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67.
한편 느닷없이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쳐진 우경은 몸이 천장(千丈) 아래로 쑥 떨어져 내리는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지며 눈을 번쩍 떴다.
머리가 아래쪽을 향하고 있던 터라 시야에 들어온 산악의 광경은 공포 그 자체였다.
출렁.
어느새 넝쿨 줄이 다하며 떨어지는 기세가 멈추었다. 하지만 다시 몸은 반동에 의해 위로 튕겨졌다가 다시 옆으로 꺾이면서 몇 번인가를 요동쳤다.
“으아악∼ 사, 사람 살려∼!”
우경은 자신이 죽어 지옥에 온 것이라 생각했다.
‘흑흑, 사람이 살면서 악한 길을 걸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더니만 끝내 지옥에 오고 말았구나. 근데 그 많고 많은 형벌 중 하필 절벽에 매달리는 형벌을 받을 게 뭐람.’
그는 평소에도 고소 공포증(高所恐怖症)이 있어 높은 곳에 올라가길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런 그가 이젠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에 거꾸로 매달리게 되었으니 그 공포는 가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도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는 연약한 넝쿨 줄기에 매달려 있는 것이니 말이다.
“제발 살려주세요. 염라대왕님이라도 있으면 좀 나와 보세요. 다른 벌을 받겠습니다. 제발 좀 바꿔주세요. 흑흑흑.”
우경은 이곳이 지옥인 줄 알고 연신 헛소리를 해댔다. 그때 표영이 위쪽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천음조화를 시전하며 할머니 음성으로 말했다.
“우경, 너는 어리석게도 어찌 허랑방탕한 생활을 살고 있느냐. 비록 너의 부모가 소홀히 키운 것이 문제라 하겠지만 넌 변해도 너무 변하고 말았구나. 내가 누구인 줄 알겠느냐? 나는 너희 집에 팔찌를 건넨 할머니다.”
우경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머니! 할머니.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로 바른 사람이 되겠습니다. 흑흑흑… 용서해 주세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이렇게 지옥에서 평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흑흑.”
한쪽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만첨과 노각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 이번엔 또 뭐냐. 느닷없이 웬 할머니?’
‘우경이라는 놈과 방주는 잘 알고 지낸 사이였나 보구나. 그래도 그렇지. 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표영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너희 집안이 화목하고 마음이 고와 복을 주려 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호의호식하는 데 힘을 쏟을 뿐 아니라 방탕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으니 계속 두고 볼 수 없었다. 만일 너와 가족들이 열흘 안에 마음을 고쳐먹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용서할 것이로되 그렇지 않을 시엔 생명을 부지하긴 힘들 것이다. 세상사 내일 일을 모르는 법이다. 네놈들이 가난하게 살다가 갑작스레 부유하게 된 것처럼 반대로 부자에서 가난한 자가 될 수도 있으며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잊지 말아라. 열흘이다.”
우경은 대답하기에 바빴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부디 지켜봐 주십시오. 제발∼”
표영은 이 정도면 충분히 심령에 새겨졌으리라 생각하고 위에서 넝쿨 줄을 마구 흔들었다.
“으아악∼! 살려주세요! 앞으로 잘한다니까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허어억!”
우경은 몸이 좌우로 극심하게 출렁거리자 곧 절벽에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심장이 벌렁거리며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고 두 눈알도 당장에라도 튀어나와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급기야 우경은 한소리 처절한 단말마를 외치고 혼절하고 말았다.
“커어억∼!”
표영은 슬그머니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계획한대로 혼절했는지를 확인했다.
“후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리곤 넝쿨을 잡아채 우경을 끌어 올렸다.
살짝 잡아챈 것에 불과했지만 깔끔하게 우경의 몸이 솟구쳐 공중으로 비상했다. 안전하게 몸을 받아 든 후 넝쿨 줄을 풀고서 가볍게 몸을 주물러 곧 정신이 들도록 해주었다. 늦어도 반 시진 이내에는 정신을 차릴 수 있을 터였다.
“자, 우린 이만 내려가자.”
표영이 큰일을 치르고 만족해할 때 만첨과 노각은 아리따운 소춘의 손을 한 손씩 잡고 어루만지면서 흐뭇해하고 있었다.
표영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이것들이 그냥… 콱!”
벼락같이 달려가 주먹을 교차하며 둘을 흠씬 두들겼다.
