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00장 (101/199)

 # 100

100.

“이놈,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는 거냐!”

능파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울 판에 떼거리로 몰려드니 송도악은 도저히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이곳을 속히 떠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는 몸을 돌려 내전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때까지 표영은 별 희한한 놈이 다 있다는 식으로 바라보다가 수하들을 보고 말했다.

“야! 쟤네들 같은 편 아니었냐? 괴상한 놈들이구나. 허허 참.”

모두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표영도 아주 특이한 놈이라 여기고 당가인들에 이어 밖으로 내달렸다.

“다들 쫓아가 보자 야, 거기… 어이∼ 이봐, 거기. 왜 그러는 거야? 이리 와 봐.”

송도악은 무조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는 힐끔 뒤를 보고는 우르르 쫓아오자 더욱 속도를 높였다.

‘잡히면 안 된다. 혈곡으로 돌아가야 해.’

밖에는 많은 당가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송도악은 사람의 숲을 헤치고 도망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당가인들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분분히 자리를 비켜주었는데 쌩하니 달려가는 뒤로 가주와 장로들이 달려가자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당문천이 소리쳤다.

“모두 저 역적 놈을 잡아라!”

그때서야 비로소 당가인들이 각기 병기를 꺼내 들고 송도악을 포위했다.

송도악은 닥치는 대로 손을 휘둘러 격퇴시키면서도 워낙에 사람들이 많고 게다가 손을 쓰는 바람에 신형의 속도가 떨어지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잡히는 날에는 온전치 못할 것이다. 고문이라도 받는다면 곡에서 세운 계획을 불게 될지도 모르잖는가. 아무래도 비상수단을 써야겠다.’

그의 눈에 약간 떨어진 곳에 젊은 부인과 그 곁에 약 7, 8세 정도 돼 보이는 여자 아이가 보였다.

‘저기다!’

그는 신형을 급격히 틀어 여자 아이에게 향했다. 여자의 어머니는 자요춘이라는 사람으로 그녀 또한 무공을 익히고 있던 터라 소매를 떨쳐 암기를 발출했다. 하지만 그녀의 실력은 송도악을 어찌해 보기에는 부족했다.

송도악은 왼손을 풍차처럼 돌려 암기들을 옆으로 흘려 버린 후 매가 참새를 낚아채듯 여자 아이를 잡아채고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목에 겨누었다.

그가 아이의 목숨을 끊으려면 그저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굳이 시퍼런 칼날을 목에 겨눈 것이었다.

“모두 멈춰라!”

공격하던 이들과 뒤에서 쫓아오던 이들이 모두가 제자리에 서 멈춰 섰다. 설마하니 이런 비열한 수를 쓸 줄이야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모두 꼼짝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면 이 아이를 죽여 버리고 말겠다!”

송도악의 살기 띤 외침에 모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잡힌 여자 아이의 입에서 두려움 가득한 울음이 터졌다.

“으아앙… 엄마…무서워……!”

아이의 모친 자요춘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이를 놓아주세요. 부탁입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그와 동시에 무리들 중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오더니 큰 소리로 호통 쳤다.

“네 이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 어서 아이를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그 중년인은 아이의 아버지인 당호였다. 당호는 가내총환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송도악은 흐릿한 미소만 지을 뿐 아이의 울음에도 그 부모의 간절한 말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를 그냥 보내준다면 이 아이를 놓아주겠다. 내가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라.”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당문천은 분노를 느꼈지만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이때 모두의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큰 음성이 터졌다.

“이 개만도 못한 놈아, 네놈이 정녕 사람이냐!”

표영의 외침이었다.

천음조화를 시전해 외쳤던지라 모두의 귓가는 말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표영을 향했다. 송도악도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애써 여유를 부렸다.

‘저 거지가 이젠 당가의 가주마저 부리는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저 녀석하고 승부를 봐야겠군.’

“강호는 험난하니 언제 죽음이 임할지 모르는 법이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건 자신의 생명이니 나 또한 나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 단지 이곳에서 무사히 벗어나길 바랄 뿐이다. 너희도 아이의 목숨이 소중하다고 여긴다면 날 그저 내버려두어라.”

