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04장 (105/199)

 # 104

104.

퀭∼

당가의 장로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가슴을 절절하게 울리는 항변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가주 맞아? 진짜 왜 이러는 거냐고.’

‘씨발… 콱 한 대 때려 버릴까 보다.’

그에 반해 한방 날릴 것처럼 주먹을 만지던 능파와 능혼 등의 얼굴은 확 풀렸다.

표영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당문천. 너를 진개방의 장로로 삼도록 하겠다. 그러나…….”

그러나? 당문천이 장로직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표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네가 장로가 되려면 먼저 능파와 겨루어 그 정도의 실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자, 그럼 연무장으로 나가 멋진 결투를 구경하도록 할까?”

표영이 손으로 능파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능파가 이게 웬 떡이냐는 표정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당문천의 안색은 핼쑥하게 변해 버렸다. 거기에 다시 당문천은 번개보다 빠르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아하하… 아하하! 진개방의 섬서분타주 당문천, 방의 규범인 ‘의를 숭상하라’는 뜻을 목숨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제갈호와 교청인은 실소를 머금었고 네 명의 장로들은 그런 얍삽한 반응에 다시금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3장 몸으로 교훈을 터득케 하다

표영과 당문천과 장로들은 밀실로 향했다.

이 밀실은 당가의 고문실로 쓰기도 하고, 또 필요에 따라서는 비밀리에 누군가를 숨겨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 이용되기도 했다.

횃불로 어두운 통로를 밝히며 지날 때 당문천 등은 은근히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다. 이들로서는 마음에 켕기는 구석이 있었던지라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과거 오극전갈 사건이었다.

당문천은 장로들과 함께 여러모로 그때 일을 상기하며 진정 당시 젊은 거지가 방주인지를 의논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확실하다는 것’.

도대체 오극전갈에게 물리고 어떻게 살아났는지는 몰라도 현실은 현실인 것이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보복이 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방주가 느닷없이 밀실로 가자고 말을 꺼낸 것이다.

당문천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방주님… 무슨 일로 밀실을 찾으시는지…….”

표영이 씨익 웃어주었다.

“분타주도 성격이 꽤나 급하군. 하하, 들어가서 차분히 이야기하자고.”

당문천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아하하…. 제 성격에 좀 그런 면이 있죠. 아하하…….”

이윽고 밀실 앞에 이르러 안으로 들어가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정방형으로 이루어진 석벽이었는데 빛이라곤 전혀 들어오지 않아 횃불이 없이는 고수라도 사물을 분간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표영이 당경으로부터 횃불을 받아 들고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이렇게 너희들을 보자고 한 것은 묵은 과거사를 해결하고자 함이다.”

아니나 다를까 불행히도 당문천 등이 예상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표영의 말에 모두는 덥석 무릎을 꿇었다.

“방주님, 그때는 제가 오극전갈에 눈이 멀어 어리석음을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주먹을 휘두를 때 저는 손을 쓰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 이래 봬도 괜찮은 놈입니다.”

각기 나름대로의 논리로 용서를 구하는 말을 쏟아냈다. 표영은 힐끔 보고 씨익 웃더니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당운각은 언제쯤 온다고 했지?”

당운각은 당가의 삼장로로, 과거 표영이 처음으로 만났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죄로 따지자면 당운각이 가장 크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운각은 표영이 당가에 왔을 때 오행문의 문주 설충의 초대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삼장로… 아니, 당운각 지타주는 며칠 내로 돌아올 것입니다.”

“음… 그래, 그놈은 그때 보기로 하고. 한 2년 정도 지난 것 같구나. 아! 그때가 좋았지. 네놈들만 오지 않았어도 사부님께서 몇 년은 더 사실 수 있었을 텐데. 그날 사부님께 발길질한 놈이 누구였더라?”

당사자인 당문천이 온몸으로 땀을 흘렸다. 어떻게 인생이 이렇게 돌고 돌아 이런 상황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래그래, 누군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다 똑같은 놈들이니까 말이야. 음… 너희가 후려 팼던 노인이 누구였는지 아느냐?”

당문천 등의 머리가 고속으로 회전했다.

개방, 거지, 노인, 무공…… 여러 가지가 머리에 떠오르며 연결되었다가 흩어지고 다시 연결되길 거듭하면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천상신개 엽지혼.

‘으윽! 그렇군. 그때 우리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그런데 왜 엽 방주는 미친 노인처럼 행세했을까?’

누군지를 짐작하고 많은 의문을 가졌지만 섣불리 말할 수가 없어 고개만 숙이고 있을 때 표영이 말했다.

“12년 전쯤 행방불명되었다던 개방의 방주인 천상신개시다.”

당문천 등이 마음속으로 ‘역시나’를 부르짖었다.

