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90.
“부르셨습니까. 방주님.”
약간 쫄은 기색으로 능파가 대답하자 표영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매우 훌륭하다. 대단한 호신강기가 아닐 수가 없구나. 넌 통과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이 모든 게 다 방주님의 은덕입니다.”
뭐가 감사하고 뭐가 은덕인지도 모르지만 능파는 연신 허리를 숙였다. 이제야 호신강기의 실체에 대해 확실히 감을 잡은 다른 이들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대체 어느 정도까지 되어야 방주의 마음에 흡족할 수준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음은 능혼 차례였다.
표영이 손을 뻗어 팔뚝을 매만지자 역시나 대단한 때가 형성되어 있었던지 한 움큼 떨어져 나왔다.
표영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너도 고생이 많았다. 통과.”
“감사합니다.”
세 번째는 교청인이었다. 표영은 교청인의 팔뚝을 한번 바라보더니 실망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쯧쯧, 이것도 거지라고… 널 데리고 다닐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구나.”
시커멓게 변해 버린 팔뚝이었지만 표영은 한눈에 보기에도 그저 살짝 때가 덮여 있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뇌려타곤을 나흘째에서 멈춘 탓도 있겠지만 뭔가 절실한 노력이 부족해 보였다.
“내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다 아이들 덕분인 줄 알아라. 하지만 시간 나는 대로 호신강기가 쌓이도록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교청인은 능파와 능혼의 때를 보고 잔뜩 겁을 먹고 있었는데 의외로 쉽게 넘어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방주님.”
“시끄러, 저리 비키기나 해.”
표영은 듣기도 싫다는 듯이 옆으로 이동했다.
다음은 제갈호였다. 손을 뻗어 팔뚝을 만지자 때가 어느 정도 배어 있긴 했지만 능파와 능혼에 비하자면 턱없이 모자랐다.
“이건 뭐냐, 대체. 수련을 한 거냐, 만 거냐?”
제갈호의 안색이 핼쑥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 저는 열심히 한다고 했습니다만…….”
“넌 불합격이다.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다니.”
제갈호는 자신이 봐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호신강기(?)를 쌓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불합격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미 표영은 다음 차례인 손패의 팔뚝을 점검하고 있었다.
표영이 혀를 찼다.
“쯧쯧쯧…….”
그 다음 만첨과 노각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이런 녀석들을 봤나. 내가 그토록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고 했건만 이렇게 게으를 수가 있단 말이냐.”
만약 이 말을 표영의 부모 표만석과 화연실이 들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세상천지에서 가장 게으른 만성지체의 아들이 이젠 다른 사람을 게으르다고 꾸짖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표영은 한바탕 호통을 친 후 불합격한 네 사람에게 말했다.
“가서 능파와 능혼의 팔뚝을 보고 배우도록 해라. 어떻게 젊은 놈들이 겨우 이 정도까지밖에 되지 않는 거냐.”
제갈호 등은 대체 능파와 능혼의 호신강기(?)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저러나 하고 직접 눈으로 확인해 봤다.
뜨악∼.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였고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말 그대로 호신강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제갈호와 만첨, 그리고 노각이 절실히 부족함을 느끼고 돌아설 때 손패는 이건 불공정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코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불합격한 이들을 바라보는 능파와 능혼의 얼굴에도 미안함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몸에 쌓인 것은 장장 200년 동안을 지내면서 쌓인 때였던 것이다.
대법이 풀리면서 많이 떨어져 나갔다곤 해도 남은 것만도 대단한 것이었다. 거기에 뇌려타곤까지 똑같이 수행했으니 제갈호 등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하지만 깜박 그 사실을 망각한 표영은 불합격한 네 사람을 다시 오 일간 뇌려타곤을 수련토록 명령했다.
“뇌려타곤∼.”
제12장 귀식대법
마을 공터에는 마치 죽은 듯이 일곱 명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지금 상황은 귀식대법을 익히고 있는 것이었다.
근본 귀식대법이라 함은 심장의 박동까지 정지시키고 체온을 하강시킴으로써 인기척을 없애는 수법으로 주로 적에게 동정을 들키지 않고 잠복할 때 쓰인다.
무공을 익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종적을 주로 호흡 소리를 통해 아는데 내공이 높을수록 그 호흡의 간격이 길고 고르기 때문에 호흡이 끊어지거나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없어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절정고수에게는 그 방법만으로는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이 귀식대법을 익히는 것이다.
