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9장 (10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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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아하하…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이거 몇 년 만인가. 역시 자네와 나는 인연이 있나 보군. 그래,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

당가의 고수들은 의외의 상황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가주님은 저 독공의 고수와 아는 사이였나 보구나. 이렇게 되면 특별한 일은 없겠구나.’

당문천의 얼굴은 진짜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 같이 실감이 넘쳤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기쁨에 겨워하는 모습으로 볼 터였다. 당문천은 거기에서 한술 더 떠 팔까지 활짝 벌린 채 달려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분명 끌어안을 기세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문천은 표영을 끌어안지 못했다. 그가 달려올 때 표영이 능파를 보고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너, 쟤 아냐? 누구냐?”

그 말은 능파에게 자유권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능파는 환하게 달려드는 당문천의 귀싸대기를 갈겨 버렸다.

짜악∼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기에 당문천은 황당함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당가의 여러 고수들도 의문에 휩싸인 채 움찔하며 각기 무기를 움켜쥐었다.

‘뭐야?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나?’

뺨을 갈긴 능파가 삿대질을 해대며 욕을 퍼부었다.

“아주 싸가지없는 놈일세! 네놈이 언제 봤다고 방주님을 아는 척하느냐? 죽고 싶냐! 엉? 죽고 싶어?”

당문천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수하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달아오른 얼굴이 이젠 흙빛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 당가인들은 하나같이 귀를 쫑긋 세우고 내력을 끌어 모았다.

가주의 말이 떨어지면 일제히 공격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가의 고수들은 당문천이 뱉어낸 말에 하마터면 주화입마까지 갈 뻔했다. 그의 말인즉,

“사람을 잘못 봤나 보군. 미안하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냐?”

당문천의 자존심은 이미 짐을 싸들고 어디론가 떠나 버린 지 오래인 듯싶었다. 당문천이 이 지경이니 당가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맥이 풀렸다. 이젠 싸우자고 가주가 외친다고 해도 상실한 전의를 되살리기도 힘들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표영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허허…….”

복수에 대해 참은 것은 아주 잘한 행동 같았다. 그러기엔 사천당가의 가주는 너무 모자란 사람인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가를 바라보니 한 점 흰구름이 사부님의 모습으로 변했다.

사부는 만족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부님도 웃으시는군, 하하하.’

표영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다. 고개를 내린 표영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당문천을 보고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자, 이제 다섯 번째 관문이로군.”

당문천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그만두면 안 될까?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아마 혼자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으리라. 하지만 그의 뒤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수하들이 있었다.

제16장 용서받을 수 없는 자

다섯 번째 관문은 장소가 옮겨져 당가의 암응각에서 이루어졌다.

독접각이 한바탕 소란으로 여기저기 파손되었기에 장소를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당문천과 표영이 마주 앉았다.

당문천의 뒤로는 당가의 사대장로와 곧 장로가 될 갈조혁이 서 있었고, 표영 뒤에는 능파 등이 자리했다.

탁자 위에 놀인 두 개의 잔을 바라보는 당가인들 중에 당문천이 대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당문천의 다리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탁자 밑에 놀인 당문천의 오른쪽 다리는 쉴 새 없이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은 열대여섯 살 정도 나이의 사춘기 소년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한 문파의 우두머리가 보일만 한 행동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당문천에게 다리를 떠는 습관 같은 건 없었다.

이번 대결의 방식은 이러했다. 두 개의 잔에는 절반 정도의 물이 채워져 있는데 거기에 각자가 몸에서 뽑아낸 독기를 타게 된다. 그 후 서로 잔을 바꿔 마시는 것이다. 한 치의 속임수도 있을 수 없는 대결이었다.

먼저 표영이 검지손가락을 잔에 담그고 독기를 뿌렸다. 잠깐 사이에 물이 녹차를 타놓은 것처럼 뿌옇게 변했다. 이어 당문천도 손가락을 담갔고 물은 잠시 후 짙은 회색으로 물들었다.

“자, 건배합시다.”

표영이 손을 뻗어 당문천의 잔을 높이 쳐들었다. 당문천도 웃음을 머금고 표영이 남긴 잔을 높이 쳐들었다. 그는 비록 웃고 있었지만 그건 솔직히 웃음이라 부르기 민망한 것이었다. 마구 울고 싶을 때 억지로 웃는 듯한 표정이라고나 할까.

