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
제11장 뇌려타곤으로 호신강기를 익히다
어촌 마을 신합의 주민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표영 일행의 하는 짓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늘 보는 것이라곤 넓게 펼쳐진 끝없는 바다뿐이던 그들에게 이것은 기막힌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전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개밥을 먹더니 이젠 온 동네를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뇌려타곤 이틀째.
표영이 옆에서 걸으며 똑바로 구르고 있는지 점검했으며 다음엔 어디로 굴러야 할지 방향을 지시했다.
“자자, 교청인. 너 똑바로 안 하면 오늘 밤까지 돌린다. 힘을 내라, 뇌려타곤∼.”
뇌려타곤을 외치는 표영의 목소리는 낭랑하기 그지없었다.
근본 ‘뇌려타곤’이라 함은 지랄병이 난 당나귀가 정신을 잃고 땅바닥을 마구 군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공격을 아무래도 피할 방법이 없을 때 땅바닥을 마구 굴어서 간신히 몸을 피하는 모습을 일컫는 것으로 그 모양이 참담하고 부끄러워 고수들은 사용치 않는 수법이랄 수 있었다.
연습을 하더라도 한 번만 해도 다시 하고 싶지 않을 것이건만 어제부터 시작된 뇌려타곤은 아침을 먹은 후 해질 때까지 이루어졌다.
“자, 이번엔 오른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뇌려타곤∼.”
그렇게 한쪽에선 독려하고 또 열심히 구르고 있는 일행들 뒤쪽에는 대여섯 명의 노인들이 뒤따라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 아닌가. 이런 재미난 구경거리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어.”
“그러게 말일세.”
“근데 자네들 중에 왜 저렇게 구르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 있나?”
“내가 알기론 말일세. 뭐라더라… 응, 맞다. 진정한 거지가 되기 위한 수련이래지 아마.”
“허허, 거참… 중원은 넓고 미친놈들은 널렸다 해도 이거 너무하는군.”
“근데 더 희한한 것은 말이야. 불귀도의 안내자 손패까지 거지가 되기로 작정했다는 걸세.”
“불귀도를 찾는 손님이 없다 보니 아예 이 기회에 거지가 되기로 작정했나 보이.”
“손패가 거지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헐헐.”
“그나저나 저기 두 늙은이 있잖은가. 거 되게 불쌍하구먼. 젊은것들이야 그런가 보다 하지만 늙어서 너무 고생이 많잖은가. 어쩌다 험한 거지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까?”
“아, 글쎄 그게 말이네. 듣고 보면 또 그것도 아니더구먼. 나도 자네처럼 궁금해서 물어봤지 뭔가. 왜 젊은 거지에게 휘둘려서 이런 고생을 하냐고 말일세.”
“뭐라던가?”
일제히 중간에서 걸어가는 노인에게 시선이 쏠렸다.
“아, 글쎄… 기가 막혀 말문이 다 막히더군.”
“대체 뭐라고 했는데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저기 두 사람 중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있잖은가. 저 늙은이가 싱글벙글거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야. ‘댁도 한번 해보슈. 이게 얼마나 재밌는데’ 이러더란 말일세.”
“허허, 거참. 말문이 막힐 법도 하네그려.”
“하하하, 미친놈들.”
능혼을 위시한 모두는 거의 환장할 지경이었다.
구르는 것만으로도 곤혹스럽건만 계속 뒤따라오며 입방아를 찧어대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무공을 익힌 이들은 얼마나 귀가 밝은가, 듣지 않으려고 해도 귓속으로 쏙쏙 들려오지 않는가 말이다.
방향을 전환하라는 말에 따라 모두가 오른쪽으로 굴렀다. 이 길은 시장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어제도 온 동네를 20바퀴 정도를 돌았는데, 그중 가장 가기 싫은 곳이었다. 사람들이 우글우글 대는 곳에 7명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인 것이다.
시장 통에 진입하자 좌우로 늘어선 상인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하하하, 또 왔네. 어이구, 힘들어서 어떡하나… 불쌍도 하지.”
교청인은 정말 울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때 이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좀 쉬었다 하지 그래. 너무 열심히 하다가 나중에 아프면 어쩌려고 저러나.”
이번엔 생선을 파는 마음씨 좋은 곰보 아저씨 소복이 말했다.
