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64.
실제 우조환은 일가친척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가질수록 욕심은 더욱 커져 여기저기서 뜯어가려는 이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정말 욕심도 많으시군요. 하하하.”
표영은 하하하 웃으면서 일순 손을 어지럽게 움직여 우조환의 혼혈을 짚었다.
우조환은 어찌 된 노릇인지도 모른 채 뜨끔함을 느끼고 고개가 축 처졌고 이어 몸을 옆으로 누이며 쓰러졌다.
“자, 그럼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 볼까.”
표영은 우조환을 반듯이 눕히고 가만히 손을 그의 머리끝에 위치한 백회혈에 가져갔다. 표영은 눈을 감고 그 할머니에 대해 생각했다.
잠시 후 대략적인 생각을 마치고 천음조화를 시전하며 노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것은 여태껏 말하던 표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늙수그레하며 쉰 듯한 할머니의 음성이었다.
“네 이놈! 나는 너의 겸손함과 나같이 불쌍한 자를 돕는 가상한 마음을 보고 너에게 귀한 보물을 주었건만 너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헛되이 재물을 사용하였구나.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뜻이었건만… 쯧쯧,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게야. 고얀 놈 같으니. 내 너에게 열흘간의 말미를 주겠다. 그동안 너희 세 식구가 적당히 살아갈 돈만 남겨두고 모두 어려운 사람을 위해 재산을 나눠주지 않는다면 너의 목숨과 가족의 목숨을 취하도록 하겠다!”
표영은 처음엔 직접 재산을 다 털어버릴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 보니 그렇게 되면 결코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으리라 여겼다.
재물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마음이 문제가 아니던가. 천음조화를 통해 그의 심령에 할머니의 음성을 새겨놓아 스스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 결론지은 것이다.
표영이 심어놓은 말은 우조환이 잠들어 있을 땐 꿈을 통해서, 길을 걸을 때는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어온 것처럼 들릴 것이며, 식사를 하다가도 불현듯 머리를 울릴 것이다.
표영은 너무 약한 것이 아닌가 싶어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심령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음성을 심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나는 하늘의 지성존자(至聖尊子)로 이 땅의 한 사람을 통해 여러 사람을 이롭게 하고자 했다. 하지만 너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도움을 입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이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너의 죄가 결코 작지 않다. 만일 정녕 네가 돌이키지 않는다면 너와 네 식구들은 생명이 땅에서 끊어질 뿐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억겁의 고통을 받게 될 것임을 명심하여라.”
표영은 말을 맺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할머니가 하늘의 지성존자라는 말은 아주 잘 지어낸 것 같았다.
‘이 사람은 기막힌 우연과 행운으로 신비로움 속에 재물을 얻었으니 그것을 해제하는 것도 어찌 보면 마음에 자리한 신비로움을 이용해 풀어야겠지. 표영아! 너는 아주 똑똑하구나. 흐흐흐…….’
표영은 웃음을 머금고 다시금 여러 차례 반목하여 그의 심령에 심어준 후 그의 혼혈을 풀었다. 우조환은 몸을 꿈틀거리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고 그사이 표영은 번개같이 신형을 날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홀로 강둑에 앉은 우조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깜박 잠이 들었었나 보구나. 헌데 아까까지 있던 거지는 어디로 갔지? 설마 꿈이었을까?”
그는 머리가 복잡해지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에구, 이제 술은 그만 마셔야지. 이게 대체 무슨 꼬락서니란 말인가.”
그는 술에 취해 괴상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제11장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표영은 담 너머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장원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곳은 화도장원으로, 홀로 사는 과부 고춘의 거처였다. 어젯밤 우조환에게 그간의 사정을 들은 후 사람들에게 물어 그의 집을 알아두었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우조환의 부인 모가영의 뒤를 밟아 따라온 터였다.
대낮인데도 방에서는 왁자지껄하니 여인들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뭐 하는 거야. 어서 패를 돌리지 않고.”
“알았어, 이년아. 오늘따라 왜 그리 다그치는 거냐.”
“잡년, 말하는 것 하고는…….”
