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05장 (106/199)

 # 105

105.

“오! 참으로 훌륭하구나. 너희의 마음이 이 정도까지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 말에 네 명의 장로들은 고개를 숙인 채로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

‘역시 나의 연기력은 탁월하다니까. 당추 장로도 의외로 말을 잘 하는걸?’

‘아예 이 길로 들어설까나? 흐흐흐…….’

‘저 감동하는 꼬락서니를 보라구.’

‘원래 정파인들은 충성된 말과 신의를 지키는 말에는 언제나 약하단 말씀이야. 그게 바로 약점이지.’

표영이 왔다 갔다 하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짙은 신음 소리를 내며 매우 감동하고 있음을 알렸다.

“음… 음…….”

그러다 다시 걸음을 멈추고 당문천을 바라보았다.

“당문천! 너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로구나.”

고개를 쳐든 당문천의 마음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비추었다.

‘저 녀석들이 말을 그럴싸하게 한 것이 마음을 움직인 게로구나. 고마운 녀석들.’

표영의 말이 계속됐다.

“이런 고운 마음씨를 가진 수하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어떤 보배보다 더 값진 것이라 할 수 있지.”

표영은 이번에는 무릎 꿇고 있는 네 명의 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 같은 수하들과 함께 강호를 활보할 걸 생각하니 내 마음이 한량없이 기쁘구나. 그래, 좋다. 내 너희들의 갸륵한 정성을 보아…….”

‘보아?!’

일제히 장로들과 당문천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너희의 뜻대로 오 일간에 걸쳐 오백 대씩 맞도록 해주겠다.”

“네?!”

당경 등 모든 장로들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이렇게 돼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던가. 원래대로 하자면 ‘내 너희들의 갸륵한 정성을 보아 모두 용서해 주겠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뭐, 뭐냐… 대체!!’

‘아니야, 뭔가 잘못됐을 거야. 이럴 리가 없어. 내가 환청을 들은 것이겠지.’

‘암, 이건 아니야, 아니라고!’

‘괜히 잘난 척하다가 이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모두가 탄식에 잠길 때 표영은 신바람을 냈다.

“자자, 어서 하자, 어서 해. 하루가 그리 긴 것만은 아니거든. 먼저 방법을 알려주마. 어떻게 하냐면 말이야. 처음에 당문천이 누구든지 한 명을 골라서 쳐, 그러면 너희 중에 또 누가 나와서 한 대 치고 이렇게 해서 서로 오백 대를 교환한 후 하루를 끝내도록 하는 거야. 만약에 말인데 살살 때리거나 거짓으로 때리는 척하는 놈은 그놈만 오백 대를 맞게 해주겠다. 알겠지?”

거기까지 말한 표영은 횃불을 들고 밀실 벽 쪽으로 걸어가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 시작하자.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니 먼저 당문천부터 시작해라.”

당문천은 일어서서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 더욱 주먹을 날릴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표영이 타구봉을 꺼내 들고 바닥을 두들기며 다그쳤다.

탁탁탁.

“다섯 셀 동안 움직이지 않으면 너는 그냥 맞기만 해야 할 거야. 하나, 둘, 셋…….”

당문천은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수하들도 주먹을 날릴 것이 아닌가. 그는 눈 딱 감고 중앙에 있는 당추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퍼억!

복부에 정확히 꽂혔는지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당추가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숙이며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으윽!”

표영이 그 정도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제대로 맞았구나. 자, 그럼 이번엔 지타주들 중에 한 명이 나서라.”

하지만 그들 중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아직 배를 움켜쥐고 있는 당추를 제외한 세 사람 당경, 당운혁, 모천호는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이것들 봐라? 좋다. 내가 정해주마. 당경. 너부터 해라.”

당경도 결국 이 자리를 피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해야 할 것이라면 먼저 하든 나중에 하든 크게 상관이 있겠는가.’

당경은 마음을 정하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모습에 당문천이 똑바로 쳐다보며 전음을 날렸다.

-살살 쳐야 한다. 내 오른쪽 볼따구를 쳐라. 그러면 내가 크게 넘어지는 시늉을 하도록 하겠다.

당경도 전음을 듣자 기발한 생각이라 여겼다.

‘역시 가주님이시로구나. 오른쪽이라고 하셨지?’

밀실은 횃불이 있긴 했어도 약간 어둡기에 박자만 제대로 맞는다면 적당히 속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때였다. 당경의 귀로 이번에는 표영의 전음이 꽂혔다.

-당경! 이번에 네가 주먹을 날린 후에 진짜로 때렸는지 확인할 테니 알아서 해라. 만약 수작을 부린 것이라면 넌 오늘 죽을 줄 알아. 알겠지?

당경이 흠칫해서 표영을 바라보자 표영이 씨익 웃으며 횃불을 살짝 추켜들며 흔들었다. 당경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이런, 제길. 물 건너갔구나. 방주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오는데 내가 속이기는 틀린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어쩐다?’

당경은 입술을 깨문 후 당문천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분타주님.”

당문천은 당경이 완전범죄를 이루기 위해 하는 말인 줄로만 알고 속으로 은근히 기뻤다.

‘역시 머리가 좋은 놈이라니까. 오른쪽 볼 따귀를 때리라고 했으니 당연히 왼손을 날리겠지. 그러면 난 주먹이 얼굴에 닿으려는 찰나 신속히 머리를 운동하는 방향으로 돌려 쓰러지면 되는 것이다.’

당문천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하면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다고 여기고 불행 중 다행이라 여겼다. 일순 당경의 주먹이 날았다.