“이보게들, 그쪽은 아까 물을 뿌려놨으니 옆으로 돌아가라고.”
그 말에 표영이 손을 흔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이구,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다니요… 감사합니다.”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나. 자네들을 보면 내가 하는 일이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아서 큰 위로가 된다네. 난 이제 내 일에 불만이 없네. 하하하.”
“아, 정말 다행이네요. 아저씨, 힘내세요.”
표영은 정겨운 대화를 나눈 후 부하들을 물기가 묻은 쪽으로 진격시켰다.
“똑바로 전진한다, 전진. 우리에게 돌아감은 없다. 뇌려타곤∼.”
일행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그렇게 뇌려타곤의 이틀째 수련이 이루어졌고 마칠 때까지 온 마을을 20바퀴를 돌게 되었다.
뇌려타곤 나흘째.
이제 따라다니는 무리는 거의 오십 명에 육박했다. 한마디로 대단한 인기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이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이었지만 어쨌든 표영 일행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고기를 잡으러 가야만 하는 어부들은 어쩔 수 없이 구경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는데, 아침나절에 조금 보는 것만으로 그냥 만족해야만 했다.
“자,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뇌려타곤∼.”
표영이 기운찬 함성으로 뇌려타곤을 외치는 것으로 하루를 열었다. 그 말에 새벽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큰 소리로 따라 외쳤다.
“뇌려타곤∼.”
우렁차게 퍼지는 소리에 일행은 구르기를 시작했다.
과연 언제쯤 이 험난한 구르기가 끝날 것인가. 마음에 절망이 퍼졌다.
그들은 차라리 1단계 과정인 영약복용이 훨씬 좋았었다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해 보라.
하루에 동네 20바퀴를 구른다는 것, 그것은 말 그대로 처절함이었다. 하지만 늘 괴로운 나날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흘째 되던 날부터 밤마다 동네아이들이 찾아왔는데 두 손 가득 먹을 것을 가져와 건네주기도 했던 것이다.
나흘째 되던 날도 온 동네를 쏘다니며 구르기를 마쳤을 때 아이들이 찾아왔다.
“이거 좀 드세요. 거지님들.”
“엄마가 거지님들 수고하신다고 가져다 드리래요.”
각기 음식을 받아 들었고 일행 중 제일 마음이 여린 교청인이 눈물을 흘렸다.
“여자 거지님, 어디 아프세요? 왜 울어요? 의원님을 모셔올까요?”
“응? 아, 아니야…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
눈물을 훔치는 교청인의 모습은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이제 열 살이 조금 넘은 남자 아이 유청이 표영에게 조르르 달려가 말했다.
“거지 대장님! 저기 여자 거지님은 아픈가 봐요. 내일부터는 좀 쉬도록 해주세요. 대신 제가 내일부터 뇌려타곤을 할게요. 솔직히 저도 무척 하고 싶거든요.”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표영에게 몰려와 한마디씩 사정했다.
“그렇게 해주세요. 대장님, 얼마나 힘들겠어요.”
“대장님은 마음이 넓으셔서 그렇게 해주실 거야.”
“여기 우리 모두 내일부터 뇌려타곤을 할게요.”
그런 아이들의 말로 인해 교청인의 눈에선 눈물이 더욱 더 많이 흘러내렸다. 뜻밖에 아이들이 이런 부탁을 하자 표영은 난처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운 아이들이 한마디씩 입을 삐죽거리며 하는 말은 거절하기 쉽지 않았다.
“음, 좋다. 대신 너희들이 뇌려타곤을 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 만약 너희가 뇌려타곤을 흉내 내면 너희들이 좋아하는 거지 누나가 고생하게 될 거야. 알겠니?”
아이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렸다.
“와아∼ 잘됐다.”
아이들 덕에 교청인이 뇌려타곤에서 빠지게 되자 만첨과 노각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오호… 이런이런. 의외로 방주님은 아이들에게 약하시구나. 무슨 일에도 끄떡없으실 것 같더니 이런 약점이 있을 줄이야. 그럼 나도 한번 해볼까?’
잔머리를 사정없이 굴린 둘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흑… 어무이∼”
“흑흑…….”
갑작스런 울음에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표영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새끼들 보게나.’
‘아주 꼴값을 떨어라. 떨어.’
아이들도 눈을 돌려 만첨과 노각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얼굴엔 금세 안됐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때였다.
