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2장 (93/199)

 # 92

92.

제14장 창룡방

약 두 달여 동안의 거지 수련이 마쳐진 후 드디어 해적을 소탕하는 시간이 되었다. 해적 토벌을 외치며 바닷가에 이른 표영 일행들 앞에는 신합 마을의 촌장으로부터 마을 유지들, 그리고 촌민들이 전송코자 나와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개중엔 상복(喪服)을 입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누가 죽은 사람도 없는 마당에 굳이 상복을 입고 나온 이유는 정든 거지들이 해적들을 만나면 살아날 가망성이 없을 것이고 그 시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모두는 한결같이 초상을 치르는 마음으로 표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표영은 사람들의 걱정 어린 눈동자는 무시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걱정들 마시고 어서들 집에 들어가세요. 곧바로 돌아오겠습니다. 하하하!”

표영의 말은 매우 활기가 넘치고 모습은 정감 어린 것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마지막 작별 인사로 비춰졌다.

“흑흑… 그래도 그동안 정들었었는데…….”

“잘 가. 거지들아, 이제 가면 언제 올까…….”

“왜 저렇게 죽으려고 하는 걸까?”

“우리가 뭐 잘 못해준 거라도 있었나?”

마을 사람들은 거지들이 타고 있는 배 주위에 이미 하늘로부터 저승사자들이 도착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가운데 아이들은 울먹이며 각자 부모에게 매달렸다.

“엄마, 엄마, 거지님들이 왜 나쁜 해적들에게 가는 거야? 가지 말라고 해봐… 응? 어서, 엄마.”

“거지님들∼ 부디 죽어서는 좋은 곳으로 가세요∼”

배에 올라탄 일행 중 무공이 얕은 이가 없었기에 그 말들은 속속들이 귓가로 파고들었다. 표영도 그렇고 모두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나중에 해적들을 잡아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일행이 탄 배가 서서히 육지에서 멀어져 가자 마을 사람들은 배를 향해 일제히 세 번 절을 올렸다. 본격적으로 초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하하하, 사람들이 정이 너무 많아도 문제군. 이젠 아예 우릴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구나.”

표영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모두가 따라 웃었다. 모두의 기분은 상당히 좋은 상태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거지 훈련도 마쳐진 데다 오랜만에 몸을 풀 기회가 주어졌으니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을 사람들의 걱정과는 정반대로 일행들은 기분이 들떠 어서 빨리 해적들이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해적이든 산적이든 뭐든지 빨리 나타나기만 해라. 썅!’

표영이 배에 기대앉은 채 발로 손패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얼마나 남았느냐?”

손패가 머리를 조아린 후 해적 근거지의 위치를 가늠해 보고 답했다.

“이제 약 반 시진(1시간) 정도면 창룡방의 거점 중 최전방에 위치한 선참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손패가 알고 있기로 창룡방은 세 개의 섬을 근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중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선참도는 육지 약탈에 힘을 쏟는 거점이었다. 표영은 이 정도면 주의를 줘야 할 시점이라 여기고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이번 창룡방을 접수하는 건 말 그대로 접수일 뿐이다. 연약한 해적들을 상대함에 있어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일을 저지르는 놈은 앞으로 내 얼굴을 다시는 못 보게 될 줄 알아라. 알겠느냐?”

“네!”

모두가 일제히 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답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능파가 손을 번쩍 들었다.

“방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냐?”

표영이 발을 까딱거리면서 물었다.

“아무래도 해적 놈들이라면 질이 좋지 않을 테니 교육을 목적으로라도 다리 한 짝씩은 부러뜨려야… 네?”

능파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표영이 검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하고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오호라… 어라어라… 능파! 말이 제법 많아졌구나. 네가 감히 내 말에 토를 달겠다는 것이냐?”

표영은 이 마두들을 풀어놓으면 얼마나 포악하게 될지 모르는지라 도착하기 전에 확실히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시각적인 효과나 경고성으로 뭔가를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능파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를 숙이고 진땀을 흘렸다.

“아하하… 제가 어찌…….”

당황함이 역력한 능파가 수염을 흔들릴 정도로 머리를 조아렸지만 이미 때는 늦은 지 오래였다.

