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7장 (88/199)

 # 87

87.

이윽고 배는 옅은 안개를 뚫고 불귀도에 이르렀다.

그들이 섬에 도착했을 때 미리부터 나와 반긴 사람은 능파였다.

“어허허. 여기야, 여기. 형제들, 반가워.”

모래사장 위에서 능파는 펄쩍펄쩍 뛰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제갈호 등은 섬에 닿자마자 방주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웬 늙은이가 반갑게 맞이하는 것을 보고 일제히 손패 쪽을 바라보았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저 사람은 또 뭐요?’라는 질문이었다.

손패가 자랑스럽다는 듯 답했다.

“우리 진개방의 장로님 중 한 분이시라네.”

그 말에 일행 중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네에?!”

“캑!”

“불귀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했지 않았습니까?”

“그럼 또 다른 사람도 있다는 겁니까?”

일제히 놀라면서 쏟아내는 질문에 손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님 한 분이 더 계시다네. 사실은 말이야, 방주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는 이 두 분 장로님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고 하시더군. 하하하.”

‘이건 또 뭐야, 대체.’

모두가 땀을 흘리며 배에서 내리자 능파가 한 명씩 끌어안았다.

“오! 형제들. 오느라 고생 많았지.”

제갈호 등이 나름대로 몸을 피해보려고 했지만 물러서기도 전에 잡혀 능파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주 곤혹스러운 것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놀라움이었다. 끌어안는 과정에서 적으나마 능파의 무공 수준이 어떤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실력이 방주 아래가 아님은 확실했다.

‘어디서 불쑥 솟아난 거야, 대체. 아니면 불귀도의 전설 따윈 다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평평한 바위 위에 표영이 앉아 있고 그 앞으로는 능파와 능혼, 그리고 나머지 수하들이 바닥에 자리했다. 서로 대충 인사를 마친 상태에서 표영이 일장연설을 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음, 먼저 이렇게 진개방에 훌륭한 형제들이 모인 것에 본 방주는… 험험험…….”

표영은 스스로 방주라고 칭하자 어색함으로 목이 근질거려 연신 헛기침을 토한 후 말을 이었다.

“…흡족하기 이를 데 없구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일곱 명은 진개방의 창업 공신들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갈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제갈호와 교청인은 얼굴이 핼쑥해졌다. 끝까지,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가다니… 이게 무슨 허파에 바람 뚫릴 소리란 말인가.

‘불안해… 불안해……. 늙어 죽을 때까지 거지로 살라는 소리냐? 야이, 씨팔.’

‘비록 독약을 복용하긴 했지만 난 시집도 가야하고 언젠가는 아이도 낳고 싶은데… 이게 대체 뭐람. 아이고, 내 인생아… 교청인, 너는 정말 잘못 걸려도 너무 잘못 걸렸구나.’

표영의 말은 계속됐다.

“내 너희들은 절대 버리지 않겠다. 어느 누가 있어 너희를 훔쳐 가면 땅 끝까지 이르러 찾아낼 것이고, 결코 내 손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탔기에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것이다. 음하하하!”

계속되는 망언에 제갈호와 교청인은 숨이 막혔다.

‘아, 씨발… 끝까지 간다는 말 진짜 여러 번 하네.’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냐? 정말… 제발 날 좀 버려 줘∼’

하지만 둘은 잠깐 옆을 바라보다가 황당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능파와 능혼, 그리고 손패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감동에 젖은 표정으로 방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 뭐냐. 이건 또!’

