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113.
쏜살같이 당가의 정문에 이른 무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교운추와 제갈묘는 청력을 곤두세우며 인기척을 살폈다. 멀리서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근처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교운추가 제갈묘에게 전음을 날렸다.
-먼저 들어가겠소이다.
제갈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며 손에 진기를 불어넣었다.
상대는 칠옥삼봉 중 두 명을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 손쉽게 데리고 가버린 녀석이었다. 그것도 다른 칠옥삼봉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태에서 말이다.
그 거지들이 당가에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정체는 당가에서 은밀히 만든 하부 조직일 수도 있고, 혹은 당가와 연합한 무리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오문이 전한 정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교운추나 제갈묘는 마음이 급했지만 담장을 넘거나 정문을 부수듯이 달려들 수는 없었다.
삐그덕.
교운추가 조심스럽게 문을 얼며 안으로 들어갔다.
휘휭∼
한줄기 황량한 바람만이 교운추의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람의 그림자는 물론이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외곽이야 그렇다 쳐도 정문에 호위를 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구나.’
평범한 집안에서 집을 비우고 잠깐 어디를 다녀온다는 식의 논리를 당가에 적용시키기엔 당가의 명성이 너무도 컸다. 교운추는 제갈묘 등에게 손짓하며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곧바로 소리가 들려오는 연무장 쪽으로 향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또렷해졌다. 그 소리는 여태껏 표영이 파송식이라는 명목 아래 떠들고 있는 말이었다.
“에∼ 그러니까 앞으로 당가의 가주 당문천과 사대장로, 그리고 십영주는 각기 진개방의 수하로서 그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이 당가로 복귀함에 있어서는 앞으로 십여 년간의 생활 태도를 보고 결정토록 하겠다.”
진개방이 어떻고 십 년이 어떻고를 지껄이는 거지를 보며 교운추와 제갈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바로 저놈이다!’
그건 누가 말해 준 것도 아니었지만 강력하게 직감적으로 다가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상황 파악이 완료된 것이다.
‘젊은 거지의 좌측엔 당가의 가주와 장로들이 자리하고 우측에는 다른 거지들이로군. 그럼 한통속이라는 말이렷다.’
‘음… 어쩌면 당가 전체와 맞서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겠구나. 하지만 여기에서 물러설 마음은 추호도 없다!’
둘은 순간적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거지 녀석! 내 딸 청인을 어디에 숨겨놓았느냐!”
“거지 놈아! 어서 내 아들 호를 내놓아라!”
사실상 교운추와 제갈묘의 외침은 거의 나타나자마자 외친 것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모두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그 소리는 여러 사람에게 그 처한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무리 중 제일 놀란 사람들은 누가 뭐라 해도 단연 제갈호와 교청인이었다.
‘아, 아버지가 아니신가!’
‘어, 어떻게 여기까지……!’
둘은 꿈속에서조차 생각지 못한 현실 앞에 반갑게 뛰어가 인사를 드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순간적으로 얼간이 같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놀람에 있어서는 가주 당문천도 만만치 않았다.
‘으윽!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남해검파의 장문인과 제갈세가의 가주가 왜 여기 나타난 거냐고! 저것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느닷없이 왜 당가에 찾아와 자식들을 찾고 난리야!’
그에게 있어 지금의 꼬락서니는 한마디로 개망신이었다. 아직 붓기가 빠지지 않은 얼굴에 온통 멍이 든 얼굴인 당문천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이번 사태에 대해서 모든 당가인들에게 얼마나 철저히 엄명을 내린 상태이던가.
절대 외부로 소식이 전해져선 안 된다.
당가의 모든 이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았는지 모른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당가의 이름은 대외적으로 그대로 존속한다고 했기에 무림인들 모르게 은근히 거지 생활을 할 참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이제 그에게 있어 ‘은근히’라든지, 혹은 ‘아무도 모르게’라는 말은 구름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혈곡의 첩자 옥기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거지 떼들에 이어 이번에는 남해검파와 제갈세가의 주인들이라… 가만있자. 청인과 호라면 교청인과 제갈호를 말함이 아닌가. 그들이 저 거지에게 잡혀갔다는 뜻인가?’
옥기로서는 거지들에 대해 점점 더 신비스러움이 더해가는 것만 같았다. 당가를 접수하고 이어 혈사대주의 목을 베어버렸고 지금에 와서는 칠옥삼봉 중 두 명을 감금한 것 같지 않은가.
‘강호에 일대 바람을 몰고 올 거지 떼로구나.’
옥기는 그러면서도 표영의 우측에 앉은 두 젊은 거지가 제갈호와 교청인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표영도 큰 외침을 듣고 찰나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내 딸 청인을 찾으러? 아들 호라…….’
교청인과 제갈호를 바라보니 둘 다 얼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확실했다.
‘이런이런, 집에서 찾으러 왔구먼. 이거 어떻게 한담?’
표영으로서도 설마 하니 이곳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심해야만 했다.
이렇듯 각기 자신들의 입장에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교운추와 제갈묘의 신형이 표영을 향했다.
둘의 신형은 매우 신속해 연무장에 앉아 있는 무리들 사이를 스치듯이 지나쳤고 중간 정도에 이르러선 사람들의 어깨를 가볍게 밟고 그 탄력을 이용해 표영을 찢어 죽일 듯이 짓쳐들었다. 그 광경은 마치 새가 수평으로 날다 절벽을 만나 쭉 솟아오르는 듯한 광경이었기에 보는 이들로서는 탄성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능파와 능혼이 눈만 멀뚱하게 뜬 채 여유 있게 앉아 박수를 보낼 리 만무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어디에서 감히 함부로 날뛰는 것이냐!”