“좋지, 건배하세.”

말은 호기롭게 했지만 사실 마시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 씨팔… 그래, 멋있게 죽자. 그래, 죽으면 될 거 아냐.’

당문천은 자신의 독이 상대를 쓰러뜨릴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상대의 독을 해독한다는 것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말 그대로 자살인 것이다. 능파와 능혼, 그리고 제갈호와 교청인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당문천의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당가의 고수들은 어느 누구 하나 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 중 유독 양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는 이는 갈조혁이었다. 그는 당가에 식객으로 있으면서 이제 장로가 될 입장에 놓였는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고 만 것이다 그의 마음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일이 요상하게 흘러가고 있구나. 자칫하다간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 아닌가. 과연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나중에 곡주님을 어찌 뵐 수 있을까.’

모종의 계획을 안고 당가에 성공적으로 잠입한 그로서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으로써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직 한 가닥 요행만을 기대할 뿐.

그때 표영이 잔을 높이 쳐들고 말했다.

“하하하, 천하의 거지들을 위하여!”

당문천도 그에 맞서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영원한 당가를 위하여…….”

표영이 거리낌없이 잔을 비우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표시로 잔을 거꾸로 뒤집었다. 당문천은 혹시나 중독 현상이 나타날까 싶어 바라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어떤 반응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 정도 독은 이미 표영에게는 물을 마시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당문천은 높이 쳐든 손을 서서히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자살이었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탁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졌소이다. 이제 당가는 그대의 것이오.”

당가의 사대장로는 속으로 탄식을 터뜨렸다. 역시나 무리였다. 이제 가문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나마 가주 당문천이 독을 마시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들은 만약 자신이 가주의 입장에 있었더라도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켜보는 표영은 마음이 뿌듯해졌다. 유혈 사태 없이 당가를 얻은 것이다.

“좋다, 너희들을 진개방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너희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씩 주겠다. 하하하.”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당문천과 사대장로, 그리고 갈조혁의 얼굴은 그만 핼쑥해지고 말았다. 선물이 뻔히 짐작이 간 것이다. 분명 독공의 고수이니 독에 관련된 것이리라.

그와는 반대로 제갈호와 교청인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또 하나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부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 않았던가. 하지만 너무도 태연자약하게 방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당가가 굴러 들어오다니… 대체 방주는 어떤 사람인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인이 아닐까? 무조건 검을 뽑아 들고 피를 봐야만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로구나.’

옆에 선 능파와 능혼의 생각은 제갈호와 교청인과는 조금 달랐다. 둘은 서운한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존의 독공이 위대한 것은 확인해서 기쁘지만 이건 너무도 맥없이 끝나 버린 것이 아닌가.’

모름지기 강호란 치고 받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맞붙어야 제 맛이고 지극히 마교다운 것이라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심지어 가주라는 작자가 독도 마시지 않고 항복을 선언하는 꼬락서니는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저런 놈이 이제까지 우두머리랍시고 꼴값을 떨었다니.’

‘밥이 아깝다, 밥이 아까워. 네놈을 낳고 너의 어머니가 미역국을 먹었겠지만 미역국이 아깝다, 아까워.’

그때 표영이 어느샌가 때를 밀어 만든 회선환 여섯 알을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자, 충성의 맹세로 하나씩 먹도록. 1년 동안 너희의 마음을 붙들어줄 것이다.”

즉, 이 말은 1년이 차면 독이 발작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가주 당문천을 비롯해 모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당문천과 사대장로가 회선환을 집어 들었다. 그때보다 한소리 큰 외침이 내전을 울렸다.

그건 갈조혁의 목소리였다.

“잠깐!”

모두의 시선이 갈조혁에게로 꽂혔고 갈조혁이 당문천을 보고 말을 이었다.

“가주! 이게 무슨 약한 소리오이까? 이럴 순 없소이다! 이들은 고작 다섯이고 당가엔 수많은 고수들이 있건만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이오! 모두 죽여 버리고 입을 봉해 버리도록 합시다!”