대체 감동받을 말이 무엇이라고 저리도 눈물을 흘리고 있단 말인가. 제갈호와 교청인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인간들 사이로 들어왔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은 다시 왼쪽으로 눈을 돌려 만첨과 노각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표정은 그나마 좀 나은 편이긴 했지만 그다지 마음에 든다고는 할 수 없었다. 지금 방주의 말은 전혀 진지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진지하게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아마 그들마저 눈물을 흘렸다면 정말이지 돌아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표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제 이 시간 우리 진개방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의 최종 목표는 강호에서 가장 위대한 방파가 되는 것이다. 현재 강호를 활보하고 있는 개방은 이미 썩을 대로 썩었기에 지금의 개방을 몰아내고 우리가 진정한 개방임을 만천하에 드러낼 것이다. 어떠냐, 이 원대한 계획이? 음하하하……!”

능파와 능혼, 그리고 손패가 일제히 대답했다.

“훌륭한 계책이십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이 한 몸 다 바쳐 개방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습니다.”

제갈호 등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가 어색함이 들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조, 좋습니다…….”

표영은 만족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좋아, 하지만 개방을 접수하기 전에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아 보완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는 우리부터가 먼저 훌륭한 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우리의 세력을 키워야 한다는 점이다. 첫째를 완수하기 위해 우리는 이곳에서 일정 기간 진개방의 무공을 습득하여 훌륭한 거지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그 후에는 세력 확보를 위해 사파의 무리를 하나둘 거두어들여 모두 거지로 만들도록 하겠다.”

만첨과 노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이 기뻐한 것은 진개방의 무공을 습득할 시간을 주겠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때 제갈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그래. 자갈! 무슨 말인지 해봐라.”

‘아, 짜증나게 또 자갈이라고 부르네. 놓은 이름 놔두고 왜 저러는 거야. 썅.’

불귀도로 온 뒤 제갈호는 어느덧 자갈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건 능파가 제갈호의 이름을 듣다가 잘못 들어서 ‘뭐? 자갈이라고? 그런 이름도 다 있어? 거, 희한하네’라고 한 말에서 시작되었다. 그때 옆에 있던 표영이 그 말을 듣고는 박장대소를 하며 앞으로는 별호를 자갈이라 부르자고 했는데 그 말이 지금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갈이 되어버린 제갈호는 기분이 상했지만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우리가 개방과 맞서기 위해서 제일 중요시해야 할 것은 강호의 사정과 변화를 빨리 파악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첫 번째로 정보에 밝은 살수 집단을 장악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살수 집단이 진개방의 하급 기관이 된다면 정보 파악이 용이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일 것이다. 모두가 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 표영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야. 물론 너의 말도 맞긴 하지만 그놈들이 먼저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함락할 곳 중 첫 번째는 사천당가다. 여기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겠다.”

이미 오래전부터 당가에 찾아갈 것을 생각해 온 표영이 아니던가.

당문이라는 말에 만첨과 노각은 침을 꼴까닥 삼켰고 제갈호와 교청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당문은 그리 만만히 볼 곳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능파와 능혼, 그리고 손패는 투지를 불태웠다.

표영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이곳 불귀도는 진개방의 수하들을 훈련시키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곳에 책임자는 누가 좋을까. 음… 능파가 맡아라. 거기에 만첨과 노각이 보좌하도록 하면 되겠구나.”

그 말에 능파가 벌떡 일어섰다.

“교, 아니, 방주님! 그건 안 될 말씀이십니다! 전 절대 방주님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가까이 다가와 표영의 바짓자락을 잡고 떨어지지 않는 품이 간절하기 그지없었다. 능혼도 거들었다.

“방주님, 형님과 저희가 함께 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너무도 간절하게 말하자 표영이 마음을 돌렸다.

“음… 그렇다면 이곳은 제갈호와 교청인이 맡아서…….”

두 사람이 펄쩍 뛰었다. 이 말인즉, 평생을 이곳에서 거지들 훈련이나 시키고 있으란 말 아닌가!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방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교청인은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악∼”

모두가 화들짝 놀라 교청인을 바라봤다.

“안 돼요! 전 절대 여기 남을 수 없어요! 차라리 절 죽이세요!”

