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78.
능혼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고 섬을 좌충우돌 들쑤시고 진정한 지존을 찾아 헤맸다. 거의 반 시진(1시간)가량을 미친놈처럼 돌아다녔을까.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가 찾는 교주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진정 천마지체를 타고난 교주 독무행은 섬서성에 위치한 취운산 언덕배기에 매달려 있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능혼이 섬을 수백 바퀴를 돌고 강호를 골목 어귀까지 다 돌며 찾는다 해도 지존 따위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능혼이 섬을 열 바퀴 정도 돌았을 때였다.
“지존이시여, 어디 계시는 겁니까! 지존이시여!”
능혼이 모든 내공이 실린 듯한 큰 음성으로 외쳤다.
작은 섬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대단한 소리였지만 돌아오는 것이라곤 한줄기 바람뿐이었다. 능혼이 허망하게 사방을 둘러볼 때 어느새 비는 그치고 구름은 밀려나 아침 햇빛이 섬을 가득하게 비췄다.
‘지, 지존은 도대체 어디 계시고 이상한 거지새끼만 섬에 있단 말인가.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없어.’
그의 마음에 짙은 불안이 드리워졌다.
‘교, 교주님은 대체…….’
생각해 보니 천극간시공해체대법이 풀리면서 형님 능파가 쓰러진 것부터가 불길함의 시작인 것만 같았다. 그의 뇌리 속으로 수없이 많은 의문과 번민이 스쳤다.
‘과연 제대로 200년이 지나 대법이 풀렸을까?’
다시 그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때에 맞춰 대법이 완성되지 않고 한 100년 정도 만에 깨어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곧 능혼은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린 없어 혹시… 천선부에 의해 교주님이 해를 당하신 것은 아닐까?’
그러자 이번엔 아까 동굴에서 보았던 거지의 정체에 강한 의구심이 일었다.
‘거지의 휘파람 소리에는 내력이 가득 실려 있었다. 평범한 녀석이 결코 아니었어. 천선부에서 파견 나온 고수가 아닐까?’
능혼은 뭐가 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어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의 마음은 어느덧 200년 전 마교의 최후가 떠올랐다.
200년 전 마교는 천선부를 주축으로 한 정도 연합 세력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당시 마교는 교주인 무령마제(武令魔帝) 조환(趙幻)이 천선부의 부주인 중원제일고수 일지수악(一指垂岳) 강무(姜武)에게 죽임을 당하고 마교의 수뇌들 또한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교주 조환은 마교의 등불이 밝혀질 때가 후대에 있음에 기대를 걸었다. 비록 자신의 때에는 마교가 멸망하나 200년 후에는 극한 마성을 지닌 천마지체가 나타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은 마교 최고의 두뇌라는 오뇌자 신기천의 예언이었기에 의심에 여지가 없었다.
신기천은 200년이 지난 때에 마교를 부흥시킬 위대한 천마지체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했다.
천마지체의 인연은 마교와 이어져 있으므로 그로 인해 마교는 크게 부흥할 것이고 전 무림은 마교 아래 굴복하게 될 것이라 했던 것이다.
그 예언으로 인해 무령마제 조환은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되는 바, 그것이 바로 천극간시공해체대법을 시행함이었다.
천극간시공해체대법의 실행과 천기를 맞춘 것은 신기자의 몫이었다. 그 대법의 대강의 요체는 이러했다.
200년 동안 대법의 힘을 빌려 몸을 그대로 유지한 채 동면에 들게 하고 예언의 때에 맞추어 깨어나도록 함이었다. 그 역할은 십절쌍마가 맡게 되었는데 십절쌍마라 함은 당시 마교 교주에게 무공과 학문을 가르쳤던 능파와 능혼을 가리킴이었다.
하지만 마교인들이 어찌 천기가 변동할 것임을 알 수 있었겠는가. 신기천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이 일을 의심한 이는 없었다. 허나 신기천은 속으로 이렇게 한탄했었다.
“혹시, 어쩌면, 만에 하나… 천마지체와 상극을 이루는 만성지체(晩成肢體)가 강호로 나와 활동하게 되고 천지묘용으로 인해 둘이 만나게 된다면 모든 것이 괴이하게 바뀌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염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만성지체인 표영이 우여곡절 끝에 게으름을 깨기 위해 강호로 나오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표영과 그의 사부 엽지혼이 함께 있을 때 천마지체 독무행과 급기야 상봉해 버린 것이 아닌가.
독무행은 자그마한 언덕배기를 높은 절벽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거기에 매달려 운기행공의 때를 놓치고 죽고 만 것이다. 그때부터 천마지체 독무행에게 이어질 천기의 흐름이 표영에게로 옮겨져 결국 오늘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고 있는 표영과 능혼은 둘 다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능혼은 등줄기로 싸늘한 식은땀을 흘리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 울음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거지 녀석을 다그치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겠는가.’