“능파, 네놈은 힘이 남아도는가 보니 배에서 내려 직접 헤엄쳐 쫓아오도록 해라.”

“네?! 조, 존명.”

누구 말이라고 거부하겠는가. 능파가 풍덩 하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표영이 쓰윽 돌아보고 손패에게 명했다.

“손패, 속력을 더 내라. 이래서야 언제 가겠다는 거냐. 어서어서 가자.”

능혼은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능파의 머리는 바다에 잠겨 보이지도 않았다.

‘형님은 전혀 자맥질을 못하는데…….’

물론 그렇다고 초절정고수가 익사할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단지 조금 고생할 뿐 조금만 지나면 익숙해질 것이리라. 배는 속도를 더해 앞으로 나아갔고 능파는 손을 휘저으며 가라앉았다 솟아올랐다 하면서 헤매고 있었다.

“어라어라? 능파, 좀 더 힘을 내라. 늦게 오면 네놈은 앞으로 데리고 다니지 않겠다.”

내공을 실어 날린 말에 능파는 더욱 마음이 급했다. 이렇게 허우적거릴 수만은 없었다. 깊이 잠수하고 몸을 쭉 뻗어 앞으로 나가고 다시 솟아올라 호흡을 채우고 다시 잠수하여 뻗어 나가는 방법으로 배를 뒤쫓아 갔다.

조금 지나자 능파의 형체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시 반 시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배는 선참도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거기엔 한 척의 큰 배와 대여섯 척의 작은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그중 두 척의 작은 배가 쏜살같이 표영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하하하, 우리 진개방의 새로운 거지들이 마중 나오는구나.”

표영이 기분 좋게 웃어젖힐 때 어느새 배가 이르렀다.

각 배에는 다섯 명씩 합이 열 명의 해적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잔뜩 기대하던 얼굴이 삽시간에 험악하게 변해 버렸다. 좋은 건수는커녕 떨거지들이 앉아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 중 한 명이 인상을 구긴 채 소리쳤다.

“거지새끼들이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보구나! 감히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찾아온 것이냐!”

그 말에 표영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환하게 웃었다.

“하하하! 반갑구나, 부하들아, 그동안 고생이 많았나 보구나. 모두들 얼굴들이 많이 상했는걸?”

표영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능혼과 제갈호, 그리고 교청인과 만첨과 노각이 일제히 신형을 날려 해적들의 배에 착지했다.

휘휘휙-

몇 번 신형이 왔다 갔다 한 사이에 이미 열 명의 해적들은 혈이 제압당해 곧바로 배에 드러눕고 말았다.

“이, 이건 뭐, 뭐냐……. 네놈… 아니, 당신들은 누구요?”

어떻게 제압당했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쓰러진 것이라 해적들의 놀람은 극에 달했다. 그들도 칼질이라면 웬만큼 자신 있는 분야가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의 적들은 격이 달랐다. 그렇기에 네놈이라고 하려던 말을 급히 바꿔 당신들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우리? 우리는 해적 잡는 거지들이다. 하하하! 어서 가자.”

표영의 너스레에 해적들은 저마다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곧바로 손패가 기존에 타고 온 배에 오르고 해적들이 타고 온 배는 해적들 중 두 명을 풀어주어 선참도로 향하게 했다.

그때 선참도에 있던 해적들은 당연히 포획해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다경(15분)정도가 지나기도 전에 선참도에 있던 오십여 명 정도의 해적들은 넓은 공터에 무릎을 꿇고 앉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앞에는 표영이 팔짱을 끼고 모두를 내려다보았고 능혼 등이 좌우로 시립했다.

“에∼”

표영이 길게 말꼬리를 늘이며 연설을 준비했고 해적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많은 일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 중에는 해야 할 일들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네놈들은 해적 짓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조용∼

해적들은 아직까지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감을 못 잡은 터라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표영의 옆에 있던 능혼이 손을 날려 근처에 있던 바위를 쳤다.

푸스스- 주먹을 받은 바위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고 해적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태를 파악한 해적들이 일제히 고함치듯 대답하기 시작했다.

“해적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죽일 놈들이나 할 짓입니다!”

“부모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착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는 도둑이셨는데 저에게만은 바르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해적들은 모두 나쁜 놈들입니다!”

