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1장 (82/199)

 # 81

81.

퍼퍽! 퍼퍼퍽!

죄 없는 손패는 곧바로 인간이길 포기하고 북과 꽹과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호! 지존이시여…….”

퍼퍽. 퍼퍼퍽!

“제발 깨어나십시오. 흑흑…….”

퍼퍽. 퍼퍼퍼퍽.

“죽어라, 죽어… 이놈아… 죽어∼”

손패는 낑낑대며 그저 지렁이처럼 꿈틀댈 뿐이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영세번영하라, 마교여… 흑흑흑…….”

울부짖음 속에 만세 삼창하던 능파는 다시 몸을 날려 손패에게로 향했다.

“넌 왜 만세 안 하는 거냐. 이 새끼가 죽고 싶냐. 엉? 죽고 싶어?”

그리곤 다시 발길질이 계속됐다.

퍼퍼퍽- 퍼벅퍼벅-

“오호, 교주님이시여∼ 흑흑흑…….”

손패는 간신히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 정신을 차리고 있었지만 이젠 한계에 달했다.

아득히 꺼져 가는 정신의 끈을 놓자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며 끝내 혼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입가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래… 십절쌍마답지 않은가. 이런 것이… 바로 이런 것이 마교다운 것이라 할 수 있지. 비록 어떤 숨은 뜻으로 거지 차림을 하신 것인지는 모르나 분명 지존임이 틀림이 없구나.’

손패가 혼절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능혼이 허겁지겁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혹시나 약재로 쓸 약초가 있을까 찾아보고 온 것이었다. 능혼은 동굴 안에 처참하게 고꾸라져 있는 장정을 발견하고 의아한 시선을 보내며 능파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굽니까. 형님.”

“누구긴 누구냐. 나쁜 놈이지. 교주님을 해하려는 놈일 것이다.”

하지만 능혼은 능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언뜻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그가 떠올린 건 마교의 준비된 후예 중 한 명에 대한 것이었다.

‘…교주님을 이곳으로 모셔오는 역할을 맡은 손추의 후손일지도 모르겠구나.’

원래 마교의 재건을 위해 준비된 인원은 총 네 명이었다.

그중 십절쌍마인 능혼과 능파는 천극간시공해체대법으로 불귀도에 남게 되었고 마교의 문지기였던 충성스런 손추는 불귀도에 대한 저주의 소문을 내도록 했다. 그리고 대를 이어 불귀도에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머지 한 명 오뇌자 신기천은 응벽동에 지존께서 건곤패를 얻고 어느 정도의 무공과 영약을 습득할 수 있도록 안배하는 일을 맡았다. 지금 이 사람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보아 필시 손추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능혼은 아직까지 형님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고 또한 중년인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터라 생각을 마음에만 묻어두고 교주(?)의 상세를 살폈다.

“교주님은 좀 어떻습니까?”

그 말에 능파가 울먹이는 표정을 지었다.

“흑흑… 교주님은…….”

능혼은 형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염려 마세요. 모든 것이 잘될 겁니다.”

과거에는 형이 자신을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능혼의 입가에 씁쓸함이 일었다. 그는 손으로 토닥거린 후 말했다.

“형님, 힘내십시오. 다행히 이곳에 상품의 선련초가 많이 있더군요.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건 필시 마교의 운이 다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선련초란 남방 지역에서 나는 약초로 매우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 내상을 치료하는 데 있어 탁월한 효능을 지녀 무림 각파에서 치료하는 환약을 제조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약초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선련초가 마치 잡초가 무성하게 모여 있듯 섬에 널려 있으니 능혼의 마음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능혼은 선련초를 찧어 즙을 짜 표영의 입 안에 흘려 넣었다.

‘만일 지존께서 천년하수오와 묵각혈망의 내단을 취하셨다면 선련초의 기운까지 더해져 필시 빠른 회복을 보이실 것이다.’