능혼의 몸은 바람과 같이 동굴로 향했다. 그때 표영은 어정쩡한 자세와 얼떨떨한 표정으로 동굴 입구로 나와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쨌든지 간에 지금 섬에서는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느닷없이 등장한 노인이 어떻게 나올는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날이 밝아 사물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기에 뚤레뚤레 노인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그때 번갯빛같이 능혼이 눈앞에 이르렀다. 경신술에 있어서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표영으로서도 탄성이 나올 만한 움직임이었다.
“아하하… 또 오셨군요.”
표영이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하지만 능혼은 눈빛을 번뜩이며 칼 같은 어조로 물었다.
“넌 도대체 누구며 지존은 어디에 계시느냐? 어서 말하라.”
험악하기 이를 데 없는 물음이었으나 표영으로서는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존이라뇨? 이 거지로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어저께 이곳에 혼자 왔을 뿐이라 노인장의 말씀을 한마디도 이해할 수가 없답니다. 근데 노인장은 어디에 계시다가 나타나신 겁니까? 원래 이곳에 살고 계셨나요?”
능혼은 울화통이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표영이 억지로 어눌하게 말하며 조롱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 노부와 지금 장난을 하겠다는 것이냐? 똑바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당장에 네놈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말겠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네놈의 정체는 뭐냐?”
백 번을 물어도 표영의 답은 오직 한 가지뿐일 터였다.
“허허… 이거 참, 노인장도… 제 생각에는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계신 듯한데… 전 그냥 거지라니까요.”
능혼의 눈이 불길에 휩싸이며 살의를 드러냈다.
표영은 온몸으로 위험 신호를 감지했다. 마음의 기세를 간파하는 공능이 깃든 비천신공이 긴장하라고 연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목이 부러져도 여전히 지껄일 수 있는지 보겠다.”
능혼의 손이 예비 동작도 없이 쑥 뻗으며 표영의 목을 향했다.
손이 채 이르기도 전에 먼저 살기가 뻗었고 그 다음으로 기세가 몰렸다. 표영은 좌우로 피하게 될 시엔 연이어 펼쳐지는 공격에 대항할 여지가 없을 것임을 알고 뒤로 주르륵 물러서며 다급하게 외쳤다.
“노, 노인장.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말로… 이크!”
변명을 마칠 새도 없이 매서운 공격이 이어졌기에 표영은 파옥권을 전개하며 간신히 장력을 막았다.
입구 쪽에 있다가 뒤로 물러나며 동굴 안으로 들어가게 된 표영과 쫓아 들어온 능혼의 손이 중도에 서너 차례 부딪쳤다.
파파팍!
표영은 손이 교차하면서 손목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내 이제껏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을 지닌 자로구나.’
수개월 전 개방에서 자신을 쫓아낸 장로 이요참도 이 노인에 비하자면 두세 수 아래로 평가할 수 있을 듯싶었다. 아무리 이차 각성을 이루었다고는 해도, 그리고 지금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아내고 있다고는 해도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았다.
‘진개방이고 뭣이고 간에 여차하면 불귀도에서 뼈를 묻게 생겼구나.’
놀라고 있는 것은 표영만이 아니었다. 능혼도 거센 공격 속에서 은근히 놀라며 불안감이 더욱 증폭됐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니었구나. 이렇듯 젊은 나이에 태연히 나의 공격을 막아내다니…….’
능혼의 불안한 마음은 엉뚱한 상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정도 젊은 고수를 배출할 수 있는 곳은 천선부 외에 또 어디가 있겠는가. 진정 지존의 발자취가 천선부에 의해 드러난 것일까? 그럼 이미 암수를 당하신 것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은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고 손은 더욱 빨라졌다.
“어서 말하라. 교주는 어디에 계시는 것이냐!”
표영은 힘겹게 막아가며 기혈이 들끓었기에 말을 내뱉을 입장이 아니었지만 대뜸 살인적인 공세를 펼치는 노인에게 울화통이 치밀었다.
“이 미친 노인장 같으니라고, 하릴없는 거지에게 뭘 얻어먹겠다고 이 난리란 말이오. 얼어죽을 놈의 교주를 왜 거지에게 묻소이까? 정말 환장하겠네!”
이 말은 능혼의 염장에 불을 질렀다. 교주라는 단어 자체에 생명을 걸고 있는 능혼이었기에 교주를 능멸하는 말에 분노가 활화산처럼 들끓었다.
“뭣이 어쩌고 저째! 이 썩을 놈 같으니!”