“아주 그런 놈들은 쳐 죽여야 합니다!”

“전 원래 착했는데 잡혀와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해적 짓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해적만 빼고 앞으로는 뭐든지 하겠습니다!”

“거지가 최곱니다! 만세, 만세! 거지님들, 만세!”

“나도 만세∼!”

한바탕 난리 소동이 벌어졌다. 그전까지 해오던 해적 짓에 대한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능혼의 주먹질의 효과는 그만큼 확실했다. 표영이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하루 내내 해적에 대한 불만과 그에 따른 폐해를 부르짖었을지도 몰랐다. 장내가 고요해지자 표영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책임자가 누구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의 시선이 중앙에 있는 한 사람에게 쏠렸다. 시선을 받은 광포묵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왼쪽 뺨에 긴 검상을 간직한 얼굴의 광포묵이 지어낸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언제 이런 간지러운 미소를 지어 봤겠는가.

“헤에∼ 접니다만…….”

표영이 제갈호에게 손을 내밀어 어느새 긁어낸 때 덩어리를 넘겨주었다. 제갈호로서는 이미 자신이 섭취했던 것인지라 또 독약이라 생각했다.

“제갈호, 저놈에게 먹여라.”

“네.”

광포묵은 불안감에 사색이 되었다.

“저 말 잘 듣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하지만 이미 제갈호에 의해 광포묵의 입은 벌어지고 때독이 들어갔다.

광포묵은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가운데 꾸역꾸역 삼켰다.

제갈호가 친절하게 광포묵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도 짐작했겠지만 이건 독이거든, 음… 해독은 1년 동안 어떻게 하는가를 봐서 방주께서 허락을 생각해 보실 것이다.”

광포묵은 몸에 힘이 축 빠져 그 자리에 바로 주저앉았다.

‘씨발, 이게 대체 뭐람… 어째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냐.’

그때 표영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광포묵, 너는 일단 이곳에서 수하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어라. 한 놈이라도 이탈자가 생기면… 흐흐흐,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그럼요, 그럼요… 이 한 목숨 다해 명을 따르겠습니다!”

선참도를 가볍게 점령한 뒤 다시 배를 타고 다음 장소로 출발하려는데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이 들온다.

“방주님, 이제 용서해 주세요. 저도 데려가 주셔야죠.”

능파였다. 죽을힘을 다해 헤엄쳐 결국 상황이 다 끝난 후 섬에 이른 것이었다. 표영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호, 능파∼ 어서 힘을 내라. 너무 느리구나. 하하하!”

그리고 다시 눈을 돌려 손패를 바라보고 말했다.

“손패, 전속력으로 항진하라.”

다시금 배는 능파를 버려두고 다음 장소인 중해도를 향해 나아갔다.

“능파, 어서 와라. 너무 느리구나. 하하하!”

다시금 능파는 거품을 물지 않을 수 없었다.

“크아악∼ 지존이시여∼!”

해적들의 두 번째 근거지인 중해도의 상황도 선참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곳의 책임자인 부방주 오걸은 회선환을 먹고 넋을 잃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어린아이마냥 울어 젖혔다.

“으아앙∼ 내 팔자야∼”

중해도에 머물고 있는 해적들의 수효는 대략 100여 명 가량이었는데 아무래도 수효가 수효다 보니 이곳에는 만첨과 노각을 두고 떠났다.

“애들 심하게 다루지 말고 잘 지켜보고 있도록 해라.”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중해도를 점령한 후 다시 배를 출항시켰다.

능혼은 형님이 걱정돼 어디쯤 왔나 보려고 바다에 눈길을 주니 멀리 물이 출렁이는 것이 분명 형님일 것 같았다.

능혼은 차마 ‘방주님, 이제 용서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그저 물끄러미 표영을 바라보았다.

표영은 무슨 뜻으로 바라보는지 충분히 짐작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 지존께서 용서하시려는가 보구나.’

표영이 입을 열었다.

“자, 다시 전속력으로 달려가자.”

능혼의 눈에 체념이 스쳤다.

‘그럼 그렇지. 지존께서 쉽게 마음을 돌리시겠는가.’

배는 다시금 능파를 떼놓고 해적들의 본거지인 해왕도로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