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8장 (69/199)

 # 68

68.

“…….”

만첨뿐 아니라 노각도 쥐 죽은 듯이 입을 닫았다.

“만첨∼.”

음성이 커지며 만첨의 고막에 울림이 한층 더하자 만첨은 쪼르르 달려갔다.

“네, 방주님. 부르셨습니까.”

표영은 벽에 기댄 채 여전히 눈을 감고 말했다.

“듣자 하니 불만이 많은가 보구나. 그렇지?”

‘헉! 들렸단 말인가?!’

만첨은 뜨끔해졌다.

“에헤헤… 불만이라뇨. 제가 어찌 하늘같으신 방주님께 불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번쩍 하고 표영이 눈을 떴다.

“그래? 그럼 내가 잘못 들었나 보군. 너, 지금 배고프지 않냐?”

긴장이 풀린 만첨이 몸을 배배 꼬며 배시시 웃었다.

“어헤헤… 조금 배가 고프긴 합니다만 참을 만합니다.”

표영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으레에∼.”

말을 길게 빼며 표영이 여운을 남기자 만첨의 얼굴이 확 변했다.

꿀꺽.

만첨의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났다.

표영이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거지란 모름지기 배가 고파선 안 되는 법. 거지의 신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제때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 가자.”

“아, 아니, 전 괜찮은데요.”

하지만 표영이 성큼성큼 앞서 가자 어쩔 수 없이 만첨은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고 노각도 덩달아 따랐다.

표영은 개 짖는 소리가 나는 집 앞에 멈춰 서서 살며시 문을 열었다. 문 앞쪽에 개집이 보였고 누렁이 한 마리가 ‘어떤 새끼야’란 식으로 배꼼이 머리를 내밀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누렁이는 표영을 보자마자 그만 빳빳하게 경직되고 말았다.

그건 동물들이 천적을 만났을 때 오금이 저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단 한 발자국도 뗄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낑낑… 낑낑…….

그저 누렁이는 다 죽어가는 신음을 내며 항복을 선언하는 소리만 간신히 내뱉을 뿐이었다.

만첨과 노각은 그 모습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틀간 따라다니면서 만났던 개들마다 저러한 반응을 보였으니 이젠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처음 이런 광경을 접했을 땐 얼마나 놀라고 황당했는지 모른다.

“개들이 미쳤나.”

‘개 짖질 않아.”

정말이지 거지 왕초는 뭔가 달라도 다름을 느꼈던 터였다. 그들은 표영이 견왕인 것까지는 몰랐지만 마음 가득 대단한 거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둘은 누렁이를 바라보며 이곳에서 또 비참하게 구걸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자 침울함에 빠졌다.

‘누군가 황금을 싸 짊어지고 와서 이 짓을 하라고 해도 못할 짓이건만…….’

‘휴우∼ 목숨이 담보로 잡혀 있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하지만 사실 사태의 심각성은 그들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표영은 성큼성큼 걸어가 누렁이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쳤다. 누렁이는 잔뜩 겁에 질려 목을 쑥 집어넣었다. 재수 없으면 오늘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 송구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누렁이는 눈을 내리깔고 처분만을 기다렸다.

“누렁아, 고생이 많구나. 녀석.”

의외로 따뜻한 말에 누렁이는 벅찬 감격에 휩싸였고 만첨과 노각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방주가 또 개하고 말을 하네. 지금 벌써 몇 번째냐.’

‘저 개가 진짜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걸까?’

표영은 몇 차례 더 톡톡 친 후 개집 앞에 놓여 있는 누런 국물로 이루어진 개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잠깐 한 끼만 봉사해라. 알았지?”

누구의 명령이라고 누렁이가 거부하겠는가. 그저 목숨만 부지해도 감지덕지할 상황인데 말이다.

헤헤헥.

누렁이가 혀를 내밀며 마구 꼬리를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개 밥그릇엔 몇 차례 누렁이가 핥아먹었는지 밥풀이 윗면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만첨과 노각은 방주가 뭐 하려고 개 밥그릇을 드는지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서, 설마…… 그, 그럴 리는 없겠지. 아무렴, 거지도 사람인데 그럴 리는 없을 거야.’