능혼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고 이번엔 화염마공을 시전했다. 그러자 양손에 푸르스름한 불꽃이 일었고 주위가 화끈거릴 정도로 대단한 열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아까보다 더욱 거세진 공격이었다.
표영은 점점 상황이 악화되어 가자 이대로 가다간 분명 개죽음을 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수는 없었다.
‘노인이 미친것뿐 아니라 무공도 고강하니 일단 도망가고 보자.’
도망친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시간을 끌 필요는 있었다. 도망치면서라도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표영은 능혼의 얼굴을 향해 온 힘을 모아 기를 발출했다. 장력이 뻗어가며 거대한 기운이 밀려들자 능혼이 일순 주춤했다.
‘이때다!’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것이라 작게나마 빠져나갈 만한 공간이 열렸다. 표영은 동굴 왼쪽 벽면을 발로 연달아 세 번 짚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능혼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화염을 날렸지만 아슬아슬하게 표영이 지나간 자리만을 가격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딜 도망가는 것이냐!”
신형을 쭉 뽑아내며 표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노인장, 차분히 말로 해결합시다. 아무리 내가 거지라도 해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사람을 패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거지란 게 원래부터가 서러운 건데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니오? 뭐, 평소에 거지에게 원한이 있다손 쳐도 당사자인 거지에게 따질 것이지 모든 거지를 원수로 생각할 것까지야 없지 않겠소이까.”
뒤따르는 능혼은 의외라는 듯 눈빛을 빛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어찌 된 것이 경공은 더욱 뛰어나구나.’
기실 표영의 무공 중 현재 가장 뛰어난 것은 독공과 경공이었다.
첫째로 독공은 오극전갈로 인해 만독불침의 경지에 이른 상태이니 상대할 자가 없는 지경이랄 수 있었다. 맘만 잔인하게 먹는다면 독을 장법이나 지법을 통해 발출하여 살상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마땅히 해독법을 알지 못하기에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는데다가 표영 스스로도 독공을 발휘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둘째로 경공은 거지들의 필수인 삼십육계 줄행랑과 일치하는 것이라 그 깨달음이 남다른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마교의 초절정 고수인 능혼조차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능혼이 뒤쫓으며 말을 받았다.
“오냐, 대화를 나눠야겠지. 하지만 네놈의 두 팔과 두 다리를 분지른 후에 차분히 이야기하도록 하마.”
표영은 더 이상 말을 해봤자 이야기가 될 것 같지 않자 신법을 날리는 데만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이 육지가 아니라 섬이라는 점이었다.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한참을 앞서 달려가던 표영은 경사진 언덕을 도약한 후 발이 닿기 무섭게 앞으로 치달렸다. 하지만 곧 이어 앞을 보며 뜨악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정면에 떡하니 흑의를 입은 노인이 가로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이 흑의를 입은 노인은 십절쌍마 중 능파였다.
대법이 풀리면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는 깨어난 후 섬을 서성이다 달려오는 표영의 길목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거지야, 어딜 그리 급히 달려가느냐. 크하하하!”
표영으로서는 진퇴양난의 위기일발이 아닐 수 없었다.
‘제길, 이 노인은 또 뭐야?’
멈춰 서서 대화를 나눌 만한 여유는 없었다. 표영은 급한 가운데서도 상대의 안색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라보건대 흑의노인의 표정엔 전혀 악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표영은 다급한 김에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노인장! 어서 비키세요. 뒤에 괴물 같은 놈이 쫓아오고 있어요!”
능파는 괴물이라는 말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틈에 표영은 쌩하니 능파를 스치고 달음질쳤다.
“괴물? 그럼 이 능파가 가만 내버려 둘 순 없지. 거지야, 넌 먼저 가라. 괴물은 내가 처치하마.”
지금의 능파는 십절쌍마 중 한 명이자 능혼의 친형으로서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원래대로 하자면 이렇게 어눌하게 속아 넘어가 괴물을 처치해야겠다고 다짐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는 잔뜩 이맛살을 찌푸린 채 다가올 괴물을 기다렸다. 그리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바로 언덕을 솟아오르는 괴물 같지도 않은 놈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능파가 잔뜩 기합이 들어간 자세로 능혼을 발견했을 때는 능혼도 능파를 알아보았다.
형님이 동굴에 누워 있지 않고 이렇듯 깨어난 것이 기뻤으나 여기서 긴 이야기를 할 시간은 없었다. 일단은 거지 놈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능혼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크게 소리쳤다.
“형님, 어서 거지 놈을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능파의 대답은 능혼의 기대를 한참이나 빗나간 것이었다. 능파는 양팔을 활짝 펼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크하하하! 이 괴물 같은 놈아,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