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91.
귀식대법 나흘째.
귀식대법을 연마(?)한 지 벌써 나흘이 지났다. 여기에서 ‘벌써’라는 말은 순전히 관망하는 표영과 동네 노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입장에서일 뿐 능혼 등에게 있어서는 벌써가 아닌 겨우, 혹은 이제야 나흘이 지난 것뿐이었다.
총 닷새간 익히게 되는 터라 장장 하루가 더 남게 되었으니 그 세월은 수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보다 더한 기다림이요, 인내가 요구되는 시간이랄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나흘이 지나는 동안 물조차 마시지 못하고 온갖 시달림을 당하느라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은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상태라 피가 머리가 몰려 아무 잡념도 일어나지 않았다. 커다란 고목나무는 열매를 내는 유실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일곱 개의 열매를 달고 있었다.
헌데 특이한 것은 그 나무에서 맺힌 열매라는 게 거지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매달리게 된 데는 노인들이 수작을 부린 것 때문은 아니었다.
노인들은 사흘째가 지나면서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자 질려 버려 내기를 포기하고 그저 관망하려고 했었다.
그때 표영이 말하길 ‘이번에는 나무에다 한번 매달아 보는 게 어떨까요?’라는 말을 꺼냈고, 노인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나흘째 되는 이날아침부터 인간열매가 된 것이었다.
여러 노인들 가운데 한 노인이 나무 위에 바라보며 표영에게 말을 건넸다.
“자넨 정말 대단한 부하들을 두었군. 여태까지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니 너무 훌륭하지 않은가. 근데 말일세. 아무 뜻도 없이 저렇게 꼼짝 않고 있는 것은 아닐 텐데 특별한 목적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 말에 다른 노인들도 혹시 무슨 재미난 말이라도 들을까 싶어 표영을 바라봤다.
“그러게 말이에요. 모두 제 부하들이지만 참으로 대단한 놈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음… 그런데 어떤 목적이라… 글쎄요.”
표영은 한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애써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뭔가 생각난 듯 무릎을 세게 쳤다.
“아하! 그러고 보니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군요.”
“뭔데?”
“뭐야?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보게.”
“그러니까 꽤나 전에 했던 이야기 같은데 지네들끼리 뭐라고 떠들면서 얼핏 들리는 소리에 무슨 철면피 신공을 익혀야 한다고 그러지 뭐겠습니까.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철면피 신공이라니……. 또 이런 말도 하더라고요. 어떤 상황에서도 부끄러워하거나 어색해하지 않는 경지에 올라야 한다고 마구 열변을 토하지 뭐겠어요. 정녕 저놈들은 분명 거지로 대성할 수 있을 겁니다.”
표영의 말에 노인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오호∼ 철면피 신공이라… 거참, 대단하구먼.”
“강호에는 무공이 뛰어난 사람들이 무슨무슨 신공을 익힌다고 하더니만 저놈들은 아주 특이한 놈들일세.”
“근데 생각해 보니 그럴듯하군. 고춧가루를 코에 붓고 닭털로 코를 간지럽혀도 재채기 한번 하지 않는 놈들이 아닌가 말이야. 그저께 주 영감이 저기 제일 끝에 있는 놈의 머리를 잡아당겼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지 않은가. 그러니 세상천지에 무슨 날벼락이 떨어지고 부끄러운 일이 벌어져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또 다른 노인은 표영을 걱정하기도 했다.
“이보게, 자네가 두목으로 있지만 늘 조심해야하네. 저런 놈들이 한번 고집을 피우면 감당하기 힘든 법이야.”
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야죠. 늘 조심하겠습니다.”
실제 이런 노인들과 표영의 대화는 매달려 있는 능파 등에게 고스란히, 그리고 또렷이 들렸다. 듣지 않으려면 귀를 막아야 하나 손을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이제 이들 모두는 황당해하거나 혹은 분노가 일지도 않았다. 그저 인생이 다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마냥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바람이 일면 조금씩 흔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여전히 표영과 노인들이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13장 금강불괴
“야, 이 거지새끼들아! 니들이 인간이냐. 뭐냐! 어? 그렇게 밥만 축 내고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정녕 죽고 싶은 거냐?”
신합 마을의 촌장 성산봉은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표영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촌장의 뒤쪽에는 마을 아저씨들이 여러 명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당장에라도 욕을 뱉어낼 기세였다.
촌장으로부터 한바탕 욕을 뒤집어쓴 표영은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마냥 뻘쭘하게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표영을 향해 다시 성산봉이 핏대를 세웠다.
