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103.
짝짝짝짝!
“장하다, 정말 장하다. 역시 독공의 고수들답구나. 너희들이 바로 이제 나의 수하라고 생각하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마치 천하를 얻은 듯하구나. 하하하!”
그러자 능파와 능혼이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지존이 박수를 치는데 앉아서 멀뚱거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짝짝짝짝!
“진개방의 앞날은 점점 밝아오고 있습니다.”
“진개방 만세∼ 만세∼.”
제갈호와 교청인은 세 명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난리를 떠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뚱하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둘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어나 마지못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교청인은 박수를 치며 연신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방주 표영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음…. 방주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야. 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그런 그녀의 중얼거림에는 뭔지 모를 정이 담겨 있었다.
표영이 박수를 끝내고 고개를 쳐들고서 다시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오장로 당운혁은 오늘 먹은 독을 모두 다 토해 버렸으니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구나. 비록 독이 소모되는 것이 아깝긴 하지만 저놈은 내일 다시 복용토록 해야겠다. 그렇지 않느냐?”
표영의 말에 능파와 능혼, 그리고 제갈호와 교청인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혼절한 당운혁이 들었다면 아마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았으리라.
제2장 당가는 개방의 분타로
혼절했던 당문천과 네 명의 장로들은 하루가 꼬박 지나서야 깨어났다. 그들은 한바탕 꿈을 꾼 것이려니 치부하며 애써 어제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혹은 잊으려 했다.
‘그래, 모든 것은 추억인 셈이지. 나중에 되돌아보면 다 아름다운 법이다.’
고통스런 추억이 훗날 이야깃거리가 되고 떠벌릴 이야기가 된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또다시 겪겠냐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모두 고개를 마구 저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 중 당운혁에겐 또다시 추억에 새겨질 하루가 더 남아 있었다.
“이봐, 당운혁! 어제 것은 다 무용지물이야. 그렇게 쏟아냈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어? 자, 다시 시작하자.”
표영의 말에 당운혁은 게거품을 문 채 울고불고 난리가 아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얼마나 가슴을 쓸어 내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모두들 하늘에 감사했다.
‘하늘이시여∼’
당운혁은 자신의 연약한 위장을 저주하며 결국은 다시 때독을 복용했다. 이번에도 속이 뒤틀리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는 이제껏 삶 속에서 연마해 온 모든 인내심을 끌어내 참고 또 참아 혼절하는 것으로 끝을 보았다.
사실 넘어오는 것을 얼마나 다시 삼키고 삼켰는지 모른다. 연속 삼 일간을 그리 보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회선환의 복용이 마무리 짓게 된 후 다시 표영 일행과 당가의 수뇌들이 당존각에 모였다. 표영은 회선환도 복용시켰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당가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된 것이다.
표영이 그제 질문을 던졌으나 답을 얻지 못했던 갈조혁에 대해 다시 물었다.
“밖에 목이 걸린 놈은 어떤 놈이냐?”
갈조혁의 목은 어느새 당가의 외벽에 걸려진 상태였다.
당문천을 위시한 네 명의 장로가 혼절한 이후 가내총환인 당호가 찾아와 부탁한 것 때문이었다. 당호는 인질로 잡혔던 아이의 아버지로 분노에 불타 갈조혁의 머리를 외벽에 걸어놓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었다. 그 말에 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표영의 물음에 당문천이 충성스런 부하의 얼굴로 답했다.
이제 그는 독약도 복용했으니 체면이고 뭣이고 차릴 것도 없게 된 것이다.
“그놈은 독운신군(毒雲神君)이라는 자로 이름은 갈조혁이라고 합니다. 약 20년 전 독공의 고수로 강호에 이름을 떨쳤는데 돌연 은거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내 당가에 들어오겠노라며 찾아온 것입니다. 처음엔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도 가졌지만 그놈이 애지중지 다룬다는 청향미주를 바치는 바람에 진심이라 믿고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당가에는 다섯 명의 장로가 있는 바 갈조혁을 장로로 임명해 육대장로 체제로 나가려고까지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놈은 잘해준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오만방자하고 배은망덕하게도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백 번 죽어 마땅합니다.”
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음성을 흘렸다.
“음…….”
명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는 갈조혁의 행동에 대한 의문점을 풀기엔 적절치 못했다.
‘뭔가가 있어… 뭔가가…….’
만성지체를 타고난 표영의 직관적인 감각이 그런 느낌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정보로 인해 안개처럼 뿌옇게 가려진 상태였다. 제일 좋은 방법이야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이겠으나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지 않았던가.
‘이제껏 지켜본 당가 내에서도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당장에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표영은 일단 갈조혁 사건에 대한 것은 마음에 접어두고 원래 어제부터 하고자 했던 본론적인 내용으로 들어갔다.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당가가 앞으로 나가야 할 향방을 알려주도록 하겠다.”
당문천 등이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왕만두보다 두 배나 더 큰 독(?)을 복용토록 한 사람이지 않은가. 대체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심히 염려스럽기 그지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가는 앞으로 진개방에 귀속된다. 앞으로 이곳은 진개방의 섬서분타로 남게 될 것이다.”
쿠궁!
당문천 등의 심장이 튀어나와 벽에 부딪치고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최악의 각본이 적용된 셈이다. 그들에게 있어 표영의 말은 이런 식으로 들렸다.