‘왜 저러시나. 호, 혹시…….’

만첨이 짐작한 ‘설마’와 노각의 ‘혹시’는 안타깝게도 현실이었다.

“만첨, 아까 배고프다고 했지? 자, 먹어둬라. 그릇을 만져 보니 아직 따뜻하구나. 식기 전에 먹어야 제 맛이 나니 어서 먹어라.”

표영이 개밥을 놓고서 태연히 말하자 만첨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하마터면 혀를 깨물어 버릴 뻔했다.

“네?! 이, 이것을요?!”

표영이 뭐 그런 것을 묻냐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표영의 바짓자락이 한 움큼 내려왔다. 만첨이 경악성을 터뜨리며 철퍼덕 무릎을 꿇고 표영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용서를 빈 것이다.

“방주님! 제발! 이건 사람의 할 짓이 아닙니다. 제발요∼ 전 불평을 터뜨린 것이 아니라 아직 적응이 안 되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한 소리였습니다요. 제발요∼.”

하지만 표영은 대답 대신 허리에 차고 있던 타구봉을 꺼내들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지?”

만첨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맞고 먹을래 그냥 먹을래’란 뜻이잖은가.

옆에서 보고 있던 노각은 힘겹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이건 천행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굳게 다짐했다.

‘노각, 잘했어. 앞으로는 절대 방주 앞에서 허튼소리를 하면 안 돼. 씹더라도 그냥 속으로만 씹어야 하는 거야. 알겠지?’

한편 개밥의 원래 소유자인 누렁이는 그 광경을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꼭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먹으면 안 되는데… 쩝. 견왕께서 드신다면 몰라도 저런 헐렁한 놈한테 내 밥을 뺏기다니… 정말 통탄할 일이로구나.

누렁이는 제발 먹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인 반면 만첨은 하늘이 노래졌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이냐. 나는 갑작스레 다른 세상에라도 와버린 걸까? 어떻게 내가 거지를 방주로 모시게 되었으며 방주라는 작자는 내게 독을 먹게 하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 이젠 개밥을 먹게 한단 말인가. 아! 푸짐한 상차림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내가 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는 마음으로 울부짖었지만 결코 피해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방주는 절대 정상인이 아닌 것이다.

극독을 복용케 할 때도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대수롭지 않게 먹었는가 하면, 절벽에 사람을 매달아 놓은 후엔 할머니 목소리를 내며 괴상한 소리를 지껄인 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이젠 개밥까지 먹으라니…….

‘그래, 씨팔. 먹자, 먹어. 독약도 먹었는데 이까짓 것 못 먹겠어!’

만첨은 마음을 모질게 먹고 개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먹는 점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항심의 표출과 오기로 우적우적 먹어댔다.

하지만 오기도 오기 나름인 것이다. 표영 앞에서 개밥 가지고 오기를 부리다니 택도 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투정을 부리거나 반항심을 표출할 때는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어느 정도 통하는 법이다.

표영은 만첨의 모습을 보며 아낌없는 찬사를 터뜨렸다.

“장하다, 장해. 암, 그렇지. 그렇게 꼭꼭 씹어 먹는 거야. 꼭꼭 씹어 먹으면 깊은 맛이 새록새록 나오게 되거든. 그 맛이 일품이지. 정말 훌륭하다, 훌륭해.”

힘을 내어 먹고 있던 만첨은 그 말을 듣자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울컥하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표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 말했다.

“보이느냐. 노각! 저 감동에 젖은 눈물을 말이다.”

노각이 얼떨떨하니 가까스로 대답했다.

“네? 네… 정말 보고 있는 저로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면입니다.”

그 말은 만첨의 아픈 가슴을 한 겹 더 도려내는 칼질과 같았다.

친구라면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이 먹게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둘은 진개방의 한 식구가 아니던가 말이다.