“어쿠쿠! 살려주세요. 방주님.”
“으거걱! 다신 안 그럴게요. 손이 너무 곱다 보니 그만… 커억!”
실컷 두들겨 맞은 둘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엎어져 간신히 숨만 내쉬었다. 표영은 손을 탈탈 털었다.
‘자식들, 까불고 있어.’
근데 표영이 소춘의 손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고왔다.
‘후후… 진짜 곱긴 곱구나.’
표영은 씨익 웃고는 만첨과 노각을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셋 셀 동안 일어나지 않으면 아래로 던져 버린다. 하나, 둘… 흐흐, 그래야지. 가자.”
어느새 일어난 만첨과 노각을 데리고 표영은 휘파람을 불며 산 아래로 향했다.
우조환의 안색은 하루하루 노랗게 변해갔다.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식은땀을 흘리는가 하면 간혹 식사를 하는 중에도 멍하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초점을 잃기도 했다.
그건 비단 우조환에게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그의 부인 모가영도 일체 외출을 삼가고 집에 틀어박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왔다 갔다 했다.
아들 우경의 경우는 그 증세가 더욱 심각했다. 절벽에서 고공 곡예를 한 탓에 자다가 경기를 일으키기도 했고 식사는 하루에 한 끼 정도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삼 일이 지나면서 차츰 그들은 서로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각자가 자신이 들은 것을 말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족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염려하며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평소와 같지 않은 모습들을 발견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그런 가운데 집안의 가장인 우조환이 어렵사리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필히 이야기할 것이 있는데…….”
우조환은 근년에 들어 제대로 가족 간의 대화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한 말이었지만 모가영과 우경은 선뜻 응했다.
“좋아요.”
“좋습니다, 아버지.”
오랜만에 진지하게 탁자에 앉은 가족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이들은 이제껏 식사도 따로따로 할 정도로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고 대화는 짧고 간단하게 이루어져 왔었다.
예를 들자면 우조환과 우경의 대화는 ‘오셨어요’, ‘응’ 이것이 전부였고, 우조환과 모가영은 아예 대화 말 자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저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다 보니 우조환도 이야기를 하자고 해놓고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이제 6일밖에 안 남았지 않은가.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겠어.’
우조환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부인, 나는 요즘 들어 악몽에 시달리고 있소. 꿈이야 이런저런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사흘 전부터는 계속 한 사람의 꿈만 꾼다오.”
모가영과 우경의 귀가 솔깃해졌다. 꿈이라니,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그가 하고 있지 않은가. 우조환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은 5년 전에 우리 집에 팔찌를 남겨두고 가신 할머니가 나타난다오. 그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내게 크게 실망했다고 합디다. 과거의 내가 아니라는 말을 하면서 말이오. 사실 그 할머니는 하늘의 지성존자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내게 온 것이라고 했소. 난 솔직히 믿고 싶지 않았지만 꿈에서든 길을 걸을 때든 너무도 생생하게 할머니의 음성이 들리는지라 견딜 수가 없구려.”
우조환은 재물을 다 처분해야 한다는 말을 해야 했기에 차마 식구들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모가영과 우경은 입이 쩍 벌어진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우조환의 말을 듣는 순간 말로 형용 못할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꿈을 꾼다는 것도 무서운 데다 머릿속에 할머니가 들어 있는 것처럼 길을 걸을 때나 무엇을 먹을 때나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으니 말이다.
우조환은 괴팍한 성격으로 변한 아내가 버럭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어디서 잡소리를 하는 거예요’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 소리가 없자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그는 놀라 안색이 흙빛이 되어버린 아내와 아들을 바라보며 덩달아 놀라 물었다.
“왜, 왜 그러시오, 부인! 경아, 너는 또 왜 그러느냐?”
모가영이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사실은… 저도 그 꿈을 꾸었지 뭐예요.”
우경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저, 저도 할머니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경의 말이 떨어지자 세 명 모두는 극단의 공포감을 느꼈다. 이제는 급기야 하늘의 징계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그럼 진실로 그 할머니는 하늘의 지성존자였단 말인가?”
두 사람까지야 어찌어찌 우연이라고 우겨보겠으나 세 사람이 일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짜고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게다가 그동안 가족 간에 서로를 얼마나 불신하고 있었던가 말이다.
급기야 우경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추운 겨울도 아니건만 그 어떤 한기보다 더한 추위가 뼛속까지 후벼 파는 듯했다.