“감히 누굴 암살하려 드느냐!”
둘의 눈엔 분노가 가득 실렸다. 어떻게 만나뵌 지존이던가. 둘에게 있어 지존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은 누구든 그 목적이 자살(?)하려는 것으로 단정 지었다.
‘죽여주마!’
공중에 솟아오른 능파는 제갈묘를 향했고 능혼은 교운추를 맞아 갔다. 그때 표영의 전음이 능파와 능혼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손에 사정을 두어라. 그들은 적이 아니다.
먼저 능파의 장과 제갈묘의 장이 공중에서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퍼펑!
능파의 장력에서는 붉은 회오리가 감돌았는데 그 기세에 밀려 제갈묘는 공중에서 뒤로 세 바퀴를 돌아야만 했다. 그는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으며 땅에 착지했는데 그곳은 그가 처음 신형을 날렸던 곳이었다. 제갈묘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천상신개 엽 방주가 사라진 후 강호에 저런 거지 행색을 한 고수가 있었단 말은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는 상대가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알아보았다. 아마도 전력을 다 쏟아 부었다면 지금쯤 자신이 바닥을 구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능파의 처음 공세는 살인적이었다.
한편 능파와 제갈호가 부딪쳤을 때 교운추는 신형을 솟구치면서 이미 검을 빼 들었던 차였다. 그는 다가오는 능혼을 수직으로 양단할 듯 베어갔다.
하지만 능혼이 ‘죽여주십시오’ 하고 몸을 그대로 둘 리 만무했다. 그는 수직으로 베어오는 검날을 허공 중에 피하며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기이한지라 교운추는 검을 미처 되돌리지도 못하고 왼손으로 옆구리를 비껴 치며 그 반탄력으로 뒤로 돌아내렸다. 바닥으로 착지한 교운추의 얼굴도 제갈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도 상대가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런 광경을 보며 당문천 등은 다시 한 번 좌절과 실의에 빠졌다.
‘언제부터 개방의 비주류가 저렇게 강했단 말인가.’
그때 능파가 버럭 소리쳤다.
“죽을 데가 마땅치 않으면 곱게 죽여 달라고 할 것이지 어디에서 감히 큰소리를 치느냐!”
성미가 급하기론 교운추도 만만치 않은지라 그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갈 리 만무했다. 그는 곧바로 단전에서 기를 검으로 쏟아내며 달려들었다.
“너의 목을 딴 후에라야 내 딸을 찾을 수 있겠구나!”
동시에 남해검파의 장로들과 호법들도 움직였다. 능파도 어설프게 마무리 짓고 싶지 않았던 참에 잘됐다 싶었다. 연이어 제갈호와 제갈세가의 고수들이 날아올랐고 능혼도 뒤질세라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두 무리의 공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도에 제갈호와 교청인이 뛰어들며 크게 외친 소리 때문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멈추세요!”
둘은 이미 어느 정도 가까이에 이르렀던지라 능파와 능혼보다 빨리 아버지 앞으로 몸을 날리며 소리친 것이다. 장문인 교운추와 가주 제갈묘에게 있어 오직 목적은 싸우려 함이 아니라 자녀를 찾기 위함인지라 ‘아버지’라는 외침은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귓가를 울렸다.
하지만 교운추와 제갈묘는 아버지라고 외치며 끼어든 자의 꼬락서니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네놈들은 누구이기에 우리의 자녀임을 사칭하느냐?”
“이젠 사람을 조롱하겠다는 것이냐?”
두 아버지의 눈엔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거지에 불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지 중에도 이런 거지가 없을 것 같았다. 특히 교운추로서는 아들이 아닌 딸을 찾으러 나선 입장이 아니던가. 그의 어이없음은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갈호와 교청인으로서도 답답하기 그지없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건 마치 무수히 외쳐도 유리벽에 갇혀 있어 소리가 전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이렇듯 친혈육이 눈과 눈을 마주 대하면서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광경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이가 볼 때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 애절함이 가히 얼마나 심하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유일하게 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했다. 그는 바로 표영이었다.
‘나는 저 녀석들과 늘 함께 있어서 녀석들이 얼마나 거지다워졌는지 느끼지 못했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보니 친아버지조차 알아보지 못하지 않는가. 음하하하! 이제 외공 방면에서는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다고 봐도 되겠구나. 앞으로는 내공 쪽에 더욱 힘을 쏟도록 해야겠다.
표영은 감회가 새로운 듯 눈까지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제갈호와 교청인이 답답함을 호소하듯 다시 말했다.
“제가 아버지의 아들 제갈호입니다.”
“아버지, 잘 보세요. 저예요. 청인이라고요.”
두 번째 말을 듣고서야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묘와 남해검파 장문 교운추의 심장이 요동 쳤다.
두 사람은 두 번씩이나 자식의 목소리를 듣고도 태연할 만큼 신경이 둔하지 않았다. 단지 고작 일 년도 안 된 사이에 이렇게 변하진 않았으리라는 선입관이 아버지와 자녀 사이를 가르는 벽이 되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둘은 두 손으로 눈을 비비고 자세히 뜯어보며 말했다.
“네가 정말 호더냐?”
“처, 청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