그들로서는 비록 같은 거지라 할지라도 자유롭게 강호를 활보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젠 부스스한 머리와 더러운 옷, 때 칠을 한 얼굴 탓에 아는 사람이 봐도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기도 한 것이 자신이 봐도 자신의 얼굴을 잘 모를 정도인데 다른 사람이 보면 오죽하겠는가.

“허허. 이것들 보게나.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만첨과 노각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표영이 말하기 전에 만첨과 노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하. 방주님, 염려 마십시오. 저희를 믿고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요.”

사실 만첨과 노각은 섬을 떠나기 싫었다. 사천당가를 접수한다느니 청부 조직을 접수한다느니 하는 말이 나올 때부터 실제로 전전긍긍하던 차였다. 여차했다간 싸움판에서 목이 날아갈 것이 자명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 있으면서 누군가 잡혀온다면 그놈들을 데리고 노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음, 좋아, 그렇다면 네놈들이 이곳을 맡도록 하고, 손패는 표국을 통해 새로운 부하들을 보내면 이곳으로 옮기는 역할을 맡도록 해라. 그리고 정기적으로 섬에 들러 훈련이 잘 이루어지는지를 점검토록 하거라.”

“속하 분부대로 따르겠나이다.”

절도 있게 손패가 대답했다.

“음, 좋다. 이제 대충 정리가 된 듯하군.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한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우리 진개방의 무공을 익히도록 하겠다. 우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서 어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느냐. 앞으로 하는 걸 봐서 기간은 더 늘려야 할지 줄여야 할지 결정하겠다.”

아직 무슨 무공인 줄 모르는 능파와 능혼 등은 궁금함에 사로잡혔고 제갈호와 교청인은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공 어쩌고 하는 걸 보니 필시 말도 안 되는 것을 시킬 것 같았던 것이다. 그 불안은 왠지 맞는 것 같았다.

표영이 다시 입을 연 것이다.

“앞으로 이 섬의 이름은 불귀도가 아니라 걸인도로 명명하겠다. 노각! 너는 섬 입구에 커다란 패를 하나 만들어 걸인도라고 적어 세워두도록 해라.”

“네,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 후 걸인도라는 팻말이 커다랗게 놓여지게 되었고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걸인도.

최선을 다해 거지같이 살자.

제10장 거지무공을 전수하다

불귀도.

아니, 이제는 ‘걸인도’가 돼버린 진개방의 본부를 떠난 표영과 그 일행은 어촌 마을 신합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린 표영은 수하들을 자리에 앉혀놓고 앞으로의 계획과 거지 무공의 단계를 설명코자 했다.

그중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제갈호와 교청인은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짐작컨대 필시 무공을 전수한다는 것은 해괴한 거지 짓거리를 말하는 거겠지. 오호∼ 제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불안해… 방주가 얼굴에 짓고 있는 저 옅은 미소는 뭐란 말이냐. 대체.’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마교의 후예들과 만첨과 노각은 어떤 희망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표영의 입이 열렸다.

“음∼ 그러니까…….”

표영 스스로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서두를 길게 끌다가 말을 이었다.

“이제 너희는 이곳에서 약 5단계의 수련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사실 원래대로 하자면 각 단계별로 거의 1년씩은 연마해야 하는 것이지만 별로 시간도 없고, 또한 너희의 자질을 보아하니 모두 다 재능이 범상치 않기에 속성으로 끝내도록 하겠다.”

그 말을 듣고 만첨과 노각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일제히 손을 들었다.

“뭐냐?”

“저희들은 제대로 배우고 싶습니다. 부디 시간이 걸리더라도 온전한 무공을 습득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둘의 각오는 실로 대단해 보였다.

현재 이곳에 있는 무리 중 아무래도 제일 무공이 뒤처진 터였고 뭔가 제대로 무공을 연마할 기회가 없었던 그들이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무공을 배울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이런 과감하고 무모한 제안을 한 것이었다.

표영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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