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4장 (85/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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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제6장 천기를 바라보는 사람들

천운산.

이 산을 가리켜 보통 사람들은 그다지 훌륭한 산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풍광으로 치자면 아미산에 덧없이 미치지 못함이고, 산세의 험함으로 따지자면 망창산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림인에게 묻노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무림인들은 천운산을 최고의 산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데 촌각이라도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천운산에 중원제일문파인 천선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운산 천선부에 그가 있기 때문이다.

천하제일고수 건곤진인 오비원.

이제 80세가 넘어 90세를 바라보는 노구임에도 그가 천하무적이라는 것에 대해 강호는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가 있는 한은 사파제일이라는 혈곡도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지금 바로 그 오비원이 천운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약봉의 달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백의는 중원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품으로 인해 그 옷은 어떤 고급스러운 비단보다도 더 값어치 있고 훌륭해 보였다. 흔히 말하길 ‘옷이 날개다’라고 하나 그 말은 범인들에게나 사용될 법한 말일 것이다.

진정한 인격을 갖추고 마음을 수련한 자에겐 그 인격과 수양이 도리어 보잘 것 없는 옷마저도 빛나게 하는 것이다.

또 그와는 반대로 악독한 성품과 독랄한 마음을 지닌 자에게 있어서 그가 입는 옷은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옷이 되고 말 것이다. 즉, 모든 만물의 주인은 사람인 까닭에 사람에 의해 모든 만물이 가치를 얻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물질에 현혹되어 외부를 치장하기보다는 내면을 갈고닦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건곤진인 오비원의 눈은 밤하늘의 별들을 살피고 있었다. 눈가로 흐르는 깊은 주름엔 삶의 연한과 지혜가 담뿍 담겨져 있었는데 지금 그 주름은 잔뜩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부활하던 마의 기운이 완전히 소멸되었구나. 하하하하.”

오비원의 눈에서 그동안 마음을 짓누르던 근심과 걱정들이 여지없이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로 기쁨이 스며들었다.

“2년 전쯤 마의 기운이 7할 정도 붕괴되었을 때 설마 이 정도까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건만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구나.”

그의 눈이 이른 곳에는 별 하나가 찬란하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저 별이 있는 한 나는 이제 아무런 걱정 없이 떠날 수 있겠구나.”

그가 걱정하고 있던 것은 바로 천마지체의 등장에 대한 천기였다. 그것은 오비원의 가슴을 저미게 할 정도로 극악한 인물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교의 부활.

더욱 마음을 억누르는 것은 어디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즉, 마교의 부활은 어떻게든 막아야만 하는 중차대한 문제였으나 그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암암리에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천마지체의 별은 더욱 빛을 발하고 그 아래로 마의 존재들이 나타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2년 전 쯤에 갑작스레 천마지체의 별이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별… 그 별이 바로 오비원의 마음을 안심시킨 것이었다.

“강호에 새 바람을 몰고 오는 영웅은 과연 누구일까. 내가 사는 날 동안 그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하하하하, 천마지체가 사라지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마저 힘을 잃었으니 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200년 전 마교가 붕괴되었지만 그 빈자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새롭게 등장한 마의 단체인 혈곡이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메우고 나타난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지 않던가. 빛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빛이 있는 한 마땅히 그림자가 존재하게 되는 법이다.

강호 또한 그 이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진정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빛, 혹은 빛을 초월하는 빛이 나오지 않는 한 이 법칙은 계속 유지될 터였다.

하지만 과연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빛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영웅호걸들은 그러한 빛이 되길 원했지만 아직까지는 그 어느 누구도 그런 빛을 발산하진 못했고 또 이룬 것처럼 보였으나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혈곡의 비밀 회의 장소인 흑저(黑低).

등불이나 작은 반딧불조차 없는 지하 밀실이었지만 이곳에 모인 육인(六人)은 전혀 사물을 구분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그들 눈에서는 각기 붉은 혈광이 쏟아져 나와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릴 것같이 밝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혈곡의 곡주 진령악제 단천우의 입에서 짙은 침음성이 새어나왔다.

“과연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단천우가 이렇듯 애매모호하게 말을 꺼낸 것은 방금 전 천기를 살피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애매한 심정은 혈곡의 다섯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천선부주 건곤진인 오비원이 천기를 살핀 것처럼 천기의 변화를 보고 온 것이었다.

그들은 천마지체의 기운이 사멸함에 이어 천마지체를 따르는 주변의 기운들마저 다른 행보를 보임을 보았다.

단천우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라고 말한 데는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이 깃들어져 있었다. 그중 기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부문은 천마지체의 존재가 워낙 강력한 마의 기운을 품어내었던 점이다.

너무 거센 마의 기운이다 보니 자칫하다간 혈곡의 존망까지 위태로워지고 어쩌면 그 수하로 전락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득했던 터였다.

하지만 2년 전쯤 느닷없이 천마지체의 별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천마지체를 끼고 돌던 별들마저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되었으니 일단 마의 최선봉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면 혈곡의 수뇌들이 오늘처럼 심각한 얼굴로 회의를 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슬퍼해야 할지…’라는 중얼거림에 있었다.

천마지체의 혈광이 사라진 후 뜬금없이 천기가 기이하게 뒤바뀐 것이다. 전혀 뜻밖의 별이 떠올라 찬연히 빛을 발하더니 천마지체를 감싸고돌던 기운들마저 흡수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더욱 기세를 올려 중원 전체를 위시할 위치에 서 버린 것이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으로 이제까지 천선부만을 최대의 경계 대상으로 생각했던 혈곡에게는 치명적인 운명의 흐름이 아닐 수 없었다.

일순 진령악제 단천우의 눈에서 혈광이 두세 배로 증폭되어 품어져 나왔다.