표영은 여인들의 속된 말에 위장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으나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 앞에 두 명, 왼쪽에 한 명, 오른쪽에 두 명이로군.’
장원 안에는 무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중 두 명은 화도장원의 호위 무사들일 것이고 나머지 세 명은 아마도 아낙네들을 따라온 무사들일 것이 분명했다.
다른 무사들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들은 다른 내전에서 쉬고 있는 것이리라.
‘차라리 오는 길에 덮칠 걸 그랬나?’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려고 이곳까지 몰래 따라온 것이었는데 의외로 여러 명이 있자 약간 망설여졌다. 제압하는 것이야 어려울 것이 없겠으나 되도록이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효과적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는 데까지 해보자.’
표영은 장원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왕래가 없어지길 기다려 장원의 대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누구요?”
“…….”
표영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누구시오?”
“…….”
대답 대신 또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어떤 놈이 장난을 하는 것이냐?”
대문 곁에 있던 두 무사는 짜증난다는 듯이 벌컥 문을 열고 나왔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이런 제길.”
두 무사가 두리번거리며 인상을 구길 때 표영은 이미 대문 위쪽으로 몸을 옮긴 상태였다. 두 무사가 막 돌아서려 할 때 표영이 훌쩍 뛰어내리면서 둘의 마혈과 혼혈을 찍었다. 두 무사의 무공 수준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기에 미처 ‘으억’ 하는 신음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들은 동네 건달 같은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상당한 수준일지 몰라도 강호의 고수들에 비할라치면 여러모로 손색이 많다 할 수 있었다.
두 무사는 마혈이 찍혀 몸이 그대로 굳어버림과 동시에 혼혈이 찍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굳이 혼혈과 마혈을 동시에 찍음은 몸을 굳게 하여 대문을 바라보게끔 세워두기 위함이었다. 혹여 누군가 지나가다 보더라도 크게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것이리라.
이제 남은 인원은 세 명이다. 표영은 대문 밖에서 허리에 차고 있던 타구봉을 장원 안으로 세차게 던졌다.
획- 하는 소리와 함께 타구봉이 마당 한가운데 꽂히자 세 명의 무사들이 달려들었다.
그 찰나 표영은 풍운보를 시전해 바람처럼 몸을 솟구쳐 그들 머리 위를 넘었다. 무사들은 뭔가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을 느낀 순간 등이 뜨끔해지며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흐흐흐… 남의 물건을 탐하면 곤란하다고.”
표영은 작게 중얼거리며 타구봉을 갈무리하고 내전으로 가까이 접근했다. 안에 있는 여인네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도박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표영은 문틈 사이로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며 모기만 한 소리로 모가영을 불렀다.
“모가영.”
우조환의 아내 모가영은 한참 마작에 온 힘을 쏟고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왜 그러는데, 왜 불러.”
아마도 마작을 하는 다른 여편네가 부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오늘따라 패가 좋게 돌아와 많은 돈을 딴 터였다. 모가영의 말에 다섯 개의 포목점을 운영하는 봉만희가 꼬장을 부렸다.
“잡년아, 부르긴 누가 불렀다고 난리야. 괜히 일찍 튀려고 수작 부리는 거냐.”
그러자 다른 여편네들도 덩달아 한마디씩 보탰다.
“헛수작 부리면 좋지 않아. 알겠어?”
“돈을 많이 따더니 이젠 환청이 들리나 보지?”
모가영은 분명 누군가가 부른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부르지 않았다고 하자 머리를 긁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해, 잡것들아. 내가 언제 돈 따고 튄 적 있냐?”
말은 미안하다고 했지만 전혀 미안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다.
표영은 그녀의 위치를 가늠하고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워낙 은밀하게 연 것도 연 것이었지만 그보다 아낙네들이 마작에 온 정신을 쏟고 있던 터라 문이 열리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표영은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지풍을 부챗살처럼 날렸다. 협소한 공간이라 지풍은 효과적으로 부녀자들을 쓰러뜨렸다. 지풍에 맞은 부인네들은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지며 잠들고 말았다. 수혈이 찍힌 것이다.
