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83.
제5장 개방에 흡수되는 마교
능파가 동굴 벽에 머리를 들이받고 혼절한 지 삼 일 후.
표영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 상태는 무공을 펼치기에는 아직 온전치 못했지만 운신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껏 그 앞에서 석상이라도 된 듯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던 능파와 능혼, 그리고 손패는 긴장에 휩싸여 허리를 꼿꼿이 펴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드디어 그들의 지존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선 것이다.
표영은 정작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어떻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일어나기 전까지 꽤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여러 가지 말들을 연습했건만 막상 세 사람을 보고 있자니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세 명을 바라보자니 우습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표영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계속 침묵만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능파와 능혼 등도 과연 교주래서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지 자못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큰 죄를 지었으니 당장 죽으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그들이 아니던가.
“험험…….”
표영이 헛기침을 연달아 내지른 후 입을 열었다.
“세 분 모두 왜 그렇게 불편하게 앉아 계십니까? 편하게들 앉으세요.”
목소리나 말투 그 어느 것 하나 마교 교주다운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누가 있어 이런 말을 듣고 마교 교주라고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정작 능파와 능혼, 그리고 손패는 식은땀을 주르르 흘렸다.
‘교주께서는 가장 악랄한 피를 타고났다는 천마지체시다.’
그렇다. 천마지체의 전설은 그냥 엉겁결에 생겨난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표영이 부드럽게, 그리고 존댓말을 사용한 것에 대해 곤혹스러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역대 교주님들도 가장 잔인하게 일을 처리할 때 오히려 부드럽게 이야기하곤 했지 않던가.’
‘오늘 크게 곤욕을 치르겠구나.’
‘우리를 죽이려고 하시는 것일까?’
세 사람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갑자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머리를 땅바닥에 쿵쿵 찧으며 용서를 빌었다.
쿵쿵쿵! 쿵쿵쿵!
“미천한 속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치 않겠나이다. 속하들을 거두어 주소서.”
“눈이 있어도 지존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죽여주소서.”
표영이 다시 말했다.
“자자, 일어들 나세요.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법이니 너무 자책하지들 마십시오. 연세도 많이 드신 분들이 그런 모습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여전히 존댓말을 하는 탓에 세 사람은 더욱 힘을 다해 머리를 찧었다. 그들로서는 교주님이 화가 단단히 맺혀 연신 비꼬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쿵쿵쿵……!
“속하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흑흑흑…….”
“존대는 감히 감당키 어렵습니다. 부디… 용서를… 흑흑흑…….”
“어찌 사람의 연수로 교주님과 비할 수 있겠나이까… 그저 죽여주소서. 흑흑흑…….”
표영은 연신 눈물을 뿌리고 있는 그들이 우습게 느껴졌다. 철썩 같이 교주로 믿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사람들 보게나? 진짜 울고 있잖아.’
어지간하면 ‘이젠 됐다, 눈물을 거둬라’라고 할만 했지만 표영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허허, 그래도 저보다 200년이나 더 지내신 분들이시고 여기 손씨 양반도 주름이 저보다 많은데…….”
이번에는 더 크게 땅이 울렸다.
쿵쿵쿵… 쿵쿵쿵… 쿵쿵쿵……!
“잘못했습니다. 지존이시여!”
어찌나 세게 들이받는지 모두들 머리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곧 터질 것만 같았다.
그중 능파는 삼 일 전 벽을 들이받고 터진 자리가 이제 곧 아물려는 상황에서 이번에는 앞머리를 들이받자 머리가 울려 통증이 말이 아니었다.
표영은 이젠 장난을 그만 해야겠다 생각했다.
‘계속 장난쳤다가는 이들이 머리가 사라질 때까지 땅에 찧어댈 것이 분명하다. 암, 그렇게 하고도 남을 놈들이지.’
표영이 다시 헛기침을 한 후 이번에는 근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험험, 좋다. 앞으로는 말을 편하게 하마.”
고개를 든 세 사람의 얼굴엔 말로 할 수 없는 희열이 가득했다. 이제야 뭔가 제대로 방향을 잡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의외로 쉽게 용서를 하려고 하시지 않는가.
“마교천하가 눈앞에 있나이다.”
“가, 감사합니다.”
“목숨을 다해 주군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불 속에라도 뛰어들라 하시면 속하 오로지 복종할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감격하는 모습을 보며 표영은 기가 막혔다.