“이 거지새끼들아! 젊은 놈이나 늙은 놈들이나 어쨌든 밥값은 하고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이 썩을 놈들 같으니라고!”
죽일 듯이 외쳐 대는 성산봉의 말은 사나운 기세가 역력했지만 그 말에는 지금 상황과 도무지 맞지 않는 모순된 부분이 있었다. 지금 그 앞에는 표영 혼자만 서 있을 뿐이건만 그는 말끝마다 ‘거지들아’라고 복수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산봉은 급기야 옆에 놓인 몽둥이를 집어 들고 표영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때 표영이 손을 번쩍 들고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방금 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는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까지입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촌장 성산봉도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괜찮았나? 하하하… 이거 난 아무리 해도 어색하기만 하네.”
뒤쪽에 있던 마을 아저씨들도 굳은 표정을 풀고 일제히 박수를 쳤다.
“훌륭합니다. 촌장님, 아주 실감나는걸요.”
표영도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능숙한 연기를 펼치시다니 본 거지로서는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안색을 신중하게 한 후 주의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촌장님, 지금은 연습이니까 몽둥이질을 하지 않으셨지만 실전에서는 진짜로 휘두르셔야 합니다. 몽둥이질 연습은 잘하고 계시겠죠?”
그 말에 성산봉이 슬그머니 몽둥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게 말이야… 이제껏 누굴 때려본 적이 없어서 여간 힘든 게 아니라네.”
“어허, 그렇게 약한 마음을 품으셔야 되겠습니까. 자꾸 그렇게 약한 마음을 가지시면 해적들을 소탕하는 계획은 취소해 버릴 겁니다.”
지금 표영이 꾸미고 있는 일은 수하들에게 금강불괴를 익히게 하기 위해 촌장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을 주민들을 교육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워낙에 이곳 신합 지역의 사람들이 선량하고 따스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라 화를 내는 것과 후려패는 연습을 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해적들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해적들이 부정기적으로 찾아와 재물과 곡식을 뜯어간다는 말을 표영이 듣고서 그동안 얻어먹은 것들에 대한 보답으로 해적들을 소탕해 준다고 말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정작 촌장 성산봉은 극구 말리고 있는 입장이었다.
“근데 말이네. 자네가 말한 해적 소탕 말일세. 그건 아무래도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닐까?”
표영은 촌장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괜스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는 것처럼 해적들을 격동시켜 더 큰 보복을 받을 것이 두려운 것이다. 또한 촌장은 아무 죄도 없이 거지들이 해적들에게 죽게 될 것도 염려스러웠다.
“염려 마세요. 해적들을 만나도 마을 이야기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실제 그 녀석들 정도는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아요. 하하하하!”
표영은 크게 웃었지만 촌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심히 걱정스러웠다. 이제 어느 정도 정이 들었는데 무슨 생각으로 해적들에게 간다고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표영이 웃음을 멈추고 다음 차례를 불렀다.
“자, 그 다음은 고 씨 아저씨 나오세요. 한번 멋지게 화를 내 보시길 바래요.”
40대 장년 고욱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입이 어눌하게 열렸다.
“자, 잘해야 할 텐데… 부족해도 너그럽게 봐주게.”
“아무렴요.”
표영이 환히 웃어준 것에 용기를 얻은 고욱이 크게 소리쳤다.
“이 거지새끼야! 어디 와서 빌어먹겠다는 것이냐! 내 손에 죽고 싶은 거냐!”
고욱도 촌장이 그리했던 것처럼 침을 튀기며 분노를 발했다. 그렇게 능파를 비롯한 수하들에게 금강불괴를 수련케 하고자 애쓰는 표영의 준비 작업은 열심히 진행되었다.
금강불괴 첫째 날.
표영은 촌장의 집 앞에 이르러 수하들에게 말했다.
“자,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금강불괴를 익히도록 하겠다. 우리의 금강불괴는 진개방 특유의 것으로 소림사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차원을 달리한다는 말을 유달리 강조하는 바람에 교청인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저리도 거창하게 떠드는 걸까. 며칠 전부터 어디를 싸돌아다니더니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도 같은데…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으려나.’
그녀는 참혹한 귀식대법 수련이 끝난 후 만천화우를 익혔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사실 그녀로서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지만 사람이란 게 잊으려 하면 더욱 떠오르지 않던가.