귀식대법을 시전할 때 초기 단계에서는 이를 시전하는 동안 오관의 활동이 완전히 멈춰 정말로 시체와 다름이 없어진다. 그리고 스스로의 공력 정도에 따라 깨어나는 시간만 조절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지에 오르게 되면 오관의 활동을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겉보기에는 시체처럼 보이더라도 시전자는 주위의 동정을 듣거나 보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이 펼치고 있는 것은 실제 귀식대법이 아니었다. 그저 생으로 누워 있는 것뿐. 그 주위에는 변함없이 동네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이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 노인들 옆에는 표영이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저거 혹시 죽은 거 아니지?”
노인 중 한 명이 묻자 표영이 웃으며 답했다.
“하하, 죽기는요. 그냥 쉬고 있는 거죠.”
“그래도 어째 꼼짝도 하지 않는 게 영 불안하구먼.”
“그러게 말이야. 아침부터 지켜봤는데 도통 움직이질 않네. 숨이라도 쉴라치면 가슴이 솟았다가 내려앉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건 능파를 비롯한 모두가 무공을 익힌 터라 일반인들처럼 호흡하는 것이 드러날 정도로 표가 나지 않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노인들은 아직 이들이 모두 무림고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염려스러움울 감추지 못했다.
“내가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나도 감세.”
몇몇 노인들이 궁금한지 호기심 섞인 목소리로 말한 후 누워 있는 일행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눈을 까뒤집어 보기도 하고 코에 손을 가져다 대보기도 하면서 생존 여부를 확인했다.
“살아 있긴 하구먼.”
“혹시 어디 아픈 것은 아니겠지? 요 며칠 계속 온 동네를 구르더니 끝내 탈이 난 모양이야.”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러게 내 작작 좀 돌아다니라고 얼마나 말했었나. 늙은이 말 들어서 손해 볼 것 없다니까.”
그런 노인들의 말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모두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귀식대법은 총 5일간 계속될 터였다.
그동안은 눈을 떠서도 안 되고 말도 해서는 안 되며 조금이라도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식사를 못하는 것은 당연했고 물도 마실 수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잠이라도 자면 아무 힘도 들지 않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잠을 자게 되면 몸을 뒤척이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그동안의 것은 다 무효가 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니 누워 있더라도 결코 편한 시간이 아니었다.
노인들이 눈을 까뒤집어도 그냥 꿋꿋이 견뎌내야만 했다.
노인들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중 한 노인이 표영을 보고 물었다.
“이보게, 자네가 두목 맞지?”
표영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아하하… 그렇긴 하죠.”
“쟤네들 언제까지 저렇게 있을지 알고 있나?”
“글쎄요. 재들이 고집이 보통 센 것이 아니라서 저도 잘 모르겠는걸요.”
누워서 그 말을 듣는 모두는 순간 머리가 돌아버리는 것 같았다. 귀식대법을 펼치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저런 말을 태연히 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희한한 놈들이군.”
옆에 있던 다른 노인이 좋은 생각이 난 듯 무릎을 치고 말했다.
“우리 내기하는 게 어떻겠나? 저렇게 언제까지 있을지 알아맞히기 하는 거 어때?”
“그거 재밌겠네.”
“좋아, 밥 세 끼 내기 하세나.”
“그래, 부담도 없고 좋지.”
“나는 오늘 밤 자정까지로 하지.”
“자네 너무 거지 떼들을 무시하는 거 아닌가. 저놈들이 보통 놈으로 보이냔 말일세. 개밥을 주식으로 삼고 뇌려타곤을 외치며 7일간을 구른 놈들이야. 난 내일 모레 정오까지로 하겠네.”
“그럼 난 삼 일로 하지.”
온갖 추측들 속에 흥미진진하게 내기가 진행됐다. 그때 가만히 있던 표영이 끼어들었다.
“언제 일어나느냐를 가지고 내기를 하시는 것도 좋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한 오륙 일간은 일어나질 않을 것 같으니 차라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래서 제일 먼저 저놈들을 움직이게 하는 분이 이기는 것으로 말이죠.”
노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좋아했다.
“그게 더 재밌겠는걸.”
“그래, 그렇게 하자고.”
노인들이 좋아한 것에 반해 능혼 등은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렸다.
귀식대법을 익히라며 꼼짝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깨어나게 하는 시합을 시키다니!
각자는 속으로 한마디씩 내뱉었다.
능파.