능혼은 일단 손추의 후손을 살피기 전에 형님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생각했다. 대법이 풀리면서 어디까지 기억을 하고 계신지, 마교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 두어야만 했던 것이다.

“형님, 잠깐 바람 좀 쐬러 가시죠.”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곧 울듯 지존(?)을 바라보고 있던 능파가 못 이기는 척 일어섰다. 능파는 뒤따라가다 누워 있는 손패를 힐끔 쳤다보더니 다가가 발로 한 방 갈겼다.

퍽.

“내가 깨어나라고 할 때까지 일어나면 안 돼.”

손패는 이미 혼절한 상태라 아픔을 느낄 수 없을 테지만 어쨌든 재수 더러운 것만은 사실이랄 수 있었다.

동굴을 나선 둘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러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제의 폭풍우가 마치 거짓이었던 것처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먼 바다까지 시야가 닿았다.

잠시 둘은 말없이 주변의 경관을 둘러보았다. 능혼은 능혼 대로 능파는 또 능파 나름대로 앞날이 캄캄하기만 했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능혼이었다.

“형님, 우리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뻔한 질문이었지만 능파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고심했다. 뭔가 머리에 떠오를 듯하다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곤 해 도대체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왜 이 섬에 있는 것이냐? 정말 이상한걸.”

능혼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우리는 대법으로 200년 후에 나타나실 지존을 영접하기 위해 불귀도에 남게 되었던 겁니다.”

능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00년이나? 정말이냐?”

의외라는 듯한 능파의 반응에 능혼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도대체 형님은 어디까지 기억하고 계신 것일까?’

“형님은 누구입니까?”

이번 질문에는 능파가 곧바로 답했다.

“나는 마교의 십절쌍마… 능파지. 넌 나의 동생 능혼이 아니더냐. 이 녀석 바보 같으니라고…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게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교의 십절쌍마지요. 하지만 지금 천하에 마교인은 모두 합해 4명뿐입니다. 그리고 그중 우리를 인도해 줄 지존은 몸져누워 계시구요.”

“흑흑… 그래, 건곤패의 주인… 마교의 제왕 지존께서 아프시지…… 흑흑… 내가… 내가…….”

능파의 기억은 대법이 풀리는 와중에 바위에 얻어맞아 마치 파편처럼 조각나 버린 상태였다.

지금 그가 마교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마교, 지존, 충성, 십절쌍마, 능파, 능혼’ 등의 단어들뿐이었다.

즉, 대법 중에 마교에 대해 열중하고 있던 그의 심령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을 제외하곤 전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또한 그의 예리한 감각 대신 어린아이처럼 순수함만이 자리하게 되었다.

‘차츰 좋아지시겠지…….’

능혼은 스스로 위안하며 손추에 대해 말을 꺼냈다.

“형님, 우리가 오늘 걸인의 모습을 하신 지존을 몰라 뵙고 손을 쓰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렇지……. 그것만 생각하면… 난 정말 나쁜 놈이야.”

“교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다시 우리가 우리 형제를 괴롭히고 말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감히 어떤 놈이 우리 마교의 식구를 괴롭힌다는 거야?”

능파가 주먹을 들어 보이며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다면 치도곤을 치겠다는 듯 눈알을 부라렸다. 능혼은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 마교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이 말을 시작으로 능혼은 대충 200년 전의 마교의 멸망에서부터 어떤 계획으로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하나하나 들을 때마다 능파의 눈은 점점 더 확대되었고 실핏줄이 흰자위를 가득 메워 곧 터져 나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는 송아지가 구슬픈 눈물을 떨구듯 구슬같이 굵은 눈물을 흘렸다.

능혼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맺었다.

“…오늘날 마교 재건을 위해 남은 자 중 손추의 후손이 아까 동굴에 누워 있던 그 녀석 같습니다.”

“불쌍한 녀석이었구나. 내가 그런 녀석을 괴롭히다니…….”