훗, 하고 웃음이 나오려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어디 한번 이들의 충성이 어떤지 시험해 볼까?’
“너희의 지난날의 수고는 참으로 대단했다. 비록 첫 만남에서 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너희가 하극상을 저질렀지만 모두 용서하도록 하겠다. 너희는 앞으로 본좌의 명령에 무엇이든지 따를 각오가 되어 있느냐?”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지존이시여.”
일제히 답하는 말에 표영이 손을 들어 능파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짜식∼.”
표영이 때린 곳은 벽에 머리를 박아 터진 쪽이었다. 살짝만 만져도 통증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인 곳이었지만 능파는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어라? 진짜 가만히 있네.’
“하하, 기특하구나.”
표영은 신기한 생각에 이번에는 세 명의 뺨을 연달아 갈겼다.
찰싹 찰싹 찰싹∼.
모두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으로 교주님의 마음이 풀릴 수만 있다면 백 대가 아니라 천 대라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맞으면서도 마음은 편해졌다.
때리는 표영은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손을 날렸다.
짜짜짝-
능혼과 능파가 진심을 가득 담은 채 말했다.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손패는 한술 더 떴다.
“한 대 더 쳐 주십시오.”
‘허허, 이거 교주도 할 만하구나. 재밌는데.’
재미가 들린 표영은 신바람을 냈다.
“하하하하……!”
이번에는 주먹이 날았다.
퍼퍼퍼퍽… 퍼퍼퍼퍽……!
뺨을 때릴 때와는 달리 장난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도 마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과분한 대우가 아닐 수 없었다. 눈가에 은은한 감동마저 보이는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맞으면서 쾌락을 느끼는 변태들이라고 생각했으리라.
“좋아, 좋아, 아주 맘에 든다.”
이젠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주먹과 발길질을 가리지 않고 밟아버렸다.
퍼퍼퍽… 퍼퍽… 퍼퍼퍽……!
“좋아… 좋아…….”
동굴 안의 풍경은 가관이 아니었다. 표영이 훨훨 날며 무자비하게 주먹과 발을 날릴 때마다 세 사람은 쓰러졌다가 순식간에 튕겨져 일어나 무릎을 꿇고 또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무릎을 꿇는 행동을 반복했다. 약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표영의 동작이 멈췄다.
“좋다. 너희들의 과오는 이 시간 이후로 다시 묻지 않겠다.”
능파는 터진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능혼은 코피를 주르르 흘렸고, 손패는 눈이 퉁퉁 부어올랐지만 이것으로 모든 화풀이가 끝났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공격한 것에 비하자면 이 정도는 애들 장난이었다. 심할 경우 내장을 꺼내 줄넘기를 하고 다시 집어넣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그들이 아니던가.
그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속으로 기쁨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 표영은 이들이 무슨 말이든지 다 듣는 것을 알고 새로운 생각을 떠올렸다.
‘이들을 데리고 다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아예 이 기회에 마교를 해체시켜 버려야겠다.’
“내 너희들에게 한 가지 사명을 부여하겠다.”
그 말에 씩씩한 대답이 돌아왔다.
“지옥의 불길이라도 뛰어들겠나이다.”
“하명만 하십시오.”
“이미 목숨은 지존께 의탁한 지 오랩니다.”
표영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말이야… 앞으로 너희들은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도록 하여라. 그리고 각기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표영이야 워낙에 말을 잘 들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밑져야 본전이다, 라고 말해 본 것이었다. 하지만 마교인들의 반응은 경악에 가까웠다.
“네에?!”
“헉!!”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이들은 이 말을 달리 해석했다.
‘교주님께서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으셨구나. 그럼 그렇지. 이렇게 간단히 끝날 리가 없지 않은가 천마지체가 괜히 천마지체겠는가.’
그들은 다시 머리를 찧으며 빌기 시작했다.
쿵쿵쿵!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어제는 정말 교주님을 몰라 뵈었던 것뿐입니다.”
“죽여주십시오.”
“거두어 주소서.”
표영이 짐짓 분노한 듯이 쏘아붙였다.
“어쭈,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능혼과 능파 등은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시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화가 풀리지 않으신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의미로 우리 마음이 얼마나 마교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보려 하심임이 분명하다. 복종을 하되 그 가운데 따라서는 안 되는 것도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려 하심이 아닐까. 바로 이런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이번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버터야 한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저희들을 죽이실지언정 그 말씀만은 들을 수 없습니다.”