“저, 저, 저는 이, 이렇게 주, 죽을 수는 어, 없어요.”
두려움에 쌓인 우경의 말에 우조환이 어깨를 감싸주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취해본 손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부인을 향해 침중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우리가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구려. 부인 생각은 어떻소. 할머니, 아니, 지성존자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해야 하지 않겠소?”
모가영은 도박을 하다가 마작패가 가루가 되고 벽에 해괴한 글자가 기록된 것까지 보았던 터라 이견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해야겠지요. 원래 우리 것도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휴우∼.”
우조환은 아내가 고분고분하게 말하는 것이 언제였던가를 생각하고는 감회가 새로웠다.
“음… 요 며칠 사이 나는 많은 생각을 했소이다. 나는 과연 5년여 동안 행복했던가 하고 말이오. 하지만 정작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진정 행복하지 않았음을 느꼈다오. 그동안은 그저 돈을 쓰고 놀며 즐기는 것이 행복이다, 라고 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던 것이 아닌가 싶소이다. 어쩌면 적게 벌더라도 땀을 흘려 수고한 대가를 얻었을 때라야 한 푼 한 푼 쓰더라도 즐거운 것이 아닐까 싶구려.”
그렇게 말문을 연 우조환에 이어 모가영과 우경 또한 마음에 있는 말들을 토해냈다.
모가영은 처음엔 반발심으로 밖으로 싸돌았지만 점점 정신은 황폐해 가는 걸 느꼈다며 진심으로 마음을 돌이켜야겠다고 했다.
우경 또한 앞으로 보람된 삶을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했다.
점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세 사람은 마음이 일치되어 감을 느끼고 진정 가족다운 모습을 보였다.
“내일부터 가산을 정리하도록 하겠소. 살아가는 데 구차하지 않을 정도만 남겨두고 앞으로는 없는 가운데서도 베풀며 삽시다.”
그 말을 듣는 모가영과 우경의 마음에도 어느새 따스함이 피어나고 있었다.
제12장 걸인의 철칙
만첨과 노각은 죽을 맛이었다. 그런 감정이 피어 오른 동기는 표영으로부터 받은 두 가지 지시 때문이었다.
1. 식사는 절대 음식점에서 사 먹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길은 오로지 구걸뿐이다.
2. 앞으로 목욕이라는 것은 없다. 또한 내 허락 없이 옷을 갈아입는 것 또한 용납치 않겠다.
이제껏 자유스럽게 강호를 활보하던 둘은 감옥 아닌 감옥에 갇힌 꼴이 돼버리고 만 것이다. 아니, 어찌면 감옥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곳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제때 밥은 나오지 않는가.
“정말 추접스러워서 못 살겠네. 아이, 씨팔.”
“휴우∼ 어쩌겠나. 이것이 운명인가 보다 해야지. 우린 코 꼈어.”
둘은 표영이 골목 어귀에 기대 잠든 것을 확인하고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신세 한탄 중이었다. 이 정도면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계산한 터였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독이 발작하기도 전에 미쳐서 죽고 말 거란 말일세.”
만첨이 얼굴이 붉어지도록 불만을 토해내자 노각이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 부질없는 소리야. 우린 저승사자보다 더 지독한 이와 동행하지 않을 수 없지 않나.”
표영에게 생명을 맡긴 것이나 다름이 없기에 노각의 저승사자에 대한 비유는 적절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저렇게 추접한 저승사자가 있을려고… 에잇, 더러워서 원.”
“그만 하게, 정 못 견디겠으면 가서 따져 봐. 그렇지 못할 거면 그냥 잠자코 있는 게 속 편할 거네.”
노각의 말에 만첨이 발끈했다.
“따져 보라니! 노각, 야이 새끼야! 그래도 네가 친구냐. 엉! 죽고 싶어!”
이제까지 소곤소곤 대던 만첨이 큰 소리를 내며 주먹을 날릴 기세를 부렸다. 노각도 열이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따 대고 새끼를 부르짖나. 이 호로 상놈의 자식아! 그래, 붙어보자!”
만첨과 노각이 으르렁거리며 일촉즉발의 상황에 돌입해 있을 때였다.
“만첨!”
‘이건 방주의 목소리!’
만첨은 귀에 가까이 대고 말하고 있는 듯 들리는 목소리에 순간 얼음처럼 몸이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