음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역시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했다가 이어지는 뒷말을 듣고 허탈해지고 말았다.

‘정말이로군.’

그는 삽시간에 살기를 거둬들이고 맥없이 모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 앞에 모연은 아직도 지독한 살기가 몸 안으로 파고들어 간 탓에 그 기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한동안 말없이 그저 하늘만 바라보던 당운각은 대충 마음을 정하고 모연에게 말했다.

“아까 네게 심하게 대한 것은 이해하렴.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단다. 휴우∼.”

당운각은 아직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모연에게 품에서 환약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걸 먹어라. 조금 마음이 안정될 것이다.”

당운각이 건넨 환약은 신옥환이라고 하는 것으로 무공을 익히는 자에겐 내공을 증진시키고 일반인에게도 기를 안정시키는 효험이 탁월한 것이었다. 신옥환은 애지중지 간수하는 것이지만 지금 이 판국에 영약을 아끼고 자시고 할 형편이 아니었다.

“휴∼.”

길게 한숨을 내쉰 당운각이 말을 이었다.

“너는 본가로 돌아가게 되면 나를 보았다는 말을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것이다. 너는 나를 만난 적도 없고 더욱이 나와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알겠느냐?”

신옥환의 효험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던지 차분히 호흡이 가라앉은 모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좋다. 어서 가보아라.”

모연이 황급히 돌아서는 것을 보고 당운각은 일단 당가에서 멀어질 필요를 느꼈다. 모연을 만난 것처럼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모연이 철저히 비밀을 지키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 정도면 안정권에 들었다 싶었을 때 당운각은 어느덧 야산의 언덕 밑에 서 있었다. 그는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허해져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휴우∼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번 사건은 다른 어떤 일들과도 성격이 달랐다. 보통 상황이 벌어지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든든한 가문이 버팀목이 되고 중추가 되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댈 언덕이 없었다.

당운각의 눈이 힘없이 하늘과 산, 그리고 나무를 바라보았다.

하늘과 산과 나무는 일 년 전이나 오늘이나 다를 바가 없이 그 자리에 있었지만 지금 당운각의 눈에는 하늘은 어둡고 산은 음침했으며 나무는 메마른 채였다.

한동안 당운각은 멍한 눈으로 이 난관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심했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만큼 쉽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게다가 상대해야 할 자는 무형지독을 냉수 마시듯 했다는 독의 제왕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당운각의 맥 빠진 시선에 개미 한 마리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들어왔다. 그 개미는 자신의 덩치 세 배에 이르는 식량을 지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나아가고 있었다.

“저 개미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당운각은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자신이 뱉어낸 음성에 스스로 놀라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방금 전까지 개미를 보고 있으면서도 개미를 보고 있다는 것조차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터였다. 개미의 동작엔 뭔가 가야 할 길이 확실히 담겨 있었다. 당운각은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비추어보니 개미가 훨씬 더 나아 보였다.

‘그래, 너는 가야 할 길을 알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구나. 나는 식량이 있어도 가지고 갈 곳을 잃어버렸단다.’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당운각의 몸을 스치는데 오늘따라 바람은 상쾌한 기운은 빠져나가고 처량함만을 남겨두고 갔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당운각은 개미가 어디론가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머리를 들었다.

‘이대로 앉아만 있을 순 없다. 이대로 당가가 무너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지 않느냐. 어찌 당가가 거지 소굴이 되도록 지켜만 볼 것인가.’

당운각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어디에 도움을 청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오독문으로 찾아가 볼까? 아니, 아니야…. 무형지독을 물마시듯 했다는 놈들이니 우리 당가나 거기나 결과는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한 단계 더 뛰어난 곳이어야만 해 어디가 좋을까. 마천에 도움을 청해볼까?’

마천은 정파도 아니고 사파도 아닌 곳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곳이었다. 중원 오대고수 중 한 명인 마천의 천주 도의봉이 있었지만 당운각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마땅치 않은 것 같았다.

‘그럼 혈곡으로 가볼까?’

사파의 최정상이라 할 수 있는 혈곡을 제일 먼저 떠올리지 않았던 것은 혈곡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중에 가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혈곡, 혈곡이라…….’

아무래도 혈곡으로 가기엔 마음이 편치 못했다. 혈곡도 아니라면 결국 남은 곳은 단 한 군데였다.

천선부.

“그래, 천선부다. 비록 당가가 사파로 분류되지만 이번에 당가를 습격한 놈들은 진개방이라고 하니 정파가 아니던가. 어쩌면 천선부에 이야기를 잘 해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천선부라면 나중에라도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곳이 분명했다. 오독문이나 마천, 그리고 혈곡 등을 떠올렸을 때는 마음 한구석이 편치 못했지만 천선부로 마음을 정하고 나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모든 일이 해결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가자, 천선부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