‘저런 놈을 내가 이제껏 친구라고 믿고 있었단 말인가!’

만첨은 이를 갈며 개밥을 주섬주섬 먹었다. 그렇게 절반쯤 먹었을까. 그는 표영을 향해 씩씩하게 말했다.

“방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오늘 이와 같이 방주님의 가르침을 받고서야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임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이것이 개밥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은 개밥이기 이전에 귀한 양식입니다. 전 오늘 진정한 가치는 외적인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어떤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가 중요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오호∼”

표영은 이 짧은 순간 참거지로서의 깨달음을 얻은 듯한 만첨의 말에 감탄을 발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노각은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놈이 미쳤나?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만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하여 저는 앞으로도 개밥을 먹을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품은 이 순간 제가 느끼고 깨달은 것을 혼자서만 얻는다는 것은 친구인 노각에게 참으로 미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디 노각에게도 걸인의 길이 얼마나 복된 길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오호라∼!”

표영이 다시 감탄을 발했다. 하지만 노각은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허걱! 너, 너 정말…….”

‘이 새끼, 내가 네놈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노각은 눈에 불을 켜고 만첨을 노려봤지만 이미 그에겐 거역할 수 없는 지상 명령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나머지는… 노각. 네가 먹어라.”

노각은 다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바, 방주님… 어찌 남이 열심히 먹는 것을 빼앗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서 말씀하시길 다른 사람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사람처럼 나쁜 사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노각의 말은 한줄기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자자, 어서어서 식기 전에 먹어야 해. 안 그러면 참맛을 못 느낀다니까. 아까부터 계속 이야기했는데 내 말을 허투루 들은 거냐.”

표영이 신바람이 나서 다그치자 노각은 눈물을 머금고 주저앉아 개밥을 먹기 시작했다. 복수에 성공한 만첨이 속으로 득의한 미소를 머금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흐흐… 노각아, 노각아. 나만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무사할 줄 알았느냐.’

노각이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참고 나머지를 거의 처리할 즈음 표영이 속을 뒤집어놓았다.

“국물이 일품이거든! 국물 남기면 곤란해. 알았지?”

너무 기가 막혀 하마터면 다 쏟을 뻔했지만 어쩌겠는가. 목숨을 맡긴 상태이니 말이다.

결국 노각은 국물까지 깨끗이 먹어치웠고 밥 주인인 누렁이만이 처연한 눈빛으로 지켜볼 따름이었다.

다 먹은 것을 확인한 표영이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빈 그릇만 응시하고 있는 누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누렁아, 오늘 큰일했다. 앞으로도 개의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알겠지?”

누렁이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자신의 천적이자 절대 존경의 대상인 견왕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아닌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아까까지 개밥을 뺏겨 서운했던 감정이 봄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왈왈∼.

만첨과 노각은 느글거리는 속내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방주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저러다 우리한테도 개하고 말하라고 시키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네.’

‘제길, 저 누렁이 정말 좋아하는구나.’

누렁이 집에서 걸음을 옮긴 표영은 두 사람과 나란히 걸으면서 말했다.

“아까 만첨의 말을 들어보니 참으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과연 네놈들이 진정한 거지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이었거든. 하지만 아까 만첨의 말은 너무 감동적이었어. 아! 다시 생각해 봐도 멋진 말이 아니더냐.”

만첨과 노각은 기가 막혀 이를 앙다물고 터져 나오려는 신음소리를 간신히 참았다.

‘뭔가 불안해.’

표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6일 동안 이곳에 머물며 우가장의 상황을 살필 것인즉 그동안 너희는 개밥으로 식사를 대신하도록 해라.”

만첨과 노각은 몸이 굳어버려 걸음을 멈췄다. 만첨은 만첨대로 후회가 밀려들었고 노각은 만첨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둘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명심해라. 절대 끼니를 걸러서는 안 돼. 알겠지? 가자.”

표영은 배시시 웃으면서 뒤에서 눈물짓는 두 부하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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