“천선부의 기운이 서서히 힘을 잃고 있는 마당에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냐.”

쾅!

금강석으로 이루어진 탁자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지하 밀실을 울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삼 장로 필살마도 우영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우영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단천우가 들어보겠다는 듯 혈광을 뿜어내며 우영을 바라보았다. 우영은 잔혹할 정도로 노려보는 곡주의 눈길에 바지춤에 찔끔하고 실수를 한 다음에 말했다.

“험험… 현재 강호에는 이렇다 할 기재가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천하의 기재 중 칠옥삼봉을 꼽을 수 있겠으나 그들은 아직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비록 그들 중 가장 뛰어난 기재라고 불리는 무당파의 표숙이라는 아이가 있으나 초절정고수의 반열에 올려놓기엔 사실 무리가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천기의 흐름이 마의 기운을 잠재울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알렸다곤 해도 크게 마음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말에 몇몇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생각에도 아무리 강호 인물들을 꼽아 봐도 마땅한 인물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떠오르지도 않았던 것이다.

천마지체의 죽음이나 그를 따를 인물들이 나타났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정도 일이라면 워낙에 큰일이기에 강호에 알려지지 않을 리 없을 것이나 실제 요 몇 년간 강호는 태평하기 그지없지 않았던가.

하지만 곧바로 단천우의 입에서 포악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그럼 내가 천기를 잘못 읽었단 말이더냐!”

당장에라도 찢어 죽일 듯한 말에 삼 장로 우영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제 생각에 그렇지도 모른, 으아악……!”

우영은 변명의 말을 마무리 짓지도 못하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어느새 진령악제 단천우의 주먹이 면상을 날려 버린 것이다.

퍼퍼퍽- 퍼퍽-

“이 자식이 많이 컸구나! 삼 장로, 많이 컸어!”

퍼퍼퍽- 퍼퍽-

“으으으윽… 으윽…….”

단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영 장로의 몸을 밟아갔다.

“죽어라, 이 새끼! 죽어!”

그렇게 한참을 두들겨 패고 나서야 단천우는 자리에 앉았다. 이미 삼 장로 우영은 한쪽 귀퉁이에 찌그러져 혼절해 버린 상태였다. 어찌나 힘을 썼던지 씩씩대던 단천우가 숨을 고른 후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강호에는 아직까지 천마지체를 꺾을 만큼 대단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존재는 처음부터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우리의 눈을 피할 수 있겠으며 강호인들의 눈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

곡주 단천우의 태연자약하게 하는 말에 나머지 네 명의 장로들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쾡∼

지금 하는 말은 삼 장로 우영이 했던 말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음… 삼 장로가 얻어터진 이유는 여기에 있었군. 곡주께서 막 하려고 했던 말을 먼저 말하는 바람에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겠지.’

‘역시 앞으로는 말을 아껴야겠어. 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구나.’

모든 장로들이 몰래 한숨을 내쉴 때 단천우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의 계획은 속도를 빨리해 실행에 옮기도록 한다. 봉 장로! 천면마공은 완성이 되었느냐?”

일장로 개천마군 봉만추가 얼른 답했다.

“당장에라도 투입할 만한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곡주 단천우의 고개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끄덕여졌다.

“좋다. 당장 내일부터 사파의 무리들을 규합하기 위해 천면마공을 활용하도록 하라.”

“존명.”

천면마공이란 역용술의 극치를 이루는 마공이었다. 대체로 얼굴을 변용함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 제일 하급은 인피면구를 쓰는 것이고 최고의 수법이라면 공력을 이용해 상대의 모습으로 완전히 변모하는 것이다.

바로 천면마공은 공력을 이용해 모습을 바꾸는 것으로 그 효용이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굳이 같은 사파를 규합하는 데 이런 방법을 강구하게 된 까닭에는 천선부라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혈곡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천선부의 묵인 때문이랄 수 있었다. 천선부로서도 정면 대결을 하게 될 때의 서로가 받을 피해를 생각해 단지 견제만을 하고 있었는데 사파의 규합이나 정파에 도발을 할 시엔 전면 공격을 받을 것이라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혈곡에서는 암암리에 사파를 통합하기 위해 간세를 심어놓고 그로 인해 그 문파의 우두머리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올라서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게 장악하려 함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면마공이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었다.

“이제 비로소 천면마공의 약점을 극복한 상태이니 신속히 시행해야 할 것이다. 사 장로 고호막!”

“네, 말씀하십시오.”

“개방을 통한 정파 전복은 어찌 되었느냐?”

“얼마 전 개방 방주 노위군이 요구한 내공심법을 전해주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가로 화산파를 꼼짝 못하게 할 것이라는 확답을 받아둔 상태입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후후후, 그래. 좋다, 노위군이라는 멍청이가 잘해낼지 모르겠군.”

단천우는 노위군을 같잖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부를 죽여 달라는 조건으로 수족처럼 부리게 되었지만 꼴사납게 원하는 게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내공심법이라니… 하지만 이번에 만약 화산파의 일을 허술하게 처리한다면 그를 죽여 없앨 참이었다.

“이제 5년이 지나기 전에 천선부주 오비원의 생은 그 운을 다할 것이다. 그전에 모든 준비를 끝내놓아야 한다. 알겠느냐?”

그 말에 일제히 장로들이 입을 모아 답했다.

“곡주님의 높으신 뜻 속하들은 감복할 따름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말 한마디 한마디가 딱 들어맞았다. 실제 다섯 명의 장로들은 곡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삼 일간 합숙까지 해가며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모른다.

이젠 대충 상황만 봐도 언제 이 말을 해야 할지 알 정도였다.

곡주 단천우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흐, 강호여. 이제 혈곡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지켜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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