-흐흐흐… 앞으로 너희도 거지다. 내 차림을 보아라. 이것이 바로 진개방의 표준 옷차림이다.
당문천을 비롯한 네 명의 장로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 그들에게 있어 이건 가히 절망적이라 할만 했다.
표영은 당문천 등의 얼굴이 검게 변하든 노랗게 변하든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문천 등은 한마디 한마디가 귓가에 들릴 때마다 옆에서 누군가가 큰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대충 표영이 말한 당가의 미래는 이러했다.
첫째. 당가의 현판은 그대로 두고 마음으로 진개방의 일원임을 숙지한다.
표영은 개방의 운영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굳이 진개방 섬서분타라고 써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거지에게 문패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뜻이라 할 수 있었다.
둘째. 당가의 모든 식솔들이 진개방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가주 당문천과 다섯 명의 장로, 그리고 십영주와 그 밑 심복 등으로 구성된 정예 오십여 명만이 구체적으로 활동토록 한다. 현재의 당가는 가내총환인 당호에게 맡겨 부녀자와 아이들을 돌보도록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표영은 모든 사람들을 다 거지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터였다. 어차피 언젠가는 당가가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기에 정예만을 뽑아 진개방의 수하로 쓰고 강호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셋째. 가주 당문천은 앞으로 진개방의 섬서분타주로 명하고 오대장로는 섬서분타에 속한 각 지타주로 명한다. 그 밑으로 십영주는 오결제자가 되고 그 이하는 사결제자가 된다.
넷째. 이들 오십여 명은 당가에 거주하지 않고 주변 야산에 터를 잡고 실제 걸인의 삶을 살아간다.
이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거지는 거지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표영의 행동 지침이었으니 말이다.
다섯째. 당가의 활동은 10년 동안 제한한다. 10년이 찬 후 가주를 비롯한 모두의 마음을 점검하여 당가로 복귀시킬지 여부를 결정한다.
당가는 당가일 뿐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사악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이상은 허락하지 않을 셈이었다. 1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 그 시간 동안 지켜볼 작정이었다.
표영이 긴 설명을 매듭지을 때 당문천과 장로들의 얼굴은 검은색을 뛰어 넘어섰다. 지극함이 다하면 초월해 버린다고 했던가.
검게 변했던 얼굴은 이제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일말의 불안한 낌새를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듯 삽시간에 거지가 될 줄은 몰랐던 그들이었다. 모두는 너무나 큰 충격에 식은땀 흘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표영이 희번덕거리는 얼굴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진개방의 일원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주도록 하겠다.”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실실거리는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과 말투였다.
“진개방에 존재하는 한 가지 규범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의를 숭상하라’이니라.”
표영의 이번 말은 천음조화를 시전하며 건넨 말이라 당문천을 비롯한 장로들의 귀에 박히듯이 꽂혔다. 너무도 진지한 모습에 심지어 여유롭게 앉아 있던 능씨 형제와 제갈호, 교청인까지 긴장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능파와 능혼의 생각과 제갈호와 교청인의 생각은 판이하게 다른 방향으로 표영의 말을 받아들었다.
능파와 능혼은 모든 것을 철저히 마교천하에 뜻을 두고 있었기에 내심 지존의 깊은 심계에 감탄했다.
‘역시 지존이시구나. 내 마음에까지 의를 숭상하라는 말이 와 박힐 정도라니…. 이 어찌 놀랍지 않은가. 이미 자신마저도 속일 수 있는 단계에 이르신 게로구나. 하하하! 천하여, 기다려라. 너희는 마지막 대반전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표영이 깊이 웅크린 범과 같이 몸을 낮추고 세상을 속여 끝 날에 그 마교의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갈호와 교청인은 있는 그대로 표영의 말에 감동했다.
‘의를 숭상하라… 의를 숭상하라…….’
‘방주의 마지막 말은 마음을 자극하는 힘이 있구나. 어찌 거짓으로 꾸며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당존각 안에 자리한 모두의 마음에 ‘의를 숭상하라’라는 말을 심은 것은 천음조화의 공능도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체득된 깨달음이 없이는 천음조화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묘한 기운이 당존각 내부를 휘감고 돌자 잠시 내전은 침묵에 잠겼다.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갑작스럽게 입을 연 것은 당문천이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표영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황당하다는 듯 당문천에게 꽂혔다. 능파와 능혼은 감히 지존에게 항변하는 말에 눈꼬리가 올라갔다.
‘저것이 지금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군.’
‘죽을 때가 되면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하게 마련이지.’
하지만 장로들은 속으로 탄성을 발했다.
‘역시 가주님은 달라도 다르구나.’
‘어찌 우리가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거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아무렴.’
‘가주님, 힘을 내십시오! 우리는 거지가 될 수 없다고 어서 말씀하세요.’
장로들의 마음속 성원을 듣기라도 했는지 당문천이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강호의 체면이 있지… 어떻게 제가…….”
그는 이제 거의 씩씩대는 수준에 이르렀다. 장로들도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죠. 다음 말을 어서 하십시오. ‘어떻게 제가 거지가 된단 말입니까?’라고, 아주 훌륭하십니다. 가주님!’
당문천이 절규하듯 외쳤다.
“어떻게 제가… 고작 분타주를 한다는 겁니까? 저에게 진개방의 장로직은 주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