“오복아∼ 오복아∼”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아이 중 하나가 외쳤다.
“앗! 엄마 목소리다. 엄마한테 말하지 않고 왔는데 찾으러 오셨나 봐. 어떡하지. 애들아, 난 그만 가봐야겠어. 거지님들도 안녕히 주무세요.”
오복은 빠르게 말한 후 소리 난 쪽을 향해 다시 외쳤다.
“엄마, 저 여기 있어요!”
오복이 인사를 마치고 엄마를 부르며 달려가 버리자 다른 아이들도 집 생각이 났는지 인사를 하고는 일제히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황당함에 빠진 것은 만첨과 노각이었다.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이들이 떠나자마자 표영이 만첨과 노각을 째려봤다.
“음, 그러니까… 너희들이 지금 수련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거렷다?”
“아, 아닙니다. 저희들은 그, 그저…….”
두 손을 마구 흔드는 두 사람을 보며 표영이 말했다.
“음,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마. 난 잠깐 산책을 하고 올 테니 다들 쉬고 있어라.”
두들겨 팰 줄 알았던 방주가 갑자기 산책을 간다고 하자 만첨과 노각은 마음이 놓였다.
‘웬일이지? 방주님의 마음이 저리도 넓어지시다니……“
표영은 도저히 산책하러 가는 사람답지 않게 흐닥닥 신법을 전개해 사라져 버렸다. 이제 됐다 싶어 만첨과 노각이 휴∼ 하고 한숨을 내쉬는데 눈앞에 시커먼 그림자 네 개가 드리워졌다.
‘이건 뭐지?’
그림자는 바로 능파와 능혼, 그리고 손패와 제갈호였다.
“왜, 왜들 그러세요?”
“방주님께서 형제들끼리는 싸우지 말라고 하셨는… 으아악……!”
그때부터 집단 구타가 시작됐다.
퍼퍼퍼퍽- 퍼퍼퍼퍽-
“감히 아이들을 이용해서 잔머리를 굴려! 이용할 게 따로 있지. 그 어린것들을… 이 자식아, 죽어라, 죽어∼”
“너희 둘이 빠지겠다 이거렷다! 그런 꼴은 못 본다, 못 봐. 이 새끼들아!”
“네놈들 때문에 단체로 야밤에 뇌려타곤할 뻔했다는 걸 알기나 하냐. 이 썩을 놈들아!”
“으아악∼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그래, 오냐. 봐주마. 네놈의 아구통을 봐줄 테니 염려하지 말아라.”
“으아악! 내 턱이야∼.”
표영은 멀리감치 떨어져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흥겹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역시 눈치는 빠른 놈들이라니까. 흐흐흐…….”
뇌려타곤 이레째.
“드디어 오늘로 뇌려타곤이 끝을 맺게 되었다.”
표영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서 이 시간은 뇌려타곤을 통해 얼마만큼 호신강기가 쌓였는지 최종 점검하는 시간을 갖겠다. 그동안 과연 게으름을 피웠는지, 아니면 열심을 다했는지 이 시간에 판가름 날 것이다.”
이 말에는 모두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언제 호신강기를 익혔단 말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에 표영이 일갈했다.
“모두 일렬로 선 후 팔뚝을 걷어라.”
뭔지는 모르지만 모두는 잽싸게 일렬 횡대로 늘어서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팔뚝을 드러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이더냐? 진정한 개방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더냐. 개방을 타도하고자 하는 우리로선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가다듬어야 할 말이 있으니 그건 바로 ‘나는 지금 거지로서 어디까지 이르렀나’ 하는 것이다. 늘 가슴속에 이 말을 새기면서 우리의 부족한 점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자. 그런 의미에서 호신강기가 얼마만큼 쌓였는지 내 직접 살피겠노라.”
장엄하게 뿜어내는 말속에서 호신강기의 내막에 대해 모두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호신강기가 얼마나 쌓였는지.
일제히 모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솟구쳤다.
표영은 수하들이 식은땀을 흘리든 말든 제일 가장자리에 있는 능파부터 점검에 들어갔다. 손을 뻗어 팔뚝을 쭉 잡아 뜯었다.
와드득-
마치 석고를 떼어낸 것으로 착각할 만큼의 때가 한 움큼 떨어졌다. 표영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능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