말을 끝낸 송도악이 살짝 손에 힘을 주자 예리한 단도가 아이의 피부를 자극해 피가 맺혔다. 그때까지도 쉴 새 없이 울고 있던 아이는 이제 거의 자지러질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 부모들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의를 행하라는 방규가 너를 죽이지 않고서 어찌 누구에게 가르칠 수 있겠느냐!’

표영은 이제껏 살면서 이렇게 화가 치솟아 오른 적은 없었다. 이요참에게 얻어터질 때도 개밥을 얻어먹을 때도 그 어떤 일에도 이번 일만큼 가슴이 끓어오른 적은 없었다.

여자 아이가 겁에 질려 눈물범벅이 된 채 울부짖고 있지만 저 사악한 놈은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지 않은가.

‘너의 목숨은 오늘로 끝이다.’

표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입을 열었다.

“이 시간 이후로 당가는 나의 것이 되었다. 가주는 인정하는가?”

오직 앞만을 응시하며 하는 말에 모든 당가인들의 입에서 놀람에 찬 소리가 작게 울렸고 모두의 시선이 당문천에게 쏠렸다. 당문천이 얼굴이 붉어진 채 힘겹게 말했다.

“이, 인정합니다.”

다시 깊은 침음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표영은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이 말했다.

“나를 비롯해서 여기 있는 모두는 너를 쫓지도, 죽이지도 않겠다. 단지 아이만 그대로 보내다오.”

그리곤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부탁한다.”

표영이 무릎을 꿇자 능파와 능혼이 경악하며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지, 지존이시여!”

지존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능파는 피 끓는 심정으로 송도악을 노려보았고 능혼은 주위를 향해 크게 외쳤다.

“모두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감히 지존이 무릎을 꿇는데 뻣뻣이 서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갈호와 교청인도 무릎을 꿇었고 당문천과 사대장로가 무릎을 꿇자 모든 당가인들도 무릎을 꿇었다. 송도악은 의외로 일이 잘 풀리자 자신이 아이를 인질로 잡고 위협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저 거지 녀석은 힘이 있음에도 아이를 위해 무릎을 꿇는 것을 보니 신의는 지킬 것 같구나. 후후, 정도를 걷는 녀석들은 의외로 연약한 구석이 있어서 좋단 말이야.’

만약 사파인들을 상대했다면 아이를 죽인다고 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좋다. 너희의 뜻을 받아들이겠다.”

그는 아이를 안은 채 신형을 날려 멀리 외벽 담장 위에 오르고선 아이를 집어 던졌다.

“너희를 믿겠다.”

아이는 공중 높이 치솟아오르게 되자 중도에서 기절해 버렸고 떨어져 내리는 아이를 아버지 당호가 신형을 날려 아이를 안아 들었다. 송도악은 마지막 순간까지 더러운 행동을 하고 떠난 것이다. 송도악이 담장 너머 사라져 버린 후 표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능파! 능혼!”

표영의 음성은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웠다.

“여기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녀석의 목을 가져와라. 목을 얻지 못하면 네놈들의 목을 취할 것임을 명심하라.”

능파와 능혼의 눈에 기쁨이 일렁였다. 이제껏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지존의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또한 처음으로 허락받은 살인이었다.

“속하 명을 받듭니다.”

한 목소리로 답한 능파와 능혼의 눈에서 보랏빛 광채가 번졌고 몸에서는 순식간에 강한 마기가 주변을 물들였다.

파팟.

사악한 마기가 뿜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둘의 신형은 담장을 넘고 있었다. 이제까지 마공을 펼쳐서는 안 된다는 지존의 가르침에 따라 안으로 갈무리했던 힘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자 제갈호와 교청인, 그리고 당가의 모든 이들의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설마 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편 혼신의 힘을 기울여 신형을 날리던 송도악은 뒤통수가 찜찜해 뒤를 돌아보다가 기겁하고 말았다.

‘이 녀석들이 약속을 저버리다니! 그러고도 정도를 걷는다고 할 수 있느냐!’

흔히 악한 이들의 특징을 보자면 적반하장인 경우가 태반이다. 송도악도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행한 추악한 면모는 생각지도 않고 그저 약속을 저버린 것만 탓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능파와 능혼이 거의 지척으로 다가왔다. 능파와 능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멈춰라’, 또는 ‘이런 쳐 죽일 놈’ 따위의 말은 할 가치도 없었고 할 시간도 없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장력을 거세게 날렸다. 그것은 혼세마공이었다. 보랏빛 광채가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와 회오리치듯 송도악의 몸을 휩쓸어 버릴 듯이 나아갔다.