“에구… 대낮부터 잘한다, 잘해. 이럴 시간에 자식들 교육이나 잘 시킬 것이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표영은 혀를 찬 후 모가영에게 다가갔다.
모가영의 모습은 우조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조환의 삼중 턱살이나 모가영의 삼중 허리나 오십보백보였다.
거기다가 화장을 짙게 한 터라 마치 산돼지가 곱게 차려입은 듯 보였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마음에 있으니 옳지 못한 마음은 사람의 모습도 추하게 바꾸는구나.’
우조환의 이야기 속에서 들었던 과거 현모양처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젠 과거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표영은 그녀의 백회혈에 손을 대고 할머니 음성을 흉내 내며 천음조화를 시전했다.
“네 이년! 나는 네가 한 남자의 부인으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보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너의 모습은 겸허함과 불쌍한 자를 가상히 여기는 마음은 어디에 버리고 허영과 쾌락에 몸을 맡기고 있느냐.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뜻이었건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보았구나. 고얀 년 같으니라고. 열흘 동안 여유를 주겠다. 그동안 세 식구가 적당히 살아갈 돈만 남겨두고 모든 재산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면 너의 목숨과 가족의 목숨을 취하도록 하겠다!”
잠시 말을 멈춘 뒤 표영의 말이 이어졌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냐. 나는 근본이 하늘의 지성존자로, 한 사람을 통해 여러 사람을 돕고자 했다. 하지만 너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도움을 입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힘겨워하게 되었으니 그 죄가 작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돌이키지 않는다면 너와 네 식구들은 억겁의 고통을 후생에 받아야 할 것을 명심해 두어라.”
우조환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심어주었다. 이렇게 되면 각자 같은 꿈과 환청을 계속해서 듣게 될 터이니 나중에 이 사실을 서로 알게 되면 마음에 더 큰 두려움을 품게 될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표영은 모가영에게 천음조화를 시전한 후 다른 부녀자들을 바라보았다. 이들도 모가영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들이라 생각하니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모두 최소한 도박만큼은 못하도록 만들어야겠지.’
표영은 마작패 136개를 집어 하나씩 손에 쥐고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패는 대부분 골재로 만들기에 부수는 것은 크게 힘든 것도 아니었다. 부스스 가루로 만든 후 표영은 지력을 사용해 벽에 글자를 새겼다.
[앞으로 도박을 하다 내게 걸리면 그땐 죽음이라는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모든 부녀자들은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도록 하라.]
크게 배운 바가 없어 글자 모양이 좀 우스웠지만 벽에 새겨진 것만으로도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자, 이 정도면 됐다. 다음 차례는 아들 녀석이로구나. 이들은 일식경(30분) 안에 자연히 깨어날 테니 굳이 혈을 풀어 줄 필요는 없겠어. 부녀자들이 깨어날 때쯤이면 밖에 있는 무사들도 비슷하게 깨어날 테니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겠지.’
표영이 홀연히 장원을 빠져나간 후 일 식경이 지나 부녀자들은 한 명씩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입가의 침을 닦으며 일어났다가 마작패가 가루가 돼버린 것에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누가 이런 짓을…….”
“한참 따고 있었는데 대체 누가 수작을 부린 거야.”
그때 장원의 주인인 고춘이 벽에 새겨진 글귀를 보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저, 저건 어떻게 된 거지? 앞으로 도박을 하면 죽이겠다니…….”
고춘은 다급히 일어나 무사들을 불렀다.
“아무도 없느냐, 아무도 없느냔 말이다!”
말 한마디면 달려올 호위들이 소식이 없자 고춘과 부녀자들이 황급히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때 무사들은 조금씩 해롱해롱 거리며 깨어나고 있었다.
“이런…….”
부녀자들은 일순간 두려움에 휩싸였고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난 가야겠어.”
“나도.”
“나중에 보자고.”
모든 부녀자들은 공포라는 무거운 선물을 마음에 담고 얼굴이 하얗게 변해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갔다. 모가영의 마음에도 두려움이 엄습했다.