“형님 잘못이 아닙니다. 휴우∼ 처음 시작은 이상하게 꼬였지만 처음에 잘되고 나중이 잘못되는 것보다는 지금은 조금 좋지 않아도 이것을 교훈 삼아 교주님을 진심으로 따른다면 좋은 결과를 나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아우야, 잘해보자꾸나.”

대충 현재 상황을 이야기했기에 어느 정도 이해한 것 같았지만 여전히 능파에겐 뭔가 모자란 듯 보였다. 이것은 능혼도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손패 차례였다. 능혼은 정신을 잃은 손패를 벽에 기대게 한 채 장심에 손을 얹고 기를 불어넣으며 내상을 치료했다.

잠시 후 손패의 머리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고 입가로 검은 피가 조금씩 밀려 나왔다. 이건 회복의 전조였다.

‘휴∼ 그래도 이 정도니 다행이군.’

그나마 형님이 죽을 정도로 패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 줄 몰랐다. 교주님과 비교해 보자면 이 정도는 그다지 문제될 것도 없었다.

다시 부러진 어깨뼈를 맞춘 후 검지로 양미간을 빠르게 세 번 자극하자 손패가 번쩍 하고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릴 수 있겠느냐?”

손패는 아직까지 고통스럽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전체적으로 몸이 훨씬 가뿐해진 상태였다. 그는 전해오는 말투로 미루어 어느 정도 오해가 풀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옆을 바라보니 무자비하게 후려 팼던 흑의노인이 보이자 손패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능파는 멋쩍은 듯 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다가왔다.

“미안하다.”

능파의 짧은 한마디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싸움을 끝낸 후 화해할 때 말하는 것 같았다.

손패는 십절쌍마에 대한 선입견과 너무도 큰 차이가 나는지라 약간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되었든 마교의 높은 어르신들이 아닌가.

그는 아픈 몸을 틀어 무릎을 꿇었다.

“속하 손패, 십절쌍마님을 뵈옵습니다.”

“흠…….”

능혼은 침음성을 흘렸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손추의 후손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있어 십절쌍마를 거론할 수 있겠는가.

“너는 손추의 후손이렷다?”

“그렇습니다.”

능혼이 손패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손패는 짙은 감회에 사로잡혔다.

잠시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수많은 말보다 더한 말들이 서로 간에 오고 갔다. 이 시대 마교인들은 이곳 동굴에 있는 네 사람이 전부인 것이다. 능혼이 짙은 탄식을 뱉어내듯 물었다.

“네가 이곳으로 지존을 모셔왔겠지?”

손패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그, 그렇습니다만… 속하…… 눈이 있어도 하늘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

“후우∼ 너도 지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로구나.”

“…….”

“사실 우리도 처음 지존께서 거지 행색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로 인해 그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거기까지만 들어도 손패는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도 자칫하다가 지존과 한판 붙을 뻔했지 않은가.

“나는 지존께서 왜 걸인의 모습으로 불귀도에 오시게 되었을까를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난 그 위대하신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지존께서 그리도 높으신 뜻을 품으셨음을 이제야 깨닫다니…….”

손패는 눈에 궁금함을 가득 담아 물었다.

“그렇다. 지존께서는 마교의 부활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것이다. 혹시나 적들이 알아볼까 염려하시어 천한 걸인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나타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감히 따를 수 없는 위대함이 아니더냐. 이런 누추한 옷과 더러움을 마다하지 않으시다니…….”

능혼의 말에 손패의 눈에선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고 다시 주르륵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옆에 있던 능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광경은 다른 사람이 봤다면 우습게 여겼을지 모르나 마교인들에게는 가슴을 절절히 울리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 지존이시여…….’

손패는 처음 뵈었을 때의 소탈한 모습을 떠올렸다.

‘참으로 완벽한 걸인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이제 다시금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자 하나하나가 철저히 계산된 행동들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손패의 가슴에서 한줄기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그건 바로 감동에 이은 충성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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