만천화우가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일까 궁금해하던 그녀에게 떨어진 지상 명령은 머리의 비듬을 움켜쥐고 날리는 수련이었다. 이로 인해 그녀가 깨달은 것은 무공 이름이 거창한 것일수록 수련의 처참함은 말로 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예전의 그녀라면 어찌 비듬을 암기처럼 날린다는 것을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뿌리며 오 일간에 걸쳐 밤낮으로 비듬을 날려야만 했다.
‘그래… 교청인아, 이번 금강불괴만 통과하면 수련이 마쳐지니 조금만 더 인내를 갖도록 하자. 영약 복용에 뇌려타곤까지 이룬 내가 뭘 못하겠느냐.’
그녀는 거의 체념의 수준까지 이른 상태였다. 그녀의 짧은 상념은 표영의 말에 의해서 깨어졌다.
“…너희는 금강불괴를 연마하는 과정에서는 어떤 험악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절대 내공을 운용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호신강기를 펼침에 있어서는 몸의 비축한 때의 두께에 의존해야만 할 것이다. 알겠느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모두들 대답 소리만큼은 우렁찼다. 표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안으로 들여보냈다.
“자, 가라. 그리고 꼭 밥을 얻어서 나오도록 해라.”
능혼 등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서로를 마주 봤다. 이건 너무도 의외였던 것이다. 금강불괴라고 해서 특이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건만 거지 본연의 구걸을 하는 것이라니…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이 없었다.
‘지존께서는 마지막이라고 조금 수월한 것을 준비하셨구나.’
‘후후, 이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마음씨가 좋으니 구걸이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우리가 영약 복용을 할 때도 왜 굳이 개밥을 먹느냐며 밥을 싸주곤 했지 않던가.’
‘휴∼ 한시름 놨다.’
각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수련에 적극적이면서 또한 제일 나이가 많은 능파가 큰 소리로 외쳤다.
“계시오∼. 밥 좀 얻으러 왔소이다만!”
능파의 소리를 들으며 모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촌장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기시겠지? 아무렴, 촌장님이 어떤 분이신데… 후후후.’
하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기대를 산산이 부숴 버리는 말이었다.
“어떤 새끼들이냐? 어디 할 짓이 없어서 거지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이냐!”
“커억∼”
경악성을 지르면서 모두는 각자의 귀를 의심했다.
‘이, 이게 아닌데…….’
기대와는 달리 촌장 성산봉은 거세게 문을 박차듯이 열고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든 채 달려들었다.
“이 거지새끼들이 완전히 돌아버렸구나. 오늘 본때를 보여주마!”
그는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누구 가릴 것 없이 패버렸다. 이미 촌장은 표영으로부터 수많은 훈련을 받은 터라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능파 등은 표영으로부터 혹시 맞더라도 절대 내공을 사용하거나 손을 쓰지 말도록 이야기를 들은 터라 속절없이 몽둥이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능파를 비롯한 모두는 맞으면서도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 이 순하디 순한 사람들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 촌장 성산봉이 안쪽을 향해 외쳤다.
“다들 나오게! 여기 거지새끼들이 왔네! 나 좀 도와줘야겠어!”
교청인이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아 있다가 이건 또 뭔 소린가 하고 안쪽을 바라보았다.
‘또 누가 있었나? 그저 한두 명 정도 더 있겠지.’
안을 바라보던 그녀의 동공이 방울만 하게 커졌다.
“으게게켁!”
그녀의 입에서 해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집 안에서 약 십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나온 것이다.
‘뭐,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그때부터 마당에서는 몽둥이가 사방을 날았다. 촌장 혼자서 몽둥이를 휘두를 때는 그런대로 맞을 만했지만 이젠 장난이 아니었다. 마당 중앙으로 몰린 채로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없이 날아드는 몽둥이들 중에서 제갈호와 교청인의 눈가에 어디서 자주 본 듯한 몽둥이가 보였다. 그 몽둥이는 다른 것에 비해 한 번씩 몸을 때릴 때마다 유달리 아프게 했다.
맞는 가운데서도 눈을 힐끔 들어 바라보니 거기엔 표영이 신바람을 내며 타구봉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아, 씨발… 저것이 두목이라고……. 에라, 이 방주 개자식아!’
‘나쁜 놈, 개새끼, 방주 이 더러운 놈!
둘은 속으로 온갖 욕을 해대며 표영을 씹었다. 결국 이 모든 변화는 방주의 음모였던 것이다.
수많은 몽둥이질 속에 금강불괴 수련은 이어졌고 장장 오 일 동안 마을을 돌며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