“만일 사부님께서 몸이 온전하셨다면 감히 그런 행동을 하진 못했겠지. 하지만 일개 미친 노인이라 여겼기에 그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 아니더냐. 사람의 생명이란 부득불 패역무도한 자를 벌할 때를 제하고는 어떤 경우라도 보물처럼 여겨야하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개방의 뜻이요, 근본 하늘의 뜻인 것이다. 원래대로 하자면 너희의 껍질을 벗기고 죽여도 시원찮겠지만 이제 모두들 한식구가 되었고 내 입으로도 생명이란 소중한 것이라 했으니 어찌 목숨을 앗을 수 있겠느냐.”

그 말에 당문천 등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후회가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방주님 .”

“방주님의 은혜는 하해와 같습니다.”

“앞으로는 오직 방주님의 뜻을 좇아 훌륭한 무림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서 절절히 우러나는 말이었지만 속마음은 사실 달랐다.

‘이렇게 훈계 정도로 끝날 수 있을 것 같구나. 별거 아니었구먼.’

‘흐흐… 괜히 쫄았잖아.’

아직까지 회개할 상태에 이르지 못한 당문천 등은 의외로 일이 잘 풀려가는 것 같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럴 것 같으면 뭐 하러 밀실로 우리를 데려왔을까. 하하하, 방주는 괜히 폼을 잡아볼 요량이었나 보구나.’

‘그나저나 방주의 사부가 엽지혼이라면서 왜 개방에 있지 않고 뜬금없이 진개방을 만들었을까?’

이젠 거의 끝났거니 생각하고 다른 잡스러운 생각들을 떠올렸다. 다들 겉과 속이 다른 상태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표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안심해도 좋다. 지난 일은 모두 흘러간 물과 같아 결코 다시 이끌어올 수 없으니 내 너희들을 두들겨 패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문천 등이 쾌재를 불렀다.

‘옳거니! 잘 나가는구나.’

‘바로 이거지.’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당문천 등은 속마음과는 달리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모름지기 지도자란 지도자의 입장에서 수하들을 잘 다스려야 하고 수하들은 수하들대로 지도자를 잘 보필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지 않느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연신 당문천이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

“그중 경중을 논한다면 당연히 지도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

표영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당문천이 적절하게 말했다.

“다 저의 불찰입니다. 앞으로는 지도자로서 훌륭한 모범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바로 그런 마음이 우리 진개방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지. 자, 그런 의미에서 당문천, 너는 수하들을 잘못 가르친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겠느냐?”

“방주님의 말씀 백 번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표영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고 당문천은 맞장구치기에 바빴다.

“좋다. 역시 넌 분타주의 자격을 가질 만하구나. 그러면 오늘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나날을 맞는 의미를 기리도록 하겠다. 당문천!”

“네, 방주님.”

“너는 앞으로 오 일간에 걸쳐서 네 명의 지타주들에게 오백 대씩 맞도록 하여라.”

쿠궁!

날벼락이었다. 일이 슬슬 잘 풀리는 줄로 알았건만 오 일간에 매일 오백 대씩을 맞으라니… 그것도 수하들에게!!

“방주님! 아까 말씀하시기에는…….”

당문천은 말을 중도에 끊었다.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은 ‘아까는 내가 너희를 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셨잖습니까?’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수하들이 때리는 것이니 그 말에는 하자가 없는 것이 아닌가. 당문천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방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로는, 다시는, 절대로, 결단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습니다!”

“안 돼!”

표영이 한 손을 쭉 뻗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나의 사사로운 묵은 원한 때문이 결코 아니다.”

전혀 비장한 얼굴도 아닌데 비장한 것처럼 하는 말에 당문천은 기가 막히기까지 해서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그 뒤쪽으로 매일 오백 대씩을 패야 하는 장로들의 얼굴도 결코 밝지 않았다.

가주를 패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은근히 기쁨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까놓고 표현하라고 한다면 이들은 펄쩍펄쩍 뛰며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역시 대장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아! 내가 당가의 가주가 아니라 장로였음이 이렇게 기쁠 수가……!’

‘이 기회에 가주에게 얻어터졌던 걸 갚을 수 있겠구나. 삼장로 당운각이 이 자리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하겠는걸.’

‘흐흐흐… 오백 대라… 때리는 데만 해도 시간이 상당히 걸리겠는걸.’

네 명의 장로들은 잠시 상상 속으로 들어갔다. 어디를 어떻게 두들겨 팰 것인지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시기에 적절한 말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먼저 당경이 입을 열었고 그 뒤를 이어 모두 한마디씩 내뱉었다.

“어찌 저희들이 분타주님께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결단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저희를 벌하여 주십시오.”

“분타주님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저희의 어리석음이 일을 그르치게 한 것이니 모든 죄는 저희에게 있습니다.”

“어느 조직에서든 앞서서 이끌어가는 입장은 매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저희가 보필을 잘못해서 생긴 일이니 저희가 도리어 맞아야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분타주님께서 오백 대를 맞으신다면 저희는 천 대를 맞아도 부족할 것입니다.”

충정에 가득 찬 목소리로 연이어 뱉어내는 말에 표영의 얼굴이 감동으로 젖어들었고 눈망울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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