표영이 주먹을 들어 보였다.
“훗, 맞아 죽고 싶은 거냐.”
하지만 모두의 눈빛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절대 그 말씀만은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마교를 떠난 다른 것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표영은 이들이 의외로 비장하게 나오자 농사짓도록 하는 일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허허… 이것들 보게나… 이렇게까지 나오면 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냥 말로 끝내면 교주답지 않겠지?’
“오냐… 그래. 내 말을 듣지 않겠다 이거렷다.”
표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릎 꿇은 세 사람을 밟아버렸다.
“그래, 죽어봐라. 이놈들아! 니들이 그러고도 충성을 부르짖는단 말이냐. 죽어, 이 자식들아! 죽어∼!”
퍼퍼퍽- 퍽퍽-
하지만 세 사람은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참았다.
게다가 그들의 표정은 전혀 불만스럽거나 고통스러워함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발길질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퍼퍼퍼퍽- 퍽퍽퍽-
다시 일다경(1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표영은 밟아가던 발을 멈추었다.
표영은 바닥에 널브러진 세 사람을 바라보며 짐짓 화통한 웃음을 날렸다.
“음하하하하하하……!”
능혼 등은 바닥에서 튕겨 일어나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웃는 교주의 웃음소리에 영문을 알 수 없어 멍한 표정으로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아주 훌륭하다. 내 너희들의 마음이 오직 마교에만 있는지 보려 함이었는데 하나같이 충성스런 마음을 품고 있는 걸 확인하니 기쁘기 그지없구나.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모두가 넙죽 머리를 조아렸다.
“만세, 만세, 만만세! 교주님의 지혜는 하늘과 같고 무용(武勇)은 바다를 덮음과 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이 한 몸 재가 될 때까지 오로지 교주님을 따르나이다.”
“만세, 만세, 만만세! 마교천하 지존영광.”
표영이 웃음기를 거두고 다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내가 왜 이런 거지 차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능혼이 답했다.
“미천한 소견으로는 아직 마교의 힘이 다져지지 않은 까닭에 강호의 적들을 속이시고 일거에 강호를 손에 넣으시려는 높으신 뜻이라 여겨집니다.”
표영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 마교는 아직 적들을 상대하기엔 세력이 미약하다 할 수 있다.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 정파무림은 벌 떼같이 일어나 대적해 올 것이다. 그래서 난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모두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충만했다. 표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건 바로 우리 모두가 거지가 되어 개방을 손에 넣는 일이다. 나는 응벽동에 들었으나 마교의 무공을 연성하진 않았다. 자칫 마공을 익히게 되면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부지불식간에 밖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강호로부터 의심을 사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나 하늘은 나와 마교를 버리지 않으셨다. 난 하늘의 뜻으로 또 다른 기연을 얻었으니 그건 바로 개방의 전대 방주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난 개방의 무공을 전수받았다. 이것이야말로 철저히 마교를 숨기고 강호를 뒤엎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오늘부터 우리 모두는 철저한 거지가 되어 개방을 집어삼키고 개방의 힘을 온전히 흡수하여 천하를 손아귀에 쥐어야 한다.”
능파와 능혼, 그리고 손패는 모두 감동에 젖어들었다. 이렇게 원대한 계획을 지니고 계실 줄이야 꿈에라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영명하신 선택이십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칭송했다.
사실 표영의 계획이라는 것은 별 볼일 없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이란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평범한 말일지라도 그 속에 커다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던가. 위대한 성인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을 매는지 모른다.
그처럼 이들 또한 교주에 대한 불타는 충성심으로 인해 모든 것이 위대해 보이기만 했다. 표영이 모두를 훑어보고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개방을 차지할 때까지는 마교의 흔적을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 오직 철저히 거지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너희는 나를 부를 때 방주님으로 호칭해야 할 것이다. 교주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자는 참수에 처할 것임을 잊지 말아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표영이 능파와 능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 둘은 앞으로 개방의 장로로 행세하도록 하여라.”
“개방의 장로로 최선의 힘을 다하겠나이다.”
표영이 다시 손패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손패, 너는 분타주다. 알겠느냐?”
“감사합니다. 교, 아니, 방주님.”
표영은 급기야 마교의 수하들을 거둬들였다. 잘만 하면 개방을 회복시키는 데 큰 힘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하하, 이제 마교가 개방으로 들어오게 되었구나. 정말 앞날은 알 수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