갈조혁의 말로 인해 순간 내전 안에 긴장이 감돌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정을 몰랐지만 갈조혁의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침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당가에 잠입한 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럼 과연 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사실 혈곡의 고수로 원래 신분은 혈살대의 대주이며 본명은 송도악이다. 혈곡은 암암리에 사파를 규합하기 위해 천면신공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 과정은 각 파에 잠입하여 최고 지도자의 습관과 말투, 그리고 동작 등을 철저히 익히고 그 문파나 가주 등을 죽이고 대신 천면신공으로 얼굴을 바꿔 그 파의 지도자 노릇을 할 계획이었다.

송도악은 바로 당가의 가주를 죽이고 변장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송도악은 어렵사리 당가에 잠입하기에 이르렀고 이제 장로의 대우를 받으며 하나둘 당가의 가주 당문천의 말투와 습관을 익히고 있었건만 뜻밖에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 한술 더 떠 독약을 복용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자 마지막 발악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이 비록 독공의 고수이며 무공이 뛰어나다 하나 그래 봤자 고작 다섯에 불과하다. 싸움이 시작되면 당가는 큰 피해를 입겠지만 그런 것은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난 오직 당가가 누군가에 의해 흡수되는 것만은 막아야하고, 나 또한 영영 이렇게 거지들의 무리 속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당문천은 느닷없는 외침에 회선환을 먹으려다 중도에서 멈추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엇을 망설이는 것입니까? 이대로 수천 년 지켜온 당가를 넘겨주어서야 되겠습니까?”

‘당문천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눈만 멀뚱멀뚱 뜨고 넘겨주지는 않겠지.’

그는 일대 혼전을 기대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당가와 거지 떼들이 양패구상하는 것일 테고 차라리 그런 결과가 갈조혁, 아니, 송도악에게는 더 나은 결과가 될 것이었다. 그때 성질 급한 능파가 삿대질을 했다.

“이 잡놈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정녕 네놈이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냐!”

원만하게 해결될 것 같은 상황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때 사천당가의 가주 당문천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송도악은 설마 하니 엉뚱한 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자자, 그만 합시다. 다 끝난 일 가지고 험악하게 인상 쓸 필요 있겠소이까. 자리를 옮겨 술이나 거나하게 마시도록 합시다.”

손까지 활짝 펼치며 당문천은 화사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뭐, 이런 경우가… 이 자식은 자존심도 없나?’

송도악은 뜨악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하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당문천이 그렇게 나오자 사대장로들도 긴장을 풀고 말을 받았다.

“아하하, 그렇게 하죠 뭐.”

“갈 형, 술이나 한잔하면서 이야기합시다. 하하.”

송도악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그는 이제 내전 안에 있는 사람 중 유일하게 난처함에 빠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제기럴! 어쩔 수 없다. 독약은 먹을 순 없는 일. 나 혼자라도 빠져나가야만 한다.’

그는 제일 가까이에 있는 장로 당추의 맥문을 잡고 손으로 목을 겨누었다. 워낙 예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던지라 당추는 미처 대처하지 못했고 어이없는 상황에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갈 형, 이거 장난이 심하시구려. 어서 손을 놓으시오.”

가주 당문천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어쩌려구 그래?”

표영과 그 일행은 이건 또 뭐냐는 표정으로 송도악을 바라보았다. 그건 왜 지네들끼리 난리법석을 떠느냐는 얼굴들이었다.

“나는 이 자리를 떠나겠다! 날 곱게 내보내 준다면 당추를 놓아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리고 말겠다!”

당가인들은 혹시라도 당추에게 무슨 일이 날까 봐 전전긍긍하며 손을 놓으라고만 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서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손을 놓으시오. 이번 일은 그냥 없던 일로 할 테니 흥분을 가라앉히시오.”

당가인들이야 분노한 가운데서도 조심스러웠지만 능파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한판 붙을 만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아 안타까워하고 있던 차에 잘된 일이었다. 능파의 손이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려진 채 느닷없이 뻗어갔다.

“네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마.”

엄청난 속도였다. 어찌나 빠르게 짓쳐 드는지 송도악은 잡고 있는 당추를 놓치고 몸을 비껴 피했다. 송도악이 당추의 곁에서 떨어지자 이때다 싶어 당문천을 비롯해 사대장로가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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