‘으억! 이게 아닌데… 당경 이놈이……!’

퍼억!

“커억!”

당문천은 괴이한 비명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왼쪽 뺨에 주먹을 얻어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원래 왼쪽 주먹이 날아와야 하건만 오른쪽 주먹이 날아온 것이다. 그 덕분에 당문천이 받은 충격은 그냥 맞은 것보다 두 배는 더 컸다. 그것이야말로 왼쪽으로 머리를 틀 준비를 하고 있었다가 그쪽으로 되레 주먹이 날아들자 ‘딱 걸려 버린 셈’이었던 것이다.

“으윽… 끄응…….”

턱이 부서질 것처럼 아파 당문천은 바닥에 손을 짚고 부들부들 떨며 일어섰다. 비록 내공을 실어 날린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은 대단했다.

‘이, 이 새끼가 나를 배반하다니! 그래, 오냐! 너희들이 한번 해보겠다 이거지……!’

다리를 후들대며 일어선 당문천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음을 날렸다.

“하하하… 잘했다, 잘했어.”

그의 입은 칭찬을 내뱉었고 입가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분분히 살기가 흘러넘치는 것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당문천은 연신 ‘잘했다’라고 말하다가 일순간 몸을 날렸다. 그는 오른쪽 무릎을 살짝 구부려 그대로 당경의 명치를 찍어 버렸다. 지금의 상황은 정식 대결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때리는 대로 맞고 쓰러져야 하는지라 당경은 강력한 타격에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커억∼!”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키려 했다. 하지만 그저 꺼억 숨넘어가는 소리만 내뱉을 뿐 전혀 공기를 마실 수 없었다. 그는 양팔을 휘저으며 곧 죽을 듯이 고통스러워했다.

“꺼억∼ 꺼억∼”

당경이 얼굴을 시뻘겋게 달군 채 신음했지만 표영은 이 정도로는 생명에 지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표영은 그저 다음 차례만을 재촉하기 바빴다.

“자, 자. 다음은 당운혁 차례지? 인정사정 볼 것 없어. 알겠지? 괜히 허튼짓을 하다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표영의 말에 당운혁이 뻘줌하게 나서며 당문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분타주님, 저의 본심이 아닙니다. 이해하십시오.”

당운혁은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짓고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가 머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발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머리를 조아리며 이해를 구하는 말과는 너무도 판이한 발차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기세를 표현해 보자면 ‘가히 살인적이다’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쉬익∼.

어찌나 세찬 발차기인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퍼억!

이 소리는 당운혁의 전각퇴법이 허공을 가르며 당문천의 머리를 날려 버리며 나온 소리였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당문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철퍼덕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나뒹군 당문천은 큰 충격에 의해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의 머리로 지난날 생사를 같이했던 멋진 추억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듯했다.

잠시 후 힘겹게 일어선 당문천은 젖은 입가를 소매로 훔쳤다. 일렁이는 횃불에 비춰보니 검붉게 보이는 것이 선혈이 분명했다. 그의 입에서 짐승의 울부짖음이 새어 나왔다.

“으으아악∼!”

한 마리의 야수가 저러할까. 피를 본 당문천에게는 논리나 정분, 기본 상식적인 생각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보이는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개새끼를 봤나! 가만두지 않겠다!”

그가 막 몸을 날리려 할 때 표영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명심해. 내공을 사용해서 때리면 안 돼. 아직도 치고받을 대수가 많이 남았으니까 말이야.”

천음조화를 시전하여 보낸 음성인지라 비록 당문천이 야수같이 변해 버린 상태였지만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숙지했다.

물론 그렇다고 분노까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크르르릉∼.”

당문천은 늑대가 울부짖듯 부르짖으며 두 다리를 쭉 뻗어 쌍영각으로 당운혁의 머리와 가슴을 연속타로 가격해 버렸다. 한 대를 때려서는 속이 후련하지 않을 것 같아 아예 연속기를 사용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반칙에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표영은 그냥 넘겨주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상황은 당문천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퍼퍽!

“으아… 어억…….”

당운혁의 몸은 뒤로 날아가 밀실 뒷벽에 세게 부딪쳤다가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당문천은 숨을 헐떡거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당운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세게 나가야만 장로들이 보복이 두려워 힘을 줄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큰 착각이었다. 장로들은 그와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공격할 때 확실하게 기절시켜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 아닌가.’

이렇듯 서로는 내력을 사용하지 않는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표영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번 차례는 모천호였다. 모천호로서는 아직 맞지도 않고 때려보기도 처음이었기에 각오가 남달랐다.

‘여기에서 끝을 보는 게 낫겠다. 가주님은 두 대를 연거푸 맞았으니 그만큼 충격도 컸을 것이다.’

모천호가 어떻게 끝장을 내버릴까 고민하는 모습은 당문천에겐 다른 모습으로 해석되었다.

‘모천호. 너만큼은 그래도 양심이 있구나. 너만 믿는다.’

하지만 정작 모천호는 당문천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주먹에 큰 힘을 실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예 깨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모천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힐끔 표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일견 표영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기세였다. 그 모습에 표영이 손에 든 횃불을 살짝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모천호의 몸이 당문천 쪽이 아닌 표영에게로 향했다.

아주 찰나적인 순간이었지만 당문천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엇, 역시… 넌 된 놈이…….’

하지만 당문천의 생각은 끝을 맺지 못했다. 모천호가 다시 옆으로 휙 꺾으면서 방심하고 있는 당문천의 뒤통수를 손날로 쳐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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