‘지존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충성스럽게 말씀에 따르는지 보려 하심이다. 난 결코 지존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그래, 능파. 넌 할 수 있어.’
능혼.
‘교주께서는 어쩌려고 저러시나. 과연 이렇게 해서 언제 천하를 제패할꼬. 아, 심히 걱정이로구나.’
손패.
‘지존의 말씀 속에는 내가 깨닫지 못한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난 견뎌내고 말리라.’
제갈호.
‘아, 씨파…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냐. 내가 어쩌다 저런 놈한테 걸려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이제 또 무슨 곤욕을 치를까.’
교청인.
‘잘한다, 잘해. 아주 괴롭혀 죽일 생각이로구나. 그래, 날 죽여라, 죽여! 이놈아!’
만첨과 노각
‘어떻게 인간이 저리도 태연히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아냐, 인간이 아니라고.’
그들이 각기 상념에 잠겨 다짐하고 혹은 괴로워할 때 노인들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노인이 제갈호에게 달라붙어 손가락으로 겨드랑이 사이를 간지럽혔다.
“헤헤, 이 방법에는 견딜 사람이 없는 법이지.”
제갈호는 겨드랑이로부터 온몸으로 간지러움이 퍼지자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깨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한동안 제갈호를 간지럼 태우던 노인은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른 방법을 생각하느라 머리를 굴렸다.
제갈호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다.
만첨과 노각에게는 성질 급한 두 노인이 달라붙었는데, 그들은 처음엔 흔들어 보다가 점점 강도가 세지더니 이젠 아예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어라? 이것 봐라? 꿈쩍도 하지 않네.”
퍽퍽. 퍼퍼퍽.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몸이 옆으로 틀어졌지만 만첨과 노각은 전혀 미동도 없었다. 물론 속으로는 온갖 욕을 다 퍼붓고 있었지만 말이다.
한편 능파에게 달라붙은 노인은 물을 한 동이 길어 와서 얼굴에 부었고 능혼을 깨우려는 노인은 집에서 닭털을 하나 뽑아와 콧구멍 속에 넣고 재채기가 나오게 하려 했다.
또한 손패의 경우엔 상황이 별로 좋지 못했는데 한 노인이 언제 가지고 왔는지 고춧가루를 탄 물을 가져와 콧구멍에 흘려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만했지만 손패는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며 참아냈다.
하지만…….
주르륵.
그렇다. 참긴 했지만 눈물이 흐르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손패는 마치 슬픈 사연이라도 간직한 사람처럼 누운 채 눈물을 눈가로 흘렸다.
그런 와중에도 형편이 가장 나은 쪽은 교청인이었다. 그녀는 그래도 여자 거지라는 이유만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교청인에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한 노인이 자신의 신발을 벗고서 교청인의 코에 대고 냄새를 풍겨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각자 참을 수 없는 고문을 당하는 가운데 제갈호는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었다.
‘방주라는 놈을 내 죽여 버리고 말겠다!’
그는 인간으로서 받을 수 없는 온갖 괴롭힘에 항거하여 벌떡 몸을 일으켜 표영에게 달려갔다. 그리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표영에게 주먹을 날려 턱을 명중시켰다.
표영은 정통으로 얻어맞아 바닥을 나뒹굴었고 그렇게 넘어진 표영을 제갈호는 무지막지하게 짓밟았다.
-죽어라, 이놈아! 죽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라고 하고 다니느냐! 그동안 당한 것에 배로 갚아주마!
얼마나 후려 팼을까. 아예 쫙 뻗어버리고 심지어 꿈틀대지도 않게 되었을 즈음 주먹을 거둔 제갈호가 다른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일제히 감탄을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새로운 방주님이시다. 모두 엎드려 경배하자.
-제갈 방주님을 뵈옵습니다.
-영명하신 제갈 방주님, 천세 만세 누리소서.
한결같이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제갈호가 손을 들어 답례했다.
-모두들 일어나라. 하하하! 이제부터 본 방은 나의 뜻을 따라 거지를 벗어나…….
그때였다 제갈호의 귀로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른신들, 어때요. 꿈쩍도 하지 않죠? 하하하, 그놈들 원래 대단한 놈들이라니까요.”
그건 표영이 손가락으로 수하들을 가리키며 노인들에게 말을 건네는 소리였다.
그렇다. 제갈호가 벌떡 일어나 표영을 팬 일은 그저 상상이었다. 단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상상….
그리고 다시금 제갈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노인에게 걸려 대머리가 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