쐐애액-

송도악이 그대로 달린다면 몸이 짓뭉개져 버릴 상황이었다.

‘이건 대체 뭐냐.’

그는 위기를 직감하고 신형을 뽑아 순간 위로 솟구쳤다. 매서운 기운이 그의 발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를 스치고 지나간 장력은 땅을 훑어 엎어버렸고 사방으로 돌과 흙이 튀었다. 아마 위로 피하지 않았다면 몸은 걸레 조각으로 변했으리라. 송도악은 다행히 강력한 마공을 피하긴 했지만 이제 능파와 능혼과의 간격이라곤 없다시피 돼버렸다.

아직 허공에 떠 있는 채인 송도악에게로 다시 능혼의 주먹이 복부로 향했다. 능혼의 동작에는 어떤 수비나 방어 개념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오직 일격필살. 송도악은 급히 허공에서 내려오면서 두 손을 내밀며 막아내려 했다.

그때였다. 그는 머리카락이 잡히는 기분과 함께 목 아래가 허전해졌고 머리가 뒤로 쑥 하니 당겨졌다.

그 느낌이란, 마치 갑작스레 옷을 다 벗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머리카락이 잡히자 냅다 손을 젖혀 후려갈겼다. 아니, 분명히 본인은 그렇게 갈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눈으로 약 일 장(3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몸뚱어리가 보였다.

‘저건 누구의 몸이지?’

그 몸뚱이는 특이하게도 머리가 없었고 잘려진 목 위로 피분수를 철철 뿜어내고 있었으며 심장에도 구멍이 뚫려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그 몸이 누구의 것인지는 그리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으아악∼!”

처참한 비명이 터졌다. 그 몸은 바로 송도악. 그 자신의 것임을 본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능혼이 아래쪽에서 장력을 날릴 때 위쪽에서 능파가 솟아오르며 송도악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그의 목을 잘라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워낙 빠르고 섬세하게 잘려진 터라 송도악은 미처 자신의 목이 떨어진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바라보게 되었고 떨어져 나간 몸에 능혼이 심장에 장력을 가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송도악의 머리는 능파의 오른손에 들려 있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아직까지 그의 뇌는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분리된 채 그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싸늘히 웃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그는 능파였다.

“뭘 그리 유심히 보나, 친구. 클클클.”

능파의 왼손에는 아주 가느다란 실이 놓여 있었다. 이 실이 송도악의 머리를 잘라낸 것이다. 그건 능파의 독문병기인 단두사(斷頭絲)였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랗고 투명체로 이루어졌으며 질기기는 쇠와 같아 내력을 실어 자르면 바위도 가를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인 무기였다.

송도악은 머리 밑으로 아직도 피를 철철 흘렸고 그의 얼굴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그의 귓가로 둘의 정감 어린 대화가 들렸다.

“형님, 참으로 오랜만에 단두사를 보게 되는군요.”

“흐흐… 나도 오랜만이라 어색하구나.”

송도악은 그렇게 둘의 대화가 끝나갈 때쯤 서서히 머리가 아득해지며 죽어갔다.

“돌아가자.”

능파와 능혼의 신형이 다시 번개처럼 움직이며 당가로 향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이라 담장을 넘어 추격하고 돌아오는 시간까지는 숫자 100을 다 헤아리기도 전이었다.

“저기다!”

당가 내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시선이 이를 때 이미 능파와 능혼은 어느새 표영의 발 앞에 부복한 상태였다.

“속하 너무 지체하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피가 뚝뚝 흐르는 머리를 앞으로 내밀며 능파가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가인들은 능파의 손에 들린 머리와 거기에 너무 지체했다는 말에 그만 얼굴이 핼쑥해져 버렸다. 이것이 과연 지체한 것이란 말인가.

표영은 여전히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다.

“수고 많았다. 머리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넘겨주도록 해라.”

“속하 분부대로 따르겠나이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는 교청인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녀는 방주가 화내는 것을 오늘 처음 봤다. 이제껏 낄낄거리고 뭐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방주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 분노한 방주의 모습은 이제껏 봐온 어떤 무림인보다 더 멋진 모습이었다.

‘그는 비록 거지 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 나는 ‘강호에서 영웅을 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내 두 눈으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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